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0 True ED - 여왕님 =========================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소주 봉투를 들고 있는 남자였다.
“오, 야…. 너, 너 3D프린터로 등신대 피규어 만들거라더니…. 언제 했냐?”
“어, 어?”
다른 남자도 입을 연다.
“아, 사람인 줄 알았잖아. 존나 놀랐네. 이걸 왜 입구에 세워놔? 어떻게 만든거냐?”
“이래서 돈을 벌어야 된다니까…. 덕질도 예술이다 이 정도면….”
“진짜 엄청 예쁜데?”
내가 미동도 없으니 그들은 나를 등신대 마네킹 뭐 비슷한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박헌영은 여전히 얼이 빠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둘 다 얼이 빠져 있는 표정이다. 마치,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같은 표정이다. 이런 일은 세상에서 없다는 것처럼. 마치 믿지도 않는데 믿고 싶어하는 표정이다.
“마, 맞지? 맞지? 개새끼야! 맞다고 해!”
다른 남자가 박헌영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그리고….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그들과 내 눈이 마주친다. 움직이는 피규어가 있을리가 없다. 그들은 착각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음, 우린 이만.”
“실례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문 도망쳐버린다. 소주와 안주 봉투가 든 봉투를 내버려둔 채다. 여전히 박헌영은 얼이 빠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상상치도 못했던 상황이다. 나는 바닥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작게 중얼거린다.
“씨발….”
이런 개 엿 같은….
잠시 뒤, 나는 박헌영이 술과 안주를 세팅하는 걸 지켜보고 있다. 그 두 사람은 박헌영과 같은 판갤러로, 우연찮게 만나서 박헌영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려고 했던 모양이다.
굳이 나한테 안 알려도 별 상관은 없으니, 추궁할 이유 같은 건 없다.
그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운이 지독하게 안 좋았을 뿐이다. 이름도 모르는 놈들에게 괜히 눈호강이나 시켜주고, 하려고 했던 서프라이즈는 물거품이 됐다.
“진짜…. 엿같아…. 죽고싶어….”
나는 수치심 때문에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린다. 말도 안 돼, 가는 날이 장날인 것도 유분수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거야?
“야…. 너 여자친구 있다고 말했어?”
“그, 그 말은 했는데….”
“아, 아, 진짜…. 아 짜증나아아아아아아! 씨발!”
처음 한거다. 처음 한건데, 진짜로 처음인데!
아마 그 놈들은 내가 매일 이런 거 입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거다. 빼도박도 못 할거다.
“그, 잘 해명해. 진짜로, 진짜 잘 해명해, 알았어?”
“그, 그래….”
나는 박헌영의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다. 안에는 여전히 바니걸 복장을 입고 있다. 너무 화가 나서 갈아입을 생각도 안 들었다. 박헌영의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다. 그저 지독한 우연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출처 없는 분노가 안 생기는 건 아니다.
“술 먹자.”
박헌영은 눈치를 슬슬 보며 소주를 한 잔씩 마신다.
“일 언제 끝났는데?”
“어…. 좀 전에….”
그래서 오늘 밤에 갑자기 약속을 잡을 짬이 생겼다. 그냥 놀래켜주려고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게 문제다. 카톡이라도 좀 했으면 집에 누군가 온다는 걸 알기라도 했을텐데….
우리는 한참 술을 마신다. 나는 결국 취해버려서 외친다.
“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이 나쁜새끼야!”
“내, 내가 뭘!”
박헌영이 항변하지만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말한다.
“너, 너가…. 너가 좀 적극적으로 했으면 이런 짓 안 하잖아!”
“그, 조심했던 게 잘못이냐!”
“그래!”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상관 없는데.
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데, 뭐가 무서운거야? 그냥 들어오면 되는데,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면 되는데.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박헌영의 조심스러움은 가끔 답답할 정도다.
“이씨, 지, 진짜…. 이상한 놈들이나 보여주고…. 더럽혀졌어 진짜….”
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우울하게 중얼거린다. 아, 우울하다.
“그리고 나는 놀라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뭐, 그래서 제대로 보여달라고?”
내가 시비 걸 듯 말하자 박헌영은 갑자기 놀라울 정도로 침착해져서 고개를 끄덕인다.
“어.”
“…….”
그 당당함에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물론 그만 수줍어하라는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대뜸 이러니까 당황하게 한다. 지금 박헌영은 내 검은색 스타킹만 보고 있을 뿐이다. 녀석은 무릎까지 꿇은 채 말한다.
“보여주십시오.”
아, 뭐야 이거. 이렇게 나오니까 갑자기 엄청 부끄러워졌어.
하지만, 내 입으로 꺼낸 말이니까 지켜야겠지.
“그…으럼…. 불 꺼봐…. 너무 밝아.”
박헌영이 벌떡 일어나더니 불을 끄고, 노란색 무드등을 켠다. 집에 이게 왜 있는거야? 처음 알았어. 나는 미약한 조명 아래에서 반바지와 셔츠를 벗는다. 그리고 구석에 내팽개쳐둔 머리띠를 쓴다. 사실 별다를 것도 없다. 그저 토끼 머리띠에 수영복 같은 옷, 검은 스타킹을 신었을 뿐이다.
나는 박헌영의 앞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가슴과 아랫도리를 살짝 가린다. 이거, 생각은 했는데 사실 아까보다 엄청 더 부끄럽다.
“예뻐…. 진짜 예뻐…. 완벽해….”
“너 그거 사람한테 하는 말처럼 안 들리거든?”
무슨 작품을 보듯 평가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박헌영은 정말로 행복한 표정을 하고 웃는다.
“고마워…. 입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박헌영은 소주를 한 잔 들이키며 감사의 인사를 한다. 이만큼 고마워할 정도로 박헌영에게는 이런 게 소망이었을 수 있다. 공감은 안 되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세상에 페티쉬는 엄청 많으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쪼그려 앉아서 소주를 마신다.
뭐야, 진짜 보기만 하고 끝나는거야?
“그…. 다른 건 안 해?”
“안 돼.”
박헌영은 나를 보며 고개를 젓는다.
“그, 그 지금은 절대 안 돼.”
“왜?”
내 물음에 박헌영은 헛기침을 한다.
“그…. 흠, 지금은 원하는 게 너, 너무 많아서….”
아,
자신의 변태적 페티쉬가 어떤 방향으로 솟구칠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 폭발적인 욕구 때문에 나에게 무슨 부탁을 해버릴지 모른다는 소리같다. 하지만,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녀석이 좋아하는 그거에 대해서 안다. 밟아 달라느니 어쩌구 하는 그 소름끼치는 말들을 안다.
고로,
그냥 내가 강하게 나가주면 된다는 거잖아?
“에이 머저리 같은 자식아!”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박헌영의 어깨를 밀어버린다.
“엇!”
녀석이 옆으로 나동그라지고, 나는 그런 박헌영을 서서 내려다본다. 기다리는 거 지겹다. 애초에 누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원하면 여자가 들이대는 것도 괜찮잖아. 나는 박헌영의 위에 올라탄 채 녀석의 멱살을 잡아당긴다.
“으읍!”
소주 맛이 나는 진한 키스를 나눈 뒤, 나는 박헌영을 바닥에 내팽개친 뒤 내려다본다. 이 자식, 이렇게 된 주제에 참긴 뭘 참아?
“가만히 있어. 이 고자새끼야.”
나는 박헌영의 옷 단추를 천천히 풀어나간다.
“내가 알아서 다 해줄게.”
으엑
내가 말하면서도 조금 이상하지만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법, 세상에 있어? 박헌영은 어쩐지 진짜로 겁먹은 표정이다. 막상 진짜 상황이 닥치자 겁을 먹는 꼬라지가 딱 박헌영답다.
“사랑해.”
“그, 나, 나도….”
나는 박헌영의 귓가에 속삭인다. 그래,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먼저 하면 돼. 내가 그 말을 듣기 위해 애쓰고, 애닳아 할 필요는 없어. 내가 먼저 사랑해주면, 이 녀석도 내게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사랑의 말을 속삭여 주겠지.
그거면 되는거야.
받는게 아니라. 주는 형태로. 주는 것만으로도 받을 수 있다는 걸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나는 박헌영의 상의를 벗기고, 배 위에 앉은 채 녀석을 내려다본다.
이거, 진짜 여왕이라도 된 기분이네.
나쁜 기분은 아니야.
“각오해. 너 오늘 죽었어.”
나는 다시 한 번 박헌영에게 집요한 입맞춤을 한다. 이거, 좀 되게 끈적끈적거리네. 하지만 나쁘지 않아. 사는 게 원래 질척하고 끈적거리는 거니까.
조금 더 녹진하게 달라붙어도 상관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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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엔딩
여왕님이 된 설원입니다
이대로 로맨틱코미디 찍으면서 아름답게 살았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