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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62화 (162/224)

00162 IF ED NO.1 엄마인 누나, 누나인 엄마 =========================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누나 울어?”

그 말에 정신을 차린다.

“응? 아, 아아니…. 안 울어. 누나가 왜 울어?”

찔끔 나올뻔 하긴 했지만 안 나왔다. 어리다고 해서 고민이 얕은 게 아니다. 어리다고 해서 슬픔이 없는 게 아니다. 놀리는 애들이 나쁘다는 건 준도 나도 안다. 준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상황을 겪었다고 말한 것뿐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준이 지금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게된다.

친한 친구가 네가 여자애였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준은 예쁘다. 그저 짜증만 느끼다가, 준도 지금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것이다.

“괴로워?”

내 물음에 준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자애는 예쁘면 칭찬 듣잖아. 나는 남자앤데 예뻐서 놀림감이나 되고.”

“남자애가 예뻐도 돼.”

“애들이 놀리는데?”

“놀리는 애들이 멍청한거야. 그런 멍청한 애들은 비웃어주면 돼.”

타인의 신체든 뭐든, 누군가의 결함을 가지고 놀리는 건 잘못이다. 애들이라고 해서 그래도 되는 건 아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라서 잔인한 부분이 있다. 준은 그런 것에 노출되어 있다. 준은 잘 모르겠다는 듯 심각해진다.

“준은 주혁이를 좋아해?”

“응, 친구잖아.”

준은 전혀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연애감정이라거나, 사랑한다는 감정을 아직 모른다. 그 주혁이라는 애는 준에게 그걸 느끼고 있는거다. 모르는 걸 설명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골치아픈 문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자체로 매도당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건 머리로 알고 있으면서도…. 준이 아직 가치관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란을 겪는 건 싫다.

“엄마한테는 말했어?”

“아니. 말 안 했어.”

“왜?”

“엄마는 그런 애 만나지 말라고 한단 말이야.”

준은 나와 닮았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런 점에서는 이해하려 노력한다. 부모라는 것은 본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적인 말들을 하기도 한다.

준은 그래서 엄마를 걱정하게 하고, 그런 말을 듣느니 차라리 말하지 않았다.

“누나는 뭐든 열심히 들어주잖아.”

항상 심각한 건 내 단점이지만, 어느 때에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준이 내게만 말하는 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엄마라고 말해주지 못하는 엄마지만, 그래도 나는 준에게 어떤 의미로든 유일한 사람이다. 그게 너무 고맙고 행복하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먹을래?”

“나 떡볶이 먹을래.”

“더 맛있는 거 먹어도 되는데?”

“떡볶이가 제일 맛있어.”

준은 그러면서 주위를 슬슬 살펴보더니 내게 꼭 붙어서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사실 떡볶이가 엄마 밥보다 맛있어.”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준을 끌어안아버리고 말았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여운거야?

나와 준은 떡볶이를 먹었는데, 시내의 떡볶이집에서 시켜먹었더니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준이 말했던 건 학교 앞 떡볶이집이었다. 나도 여지없이 엄마라서 그런지, 별로 그런 걸 먹이고 싶지 않았다. 준은 투정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떡볶이집을 나오면서 학교 앞 떡볶이집을 이야기했다.

“거기 주말에는 문 안 열어 준.”

“정말?”

학교 앞에서 장사하는 곳들은 애들이 안 오는 주말에는 쉬기 마련이다.

“어떻게 알아? 누나는 태원 살잖아.”

“왜냐하면 나도 그 학교 다녔거든.”

“진짜?”

“거기 주인 아줌마 코에 왕점 있지 않아?”

“어? 어떻게 알았어?”

아직도 장사 하시나보네….

“나도 거기서 떡볶이 많이 먹었거든.”

“그런데 아줌마 아니라 할머니야 누나.”

“그, 그래?”

세대차이인가….

어쩐지 서글퍼지기도 하면서 묘한 충만감 같은 게 느껴진다. 내가 다녔던 길로 준이 학교를 다니고, 같은 분식집에서 같은 걸 먹을 것이다. 나는 대전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준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내가 살던 궤적을 따라 살거다.

내 아들이 내가 아는 걸 알고, 그런 말을 종알종알 해대는 건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행복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묘한 감각이 든다.

나이가 드는 건 이런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자라는 건 이런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차를 타도 되지만 준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기에 우리는 인적이 드문 곳을 걸어다녔다.

준을 만나면 단순히 행복한 감정을 넘은 기분이 든다. 슬프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막 들뜨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뭐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나는 단 한 순간도 후회해본적은 없다.

낳아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준.”

“응?”

“나는 네가 있어서 행복해.”

이런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어색해할지도 모르지만, 준은 이런 말을 내게 자주 들어서 당황하진 않는다.

“나도 행복해.”

준은 내 손을 잡고 있다. 작지만 따뜻하고, 작지만 나에게 가장 큰 행복이자 위안이다. 일하면서 겪거나, 사무실에서 받는 스트레스 같은 것들. 때때로 상처받아 집에서 우울해져 있을 때에도 준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

참 이상하다.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준이 내게 사랑한다 말해도 내 마음에는 구멍 같은 게 있어서 쉽사리 메워지지 않는다. 나도 안다. 나는 여전히 사랑을 원한다. 나는 준에게 어느 정도 맹목적이다.

갈망이라 해도 좋은 바람이 있다.

준이 내게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엄마라고 불러줬으면 한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준에게 설명해줘야 할 게 너무 많고, 충격받을게 뻔하다. 누나가 엄마라는 걸 알아봐야 준에게 좋을게 없다. 그저 혼란스럽겠지. 내 욕심을 위해서 준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젠가 말해야 할거다.

준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된 것 같으면 말해야한다. 너무 일찍 말해서 좋을 게 없듯, 너무 늦게 말해도 좋을 건 없다.

나는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런 것들에 너무 지쳐버린 탓이고, 그런 것들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탓이다.

“준, 방학하지 않았어?”

“응.”

준은 따로 학원 같은 건 다니지 않는다. 엄마는 어디든 다녀야 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나는 원하지 않는 건 시키지 않을 셈이다. 이유 없이 열심히 해야만 하는 건 싫다. 공부를 열심히 안 해도 된다고 말할 때마다 준은 이상한 표정이었고 엄마는 쓸데없는 소리 한다며 나를 타박했다.

하긴, 그래서 준이 나를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 차라리 휴가를 낼까?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함께 돌아간다.

저녁을 가족들과 같이 먹고, 밤이 되자 준은 졸리다며 잠들었다. 내가 곁에서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 주자 준은 곧 잠들었다. 내가 오면 항상 이렇게 같이 잔다. 준도 별로 특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젖도 별로 못 물려봤다. 준은 내 팔을 베고 잠들지만, 아이처럼 얼굴을 파묻고 그러지는 않는다.

준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나와 그런 무의식적 거리를 만들어두고 있다. 내 팔을 베고 자지만 안쪽이 아니라 조금, 팔꿈치 정도를 베고 있는 그 모습이다. 가깝다, 아주 가까운 거리지만 안쪽은 아닌 그 거리가 서글프다.

결국 나는 같이 살지 않는 가족이다. 나를 따르기도 하지만 설훈을 그만큼 더 따른다. 빈틈없이 끌어안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잠들고 싶다.

어쩌면, 준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원아, 좀 나와봐라.”

엄마는 준이 잠든 걸 확인하고는 나를 불렀다. 거실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과를 깎아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설훈은 친구들을 만나러 갔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애 방학했다.”

“응, 들었어.”

내 대답에 아버지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TV볼륨을 크게 높였다. 예능 프로그램 소리에 묻혀 아버지의 목소리는 매우 작아졌다.

“며칠 데리고 있어라.”

“응?”

갑작스런 말에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거지?

“방학동안 좀 데리고 있으면서 정도 좀 붙이고 그래.”

“애가 너 어려워하는게 빤히 보여.”

이게 무슨 소리지? 준이 나를 어려워한다고?

“네 앞에만 있으면 풀 죽은 강아지처럼 떼도 안 쓰고 고분고분해지잖아. 몰랐니?”

그 말에 나는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준은 내 말을 잘 들었다. 어딜 가자면 가고, 손을 잡자면 잡고, 사랑한다고 하면 사랑한다고 했다. 준은 나를 좋아한다. 내게만 하는 말도 있다.

준은 착한 아이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내게는 단 한 번도 투정을 부리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엄마는 준이 나를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내가 없을 때와, 내가 있을 때 행동이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방학 동안은 네가 좀 데리고 살면서 친해지고 그래.”

준이 귀찮은 게 아니다. 그저, 나를 어려워하는 준을 보며 부모님은 내가 느낄 슬픔을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몰랐다. 준이 나를 어려워한다는 걸, 내게는 떼를 쓰지 않고, 내 말에는 고분고분해질 정도로 나를 어려워한다는 걸 몰랐다.

그냥,

그냥 준이 너무 착하고 착한 아이일거라고만 생각한다. 나는 왜…. 아무것도 모르는걸까. 준과 나는 명백한 거리가 있고, 나는 그걸 좁히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준과 나의 거리는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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