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세상에 안 어려운 게 어디있냐? =========================
전날 술도 먹은 탓에, 우리는 해장국을 먹었다.
“너 그런데 학교는 어떡하게?”
박헌영이 묻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출석인정요청서 받으려고, 병결로 해줄 것 같은데.”
“아니…. 그게 아니라, 다닌다고?”
“그럼 때려치냐?”
내 당연한 지적에 박헌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맞는 말이다. 이제는 빚이 아까워서, 증발해버린 돈이 아까워서라도 악착같이 졸업할거다.
“너 그럼 그동안 들었던 수업 다 출석인정 요청서 받는다고?”
“응, 그런데 그거 어디서 받아?”
“전자로 하거나, 서류로 받거나 둘 중에 하나지 뭐. 너 이제 생리공결 쓸 수 있겠….”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그 말이 나오는 동시에 나는 숟가락을 거꾸로 들었다. 당장에 후려갈기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그러고보니 그렇다.
“나, 나…. 생리? 진짜 생리하겠네? 아… 어떡하지….”
“….”
“….”
내가 불안에 떨자 이선준도, 박헌영도 말이 없었다. 충격이 너무 심해서 지금껏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생리라니, TS된것도 미치고 팔짝 뛰겠는데 생리라니! 신체가 아예 새로 태어난 것과 다름없으니 임신도 할 수 있고, 당연히 생리도 한다. 누구한테 물어보지 않아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생리하면 배가 아프다. 얼마나 아픈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많이 아픈 것 같았다. 전전 여자친구는 생리통이 심했다. 진짜 데굴데굴 구르는 걸 한 번 본 기억이 있다.
아, 울고싶다. 진짜로 울고싶다.
“아…. 최악이야….”
박헌영과 이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밥을 먹었다.
“너 왜 쓸데없는 소릴 해서 기분 잡치게 하냐.”
“미안….”
박헌영 이 자식의 입은 정말 만악의 근원이었다.
“너는 왜 입만 열면 날 불행하게 만드냐?”
내가 이죽거리자 박헌영은 말없이 해장국을 먹었다. 제 딴에는 분위기 풀어보자고 한 말일텐데 내가 더 우울해지니 심란할 것이다. 박헌영은 의외로 멘탈이 약하다. 아까 한 대 맞기도 했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양보한다.
“뭐 한 달에 한 번 써먹을 수 있는 그게 내 카드가 되었다는건 역시 기쁜 일인가. 우와! 여자만세!”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선준과 박헌영은 피식 웃었다. 그래, 일부러 우울함에 우울함을 더 보탤 필요는 없다. 나는 일부러 밝게 웃으며 말했다.
“설상가상 수준이야. 이미 눈 왔는데 거기에 서리 내리는 그 정도 수준이야. 원래 불행에는 불행이 겹치는거야! 이미 인생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먼 나라로 떠내려왔는데 거기에 생리 하나 추가된다고 해서 크게 나쁠거 있어? 안 그래도 최악인데 여기서 조금 더 최악이 된다고 해봐야 어차피 최악이라고! 그치? 하나도 안 변했잖아?”
“야, 너 입만 웃고 눈은 울 것 같은데….”
“내가 미안하다!”
박헌영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말하자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절망적인 말을 하니까 이상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진심으로 흰개미가 되고 싶다. 평생 나무기둥에 처박혀서 나무만 파먹는거야. 그러면 죽을 때까지 아무도 안 마주치겠지? 생각해보니 흰개미는 엄청 행복하네, 먹을게 곧 집이잖아? 평생 뜯어먹어도 못 먹을 집 속에서 사는거네? 세상은 불공평해…. 차라리 나를 흰개미로 낳아주지….”
내가 생각해도 헛소리가 점점 심해진다. 뭐 이러는 것도 다 그냥 하는 말이다.
개소리라도 지껄여야 덜 복잡하지.
“학과장한테 가서 상담해봐, 출석인정 요청서 한 번에 발급해줄걸.”
이선준이 말했다. 이 인간도 학점 잘 받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간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빠삭하다. 아닌 것 같으면서 범생이처럼 학교 잘 다녔다. 그런 부분은 솔직히 재수없다. 술도 자주 마시고, 놀기도 자주 놀면서 학점은 잘 받는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한정운보다 짜증난다.
밥을 먹고 난 뒤에는 증명사진을 찍었다. 신분증용 증명사진,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가 2로 바뀌는건가? 바뀌지 않는걸 선택했으니 아예 그대로 있으려나?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데. 사진관에는 디지털 파일로 송부해달라고 이메일 주소를 남겼다. 이제 학교에 간다. 학과장과 면담을 해야 하니까.
학교 근처에 가니까 아는 얼굴들이 보인다. 단과대학 근처로 가니까 더욱 심해졌다. 박헌영과 이선준은 학번 좀 되는 선배라서 인사를 받았다. 당연히 나는 누군지 모르니까 아무도 내게 인사하지 않았다.
쟤네들이 내가 설원이라는 걸 알면 무슨 표정이 될까.
박헌영과 이선준의 옆에 처음 보는 여자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시선을 받았다. 애초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나를 자꾸 쳐다봤다. 시선만으로도 강간당하는 기분이다. 눈에 띄는 여자들은 이런 노골적인 시선을 항상 받고 있었던 건가.
생각해보니까 지금까지 쳐다봤던거 미안해지네.
다들 시선이 저 애는 누구지 이런 느낌이다. 이선준이야 뭐 그렇다 치자.
외모는 괜찮지만 항상 덕후냄새 풍기면서 또라이라는 인식이 후배들에게까지 퍼져있는 박헌영이 곁에 있으니 내가 여자친구라면 누구 여자친구인지 궁금하다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봐도 내 외모가 고학번 선배처럼 비치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있다.
“살해당하는 기분이야….”
시선이 바늘이라면, 나는 지금 선인장이 되어있을 것이다.
“오빠, 휴가 나오셨어요?”
“어, 그래.”
“말년휴가죠?”
“그렇지 뭐,”
누군가 화다닥 뛰어오며 이선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상이 매우 강하지만, 말했듯 이선준은 여자들한테 인기가 좀 많다. 싫어하는 여자들은 진짜 극혐을 외치지만 좋아하는 여자들은 껌뻑 죽을 정도다. 평범하게 생긴 것보단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외모가 낫다.
눈앞의 여자애는 13학번으로, 이름은 서혜인이다. 이름 발음하기 힘들다. 나는 딱 봐도 안다. 얘는 이선준을 좋아한다. 휴가 나올 때마다 연락하라고 하고, 자기가 먼저 연락하기도 한다. 단체 술자리에서 이선준이 있을 때는 꼭 어디 있다가도 나타나곤 했다.
“축하드려요! 곧 전역이네요.”
“그래, 고맙다.”
이선준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혜인은 서글서글한 인상에 스타일도 좋다. 키도 165정도는 되어 보이는게 작은 편은 아니다. 옷차림에도 잘 신경쓴다. 성격은? 뭐 나는 그닥 친하지 않지만 착한 편인 것 같다. 누구한테 싫은 소리 하는 것도 못 봤고, 두루두루 잘 지낸다.
“오빠 전역하면 복학 하세요?”
“어, 좀 늦지만 해야지.”
애초에 학점이 좋아서 이미 수강신청까지 해놨다. 어? 생각해보니까 뭔가 이상하다. 지금은 삼월 중순이다. 이선준의 전역은 3월 31일 화요일이다. 개강 5주차에 복학을 한다니, 그 동안 못 들은 수업은 어떻게 되는거지? 이미 출석횟수 미달로 F처리 아닌가? 학교에서 그런 건 배려해주나?
원래는 내가 내려다보는 입장인데, 서혜인은 구두까지 신고 있으니 운동화를 신고있는 나는 올려다보게 된다. 여자를 올려다보는거, 생각보다 기분 이상하다. 서혜인은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궁금하겠지. 네 사랑 이선준씨 옆에 뜬금없이 붙어있는 자그마한 여자가 누굴지.
설원이라고 말하려다가 왠지 말문이 막혔다. 이거, 생각보다 힘들다.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입이 반쯤 열리다 말았다. 말하고 나서 이 사람의 시선이 어떻게 변할지 부담됐다. 박헌영이나 이선준 같은 사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다. 친구니까.
하지만 타인에게, 면식이 있는 타인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웠다. 이 애한테 말하는 순간부터 설원이 TS발작으로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과내에 퍼질 것이다. 단과대학에도 퍼질 것이고, 캠퍼스 전체가 알게 될 것이다.
TS바이러스 발병자가 교내에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졌다. 실감이 난다. 내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무슨 선택을 한건지.
두렵다. 동물원 원숭이 쳐다보듯 할 사람들의 시선이 무섭다. 말해도 되는건가? 내 자신으로 살기로 했잖아? 말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 시험에 든 기분이다. 나는 지금 이 여자에게 말하면, 그 선택을 평생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람들의 멸시와 냉소적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