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0 IF - 그래도 선준이래요 =========================
몇 번의 검진 결과 당연하다는 듯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말을 들었다. 부대 관계자가 몇 번 들르며, 간부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본대로, 유상병은 케이블 타이로 목을 졸라 자살했다. 시신은 유가족에게 인도되었고, 그 날의 당직사관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헌병대에게 조사를 받고 있을 터였다.
나에게도 헌병대 조사관이 찾아왔다. 가장 가까이 지낸 건 나였으니까. 휴가때에도 따라붙었으니까.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가족을 만나고,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말했다. 수사관은 이 꼴이 되어버린 나, 그리고 이 상황에서도 수사를 받아야 하는 나를 동정하는 것 같았다.
나는 처참했다.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사실을 하나 말하지 않았다. 그 날 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거짓을 말하지 않았지만 범죄나 다름없다는 걸 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죄가 죄를 낳는다.
사실대로 말했을 때 어찌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성군기 위반으로 육군교도소에 수감되는 최초의 여성 병장이 될지도 모르겠지.
정의롭진 않아도 악하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내 손으로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아넣는구나, 타의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수사관과의 질의를 비롯해,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병가를 나가서 정신과 검진을....”
그 과정은 이미 세상에 없는 유상병과 함께해봐서 알고 있었다.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 해서 나가고 싶지 않은 건 역시 아니었다. 바깥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간부가 하나 붙어서....”
“아뇨.”
나는 부대에서 온 간부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자살 안 합니다. 해도 전역하고 할겁니다.”
“유사준이도 제가 자살할거라 말하진 않았어.”
“...감시역으로 누굴 붙이면 자살할겁니다.”
내가 그리 나올줄은 몰랐는지 간부는 눈을 크게 치떴다. 나는 군생활에서 충실한 노예이자 충견이었다.
그런 내가 이런 말도 할 줄 안다는 건 몰랐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불안정하다는 걸 나 스스로도 인정한다. 하지만 감시자가 따라붙은 휴가를 나가느니 차라리 나가고 싶지 않다.
이미 전역하는 마당이다.
내 몸도 이렇게 되어버렸다.
전역은 한 달 남았다.
“병가를 말년휴가에 붙여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폭탄이다.
내가 죄를 지은 유상병은 이미 죽었다.
살아있는 누구에게 죄갚음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나는 씹새끼가 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현역적부심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그냥, 나를 신기한 동물 보듯 하는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다. 너는 이런 시선을 느끼고 있었나.
나도 저런 시선으로 너를 봤었나. 그렇게 하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구나.
시선 자체가 역겹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다만, 거북살스러운 시선들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주하다보면 불편했다. 이곳이 병원이기 때문이다.
내가 TS바이러스 발작으로 ‘또’찾아온 그 부대의 누군가라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 이상 군이라는 집단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고, 일단은 이 공간을 최우선적으로 나서고 싶었다.
옷이 없는 탓에, 맞지도 않는 내 옷을 입어야 했다.
내가 입던 모든 것은 이제 내게 너무 컸다. 상의, 하의, 전투와, 모자.
너무 커서 거울을 보지 않아도 우스꽝스러운 꼴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애초에 병사의 군복을 입고 있는 여자라니, 그것만으로도 쳐다보기엔 충분하겠지. 우스꽝스러운 꼴로 버스를 타고, 태원을 향해 간다.
신분증도 이젠 소용이 없을거다. 여러 가정을 해보고 상상해본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실감이 났다.
태원 터미널에 도착하고, 대학가로 향했다.
가야 할 곳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신세 좀 질 생각이다.
미안할 것도 없나.
휴가를 가면 으레 그 녀석 방에서 자곤 했으니 이제와서 미안하다 생각하는 내 자신이 기묘하다.
당연한 것이었는데.
이젠 그게 당연하지 않다고 문득 생각하는 나를 느끼곤.
내가 벌써부터 변하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녀석의 방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있으려나, 했는데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업이라도 간 거겠지.
조기복학을 예정해두고 있었기에 수강신청은 이미 되어있고, 그래서 나 또한 수업을 들으려면 그럴 수 있다. 어지간하면 수업을 빠지지 않는 편이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잠은 물릴 정도로 잤다.
“염병할....”
하지만 나는 녀석의 방 꼴을 보곤 인상이 확 찌푸려진다. 박헌영만큼은 아니지만 설원도 청소를 더럽게 안 하고 사는 건 마찬가지다. 역겨운 환경에선 절대로 정명한 심상이 오지 않는다.
이런 주제에 소설을 쓰겠다고?
문득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씩씩거리며 방을 치웠다. 가장 먼저 녀석의 트레이닝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쓰레기를 모아 치우고, 빨래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다. 조금이나마 방이 깨끗해졌나 싶을 때.
-삑삑삑삑
그리고,
나는 그제야 이게 좀 이상한 상황이라는 걸 실감했다.
“어....”
-덜컥
“어?”
문을 열고 들어온 설원은 그걸 열기 무섭게 다시 닫아버렸다.
“죄송합니다!”
-쾅!
남의 방을 잘못 열었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자신이 얼마나 등신같은 짓거릴 했는지 알아챈 모양인지.
-덜컥!
다시 문이 열린다.
“아, 아니 여기 내 방 맞는 것 같은....”
나도 얼떨떨해져선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다.
“나, 나, 선준....”
“선준? 아, 형 새 여자친구?”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진다.
뭐라고 설명해야 되는거지? 어렵진 않은 것 같은데, 한 마디로 똑 떨어지지 않는다. 설원은 문간에 석상처럼 굳은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사람을 보내? 기분 좆같네.”
설원은, 꽤 까칠한 놈이다.
심사가 뒤틀리면 아무렇게나 막말을 하고, 그건 남자여자를 가리지 않는다. 설원은 이런 놈이지.
제 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에겐 불퉁스럽고, 경계한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이 녀석은 항상 그랬다. 그리고 나에겐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기도 하다.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심사가 뒤틀리는지 설원은 방으로 들어와선 한숨을 쉬었다.
“그쪽도 그렇지. 갑자기 찾아와서 뭐하는거예요? 뭐야, 그리고 이거 내 옷 같은데.”
“그게, 그게 아니라....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거 내 옷 맞는데.”
설원의 키가 이렇게 컸나.
아니, 내가 작아진거지. 다가오는 설원을 보며 나는 살짝 뒤로 물러선다.
뭐야, 내가 왜 물러서는건데? 하지만 내겐 너무 커져버린 설원의 모습이, 조금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동안 설원은 한켠에 잘 개어져 있는 내 군복을 보고 있었다.
“뭐야, 말출 벌써 나왔나? 멀었다고 들었는데.”
“아니, 내 말을 좀....”
설원의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이곳에 이선준이 제 새로운 여자친구와 들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남녀가 둘이서 할 게 뭐가 있겠는가.
설원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후우.... 저기요. 남의 집에서 낯부끄러운 짓거리 하지 맙시다.”
“이런 미친.... 새끼가.”
“뭐? 미친?”
역시.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처먹어!”
-빠악!
“억!”
설원은,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개새끼라는 걸 내가 깜빡했다.
아구창을 한 대 얻어맞고, 내가 빠르게 쏘아붙인 다음에야 설원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뭐라고...?”
“내가 이선준이라고. 이 씨발, 오해를 해도 정도가 있지 내가 네 집애 내 새 여자친구를 왜 보내는데! 그리고 내가 또 그딴 짓을 하겠냐! 내가 그런 적 있어? 어?”
내가 주저앉은 설원을 퍽퍽 걷어차자 설원은 평소처럼 엄살을 부리며 도망다녔다. 한참을 좁은 방 안에서 도망다니던 설원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인상을 팍 썼다.
“이런 염병할! 그럼 집에 처음 보는 여자가 들어와있는데 그걸 이선준이 TS바이러스에 걸려서 내 집에 온거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게 당연한거냐 이 또라이야!”
“...그건 그렇지.”
“그래! 그러니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설원의 그 주장에 나는, 차가운 숨을 몇 번 내쉬었다.
“내가 화내는 건, 네가 추측을 등신같이 해서가 아니라 내 말을 안 들어처먹어서라고, 정정해주지.”
-뻑!
“억!”
설원은 복부에 주먹을 얻어맞곤 뒤로 슬슬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수틀리면 주먹부터 나가는 거 보니까 이선준 맞네. 확실해.”
“하나도 안 아프면서 꼴값하긴.”
염병.
작게 덧붙이자 설원은 경악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예전보다 덜 아프다고 해서 지금 안 아프겠냐? 이거 완전 상또라이아냐?”
“너는. 씨발.”
-빡!
“억!”
“친구가!”
-퍽!
“윽!”
“이 꼬라지가 됐는데.”
-딱!
“아, 아퍼....”
“걱정을. 먼저.”
-퍽! 퍽!
“지, 진짜 아픈데....”
“하는 게, 순서 아닐까?”
내가 지친다. 맞은 설원보다 내가 탈진해서 숨을 색색 몰아쉬며 주저앉아버렸다. 내 체력은 이 정도가 아닌데.
하프 마라톤도 순위권에 들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을 갖고 있었는데, 힘은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고, 이런 푸닥거리 몇 번 했다고 숨이 가쁘다.
“하아.... 하아....”
설원도 그제야 뭔가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했는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좆됐네 진짜.... 아니, 좆된건 아니....”
“내가 심각하다는 걸 알려주려면, 울어야 되는거냐?”
“미안.”
설원은 내 맞은편에 바짝 앉았다. 그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빛, 뭔가 부담스러운 걸 요구할 것 같은 억지스러운 눈빛.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이런 눈빛의 설원은.
“일단 술이나 처먹자.”
항상 이런 말을 한다.
“대낮인데, 너 수업은?”
“허어.... 뭐라는거지?”
설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친구가 이 꼴이 됐으면, 걱정부터 하라며?”
설원은 냉장고를 열었고, 거기에는 설원의 상비약이자 이 녀석을 글러처먹은 인간으로 만드는 일등공신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소주를 꺼내며, 설원은 씨익 웃었다.
“까짓거, 제껴.”
오히려 내가 어이가 없어진다.
“졸업 안하냐?”
“졸업장은 돈 주면 받는거고.”
그렇다면 다른 건, 돈 줘도 못 갖는거란 뜻인데. 그게 뭘까.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이런 식으로, 말을 추측하게 만들어서 묘한 감동을 준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것.
외로움을 해소해줄 수 있는 사람.
아마 친구겠지.
여전히, 얄미운 놈이다.
============================ 작품 후기 ============================
설원은 원래 까칠하고 성격 더럽죠.
지금은 남자니까 겁먹고 질질짜는 애도 아니군요.
쓰다보니까 남자설원도 묘하게 매력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