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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71화 (171/224)

00171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대낮이라 해서 못 마실 건 뭔가.

대작은 아니어도, 적당히 마실 정도는 된다.

“배고픈데, 먹을 거 없냐.”

“항상 느끼는거지만, 형은 식객인 주제에 바라는 게 많아. 주제를 잘 알라고.”

“옛말에 손을 귀히 대하란 말이 있지. 이 땅콩은 지나치게 푸대접이야.”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요즘 말도 있지.”

한 마디를 안 지는군.

쌍놈의 새끼. 그러면서도 투덜거리며 일어나서 계란을 지져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게 천성인가 싶다. 말을 일부러 밉게 하는 건 대체 언제부터 저랬던걸까.

아니지. 대부분의 사람에게 저러고, 제가 마음에 든 사람에게만 행동으로 보여준다.

“...밥 안 먹었어?”

설원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먹긴 했는데, 그거면 돼.”

그러면서 계란 프라이를 꺼내놓고, 난데없이 계란말이를 해버린다. 박헌영도 요리를 잘 하긴 하지만 설원도 요리를 못 하는 편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둘 모두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밥 줘?”

“아니. 괜찮아.”

“다행이네, 어차피 없거든.”

갑자기 혈압이 확 오르는 것 같다.

“......제발, 뭔가 할거면 고마운 짓만 하거나, 미운 짓만 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

내 하소연하는듯한 말에 설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달라고 하면 안쳐주려고 했지. 밥은 없는데 쌀은 있어.”

“그러니까 둘 중에 하나만 하라고!”

“그게 내 매력이잖아.”

“지랄도.”

내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씩씩거려도 녀석은 계란말이에 케찹을 대강 뿌려서 가져와 테이블에 얹어놨다. 냄새는 좋다. 썰어놓지도 않은 채 그냥 덩어리째로 가져오긴 했지만, 그런 게 오히려 마음에 든다.

대충대충 해버리고, 배려하지 않는 것 같지만, 결국 따뜻하다는 게 중요하다.

그걸 아니까.

썰어놓은 채 냉장고에 넣어놓은 계란말이보단, 썰리지 않은 채 갓 나온 계란말이가 더 맛있으니까.

따뜻하지 않은 음식만을 먹어온 내게 이것은 언제나 작은 축복이었다.

만들어져 있던 것만을 먹고, 식어버린 것을 데워서 먹고, 항상 혼자 식탁에 앉아왔던 나니까.

이것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설원이 계란말이를 통으로 내오는 게 나는 더 마음에 드는 것이다.

먹다보면 망그러져서 냉장고에 넣을 수도 없으니까. 남긴다는 가정도 없이, 다 먹을거라 당연히 생각하고 만들어진거니까.

이걸 다 먹을 때까지, 우리는 이렇게 앉아있을거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으니까.

설원이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쳐다본다.

“고사를 지내시네.”

“닥치고.”

심호흡.

“먹자.”

-챙

작은 울림과,

작은 넘김.

그리고 작은 차가움과

그 후의 더 작은 뜨거움.

나는 술을 좋아한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더 이상 설원은 농담을 하지 못했다. 굳은 표정으로, 내 말을 놓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듣는다. 그리고 숨이 찰 때마다 술을 권해온다. 설원은 말하는 걸 좋아하지만, 그보다 듣는 걸 더 잘 한다.

나는, 엄밀히 말하자면 듣는 건 잘 못 하는 타입이다.

주장하고, 답을 내리고, 결정하는 걸 더 욕심낸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보다는 설원이 훨씬 나은 인간이겠지.

“병가랑 말년휴가랑 합쳐서 휴가 나왔고, 부대 가서 전역증만 받아서 나오면 돼.”

내 군생활은 잘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불상사가 벌어졌다. 유상병을 위해서 전역파티를 해주려 했고, 이런저런 걸 신경썼지만 정작 나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나는 돌아가는 것조차 껄끄럽다. 전역신고를 비롯한 수많은 절차들을, 나는 겪지 않을 셈이다.

내가 이렇게 변해서라기보다는, 그곳으로 돌아가는 게 두렵다.

이건, 도망이겠지.

“형은, 그 사람이 형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거야?”

설원은 나를 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는, 설원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길 원한다.

“...내 영향이 없지는 않았겠지.”

그가 원했고, 그래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서 모든 걸 면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문다.

“하면 안 되는 선택을 했고, 결과가 이렇지. 나는, 내가 이렇게 된 것도 중요하지만, 나 때문에 그 녀석이 죽은 게.... 더 견딜 수 없어. 현명하게 행동했어야 하는데, 현명한 척만 해왔어. 답을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최악의 오답이었지.”

“사람은 원래 그래.”

현명한 사람은 없고, 다들 현명한 척을 하고 있다. 답을 내리지만, 그것은 오답일 수 있다.

설원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원래 그렇다고 해서, 그래도 되는 건 아니야.”

“맞는 말이지.”

설원은 내 잔에 술을 따르고, 내 잔에도 술을 따른다.

“하지만, 사람은 원래 그렇다는 것도 역시. 잊어선 안 되는거야.”

지독할 정도의 인간주의자.

설원.

너의 그 태도를 이따금 환멸했지. 인간애라는 실체도 없는 것에 기대서, 뭐든 그럴 수 있고 저럴 수 있고, 그렇게도 될 수 있으며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그 태도.

회색이기에 싫어했다.

향상심이 거세된 인간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지금도 가끔 든다.

하지만.

“.......”

인간애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결국 인간애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인가.

나는 그런 말에, 위로받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으면서,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으면서. 그걸 나 자신이 제일 잘 아는데.

뭔가 나아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아니, 착각이 아니겠지, 이건 위로받은거다.

“그리고 누가 그래.”

“뭘.”

“형 때문에 죽는거라고 그 사람이 말하기라도 했어?”

“그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같은 건 필요없어.”

설원은 조금, 무섭게 파고든다. 내가 자주 이 녀석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을 해왔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만큼.

내가 이 녀석의 인간애를 이해하듯, 이 녀석도 내 화법을 이따금 사용한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그렇지 않은거야. 오해 때문에 자학에 빠지는 건 존나게 미련한 짓이야.”

“...정황이 확실한데 말로 확인하지 않았을 뿐이고, 실제로 다른 이유가 있다한들 나는 분명히 원인 중 하나야. 자기합리화 같은 걸 하고 싶진 않아. 외면하고 싶지도 않고.”

외면하고 도망치는거다. 나는 이미 현실에서 도망쳐버렸지만, 사고에서마저 도망쳐버리는 게 된다.

내 말에 설원의 인상이 구겨진다.

“산다는 건 원래, 그런 걸 외면해가는 과정이야.”

“하, 웃기시는군.”

어이가 없다.

“너야말로, 그런 외면을 세상에서 제일 못 하는 놈이잖아.”

자기 자신이 한 잘못, 실수.

그런 것들을 항상 되씹고 고민하며 그 누구보다 남을 원망하는 데에 인색한 놈에게 듣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당장 그 누구보다 이 녀석에게 큰 잘못을 했던 전 여자친구 얘기를 할 때에도 설원은 썅년이라 욕하면서도, 내가 잘못한 게 많았다며 후회한다.

그 외면, 자기합리화.

세상에서 제일 못 하는 녀석이 내겐 그런 자기합리화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건 나고.”

“.......”

“내가 그렇게 산다고 해서, 남도 그렇게 살길 바라진 않아.”

설원은 진지하고 확고한 표정으로, 소주를 한 잔 들이키며 싱긋 웃는다.

“그게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지 않길 바라지.”

나는 그런 미친놈이지만, 이렇게 미친놈처럼 애쓰며 살 필요 없다는 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다는 소리다. 그러면 대체 왜 그렇게 살지?

“뭐라는건지.”

정신병자같은 놈.

아니, 정신병이겠지 저건. 확실해.

아마,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종류의 그런.

뭔지모를 이름의 병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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