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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61화 (161/224)

00161 IF ED NO.1 엄마인 누나, 누나인 엄마 =========================

IF 엔딩 No.1

엔딩 분기 지점 - 144화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단지 평범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서,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참고 용서했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너 우니?”

“어, 어?”

“여보, 얘 울어.”

뭔가 결심해야 해.

숨기면서 뭐든 할 수는 없어. 선택하자. 선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어. 나는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엄마, 그리고 아버지를 보며 말한다.

“나…. 임신했어.”

그 말에

엄마는 물론, 아버지도 얼빠진 표정이 된다. 나는 입술을 깨문다. 조용히, 하지만 확고하게 말한다.

“다 설명할게, 다 설명할 테니까…. 그래도, 그래도 하나만 말할게.”

그렇게 생각하자 거짓말처럼 울음이 멈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낳아서 키울거야.”

(9년 후)

“준아. 누나 왔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엄마가 그런 말을 한다.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집 안에서 작은 아이가 후다닥 달려나온다.

“누나아!”

나는 살짝 무릎을 굽혀서 내게 달려오는 아이를 양팔로 끌어안는다.

“설준! 잘 있었어?”

“응!”

“엄마 말 잘 들었어?”

“응, 잘 들었어.”

엄마는 약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나는 엄마와 눈을 마주치고 괜찮다는 듯 웃는다.

“엄마, 준이 말 잘 들어?”

“너 닮아서 착해.”

나를 닮았다는 그 말에 잠깐 울컥한다. 나는 내 품에 안겨있는 준이를 본다. 사내아이지만….

지나칠 정도로 나를 많이 닮았다. 어쩜 이렇게 되나 싶을 정도로 예쁘다. 아직 어려서 2차성징이 안 온 탓도 있겠지만, 그냥 옷을 입혀놓으면 사람들이 여자아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아직도 있다.

준이는 내 목을 끌어안고 매달린다. 아이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젖내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나도 작은 주제에 아이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혹시 키가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구 년 동안, 단 일 센티미터도 자라지 않았다. 그래, 늙지 않은 게 다행이지. 아니, 요즘 들어 생각해 보면 다행도 아닌 것 같지만, 나 거의 방부제에 절여놓기라도 한 것처럼 안 변했다. 가슴이 좀 커지긴 했지만 그건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기도 하고….

“준아, 누나 힘들어. 내려와 얼른.”

“누나 힘들어?”

“아니. 하나도 안 힘들어.”

나는 끌어안고 있는 손에 힘을 준다. 준이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이제 많이 컷지만 여전히 가볍다.

내 아들 설준.

하지만, 우리 엄마와 아빠가 키우고 있다.

준이는 나를 누나라고 생각한다.

내 임신 사실을 고백했던 날, 부모님과 대판 싸웠다.

[너 애 키우면서 사회 생활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낳는 건 낳는다 치더라도…. 절대 못 한다.]

[그, 그럼 어떡해…. 나는 낳고 싶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낳을거야.]

[엄마가 키워줄게.]

[우리 호적에 올려놓을 테니까…. 동생인 걸로 하자.]

[시, 싫어…. 그런 게 어디있어!]

그 후에도 말이 오갔다. 나는 울고, 엄마도 울고, 아버지도 결국엔 화를 내며 울었다. 내가 굴복한 것은 결국 현실의 논리였다.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어쩌고를 떠난 얘기다. 육아휴직을 한다고 해도 그 다음은? 일 년 지나면 애가 알아서 크는 건 아니다. 계속 돌봐줘야 하고 같이 있어줘야 한다.

한 살짜리 아이를 키우면서 회사를 다니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내가 시간 여유가 많은 사람이라 해도 할 때는 해야 한다. 회의도 나가고, 취재도 가면서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같이 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 회사를 천년만년 다니게 될지 어떨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프리랜서고, 당장 문제가 생기면 나부터 잘린다.

당연히, 무섭기도 했다.

결혼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사람에 대한 시선이 두려웠다. 일단 부모님 뜻대로 하고, 아이가 어느 정도 큰 다음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출산 때의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이대로 죽어버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몸이 찢어지고 뼈가 뒤틀리는 그 기분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작은 아이가 내 품에 안겼을 때에는 모든 고통과 슬픔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잡지사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슷한 일을 하는 건 맞는데, 사무직이라서 출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주말에 만나러 온다.

“누나가 선물 사왔는데.”

“진짜?”

“응, 이거 갖고 싶다고 했잖아.”

가방에서 레고 세트를 꺼내자 준이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른다.

“누나 최고!”

그러면서 안겨온다. 아이는 다루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 누구나 다들 아이였는데, 그걸 기억하지 못해서 아이들이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

“너 애 버릇 나빠지게 뭘 자꾸 사오냐?”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는다. 설훈과 아버지도 나를 보며 웃는다. 이제는 가족들의 그런 표정이 익숙하다. 안쓰러워서 못 견디겠지만, 그래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내가 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다. 준은 나를 정말 좋아한다. 일이 바쁘면 주말에 못 올 때도 많지만, 그래도 나를 볼 때마다 기뻐한다. 준은 내 품에 안겨서 레고 세트를 풀어놓고 눈을 빛내고 있다. 나는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준을 힘껏 끌어안는다.

“우우웅! 준, 누나 사랑해?”

“응 사랑해! 누나가 제일 좋아!”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이 쿡쿡 찔리는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나는 엄마지만, 준에게 나를 누나라고 말한다. 준은 나를 누나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부르는 건데,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프다.

내가 엄마야

이렇게 말하고 싶은 순간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든다. 꼭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사실 누나가 아니라 엄마라고 몇 번이나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준을 상처입히게 될 것 같아서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섭다.

왜 그랬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 같아서 무섭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냐고 물으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무서워서, 걱정이 돼서. 너무 두려워서 그랬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자식을 버려두고 생활에 쫓겨 도망친 엄마다. 그런 나를 준이 미워할까봐 무섭다.

“요즘에는 놀리는 애들 없어?”

“응, 없어.”

“말도 마라, 학교에 몇 번이나 불려갔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학교에 불려갔다고?

“준, 너 사고쳤어?”

“응!”

“무슨 사고?”

“자꾸 나보고 기집애같다고 하길래 걔네들 꼬추 때렸어.”

그 말에 설훈과 아버지가 미간을 좁히고, 나와 엄마는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준의 볼을 마구 부빈다.

“잘 했어! 누가 또 그러면 똑같이 해줘야 돼!”

어지간한 여자아이보다 예쁜 외모 탓에 오해를 받는 건 일상이고, 놀림받는 일도 많다. 우리는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깐 바깥에 산책을 나간다. 나와 손을 잡고 걷는 준은 모자간이라기보다는 역시나 누나와 어린 동생으로밖에 안 보인다.

노화가 느리다는 건 이쯤 되면 저주다. 설마 준이 할아버지가 돼도 나 이 모습인 거 아냐?

“누나, 그런데 있잖아.”

“응.”

“그렇게 때려줬더니 놀리는 애들은 없거든?”

“응. 왜? 무슨 일 있어?”

준은 자못 심각한 표정이다. 하지만 이런게 작고 귀여운 애가 그런 표정을 하니 나는 더 껴안아주고 싶어진다. 내 아들이지만 너무 귀여워, 너무 예뻐. 남자애면 어때…. 라는 생각은 좀 그렇네 역시.

여자애가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긴 했다.

하지만 남자애가 이렇게 예뻐서 좋을 건 또 없잖아. 아니, 좋을 게 있긴 한가? 하긴, 이렇게 예쁜 내 죄다.

“저번에, 학교 끝나고 집에 가고 있었거든?”

“응, 집에 가고 있었는데?”

“주혁이가 내가 좋대.”

“주혁이?”

뭐지, 이 불길한 예감은?

아무리 생각해도 주혁이는 남자애 이름인데? 준은 나를 또랑또랑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것도 나 놀리는거야?”

준은 예쁜 외모 때문에 관심도 많이 받지만 놀림도 꽤 받았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꽤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다. 그 남자애를 부랄을 걷어차버린 건 그럴만했으니까 그랬을거다. 엄마가 해결하기는 했지만, 남자애들이 바지를 벗기려고 한 적도 있었다니까….

맞을 놈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설준이 내 나약한 심성까지 닮은 건 아니라 다행이다. 이런 걸 보면 이선준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이선준 생각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준을 좋아하는 남자애라.

이렇게 예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준은 서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작은 입으로 골똘히 생각하며 말하는 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너무 진지해서 나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준은 놀림을 받기는 해도 학급에서는 잘 지내는 모양인지 친구가 많았다. 그래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건 웃으며 넘어갈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주혁이, 최주혁은 준의 가장 친한 친구인 모양이다. 이럴 때마다 아들의 교우관계도 모르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내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준이를 잘 몰라. 그게 가끔 죄책감이 들 때가 많다.

어쨌든,

주혁이는 그냥저냥 잘 지내던 아이였고, 준이 놀림을 받을 때마다 자기가 대신 싸우기도 했던 모양이다.

나도 안다. 이거 완전 좋아하는 여자애 지켜주는 남자애의 행동이다.

그래서 둘이 사귀라는 둥 어쩌라는 둥 놀림도 많이 받았던 모양인데, 주혁이는 힘이 세서 대놓고 그러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일학년이라 해도 남자애들의 세계란 뭐 그렇지.

그러다가 엊그제쯤, 주혁이 하교길에 둘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난데없이 고백을 한 모양이다. 설준은 그 당시의 대화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네가 좋아.’

‘나도 너 좋아.’

‘아니, 아니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

‘너는 예뻐. 예뻐서 좋다고.’

‘그걸로 놀리지 말라고 했잖아!’

‘놀리는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치…. 아무것도 아냐. 아무튼 놀린 거 아니야 진짜.’

‘그럼 그런 얘기 하지 마.’

‘미안.’

주혁이는 준에게 사과를 했다. 그래서 잘 마무리된 모양이다. 준은 그냥 그게 그 얘기로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주혁이가 그런 말을 했어.”

“뭐라고?”

“네가 여자였으면 좋았을텐데, 이렇게 말했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건 그냥 애들이 느끼는 단순한 호감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문제다. 준은 잘 모르지만, 이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을거다.

“걔가 나를 놀린거지?”

하지만 준의 표정은 이미 알고 있다. 그 주혁이라는 아이가 자신을 놀린 게 아니라는 걸.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표정이다. 놀린거라고 말하고 주혁이라는 녀석과 준을 떼어놓아야 하나? 너한테 못된 짓을 할지도 모르니 떨어지라고 해야 할까?

엄마이자 누나인 나는, 준이 그 아이와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가치관은 그게 나쁜 게 아니라 말하고 있다. 게이든 레즈비언이든 뭐든, 그런 마음을 갖는게 잘못된 건 아니다. 그리고 그 주혁이는 여자아이에게 끌리듯 준에게 이끌린 걸거다. 어쨌든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괜찮다는 말도, 나쁘다는 말도 할 수가 없다.

고민 중인 내게 준이 그렇게 말한다. 나를 쳐다보는 그 표정은 진지한 것 같기도,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냥 여자애로 태어나면 좋았을텐데.”

멍한 상태에서, 나는 절망감마저 느낀다.

나는 내 아들을 너무 모른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 IF엔딩은 상당히 분량이 길 것입니다 본편수준이겠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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