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세상에 안 어려운 게 어디있냐? =========================
나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뒷걸음질쳤다. 박헌영은 내가 진짜로 상태가 이상한 것 같자 천천히 일어나서 다가왔다.
“야, 왜, 왜 그래!”
“가까이 오지 마! 더러워 미친! 치, 친구잖아 미친놈아! 그런 생각 하는게 말이 되냐!”
“뭐야? 왜 싸워?”
-툭
“으, 으아악!”
나는 뒷걸음질치다가 뭔가에 부딪혔다. 나는 마치 뭔가에 찔린 것처럼 놀라서 앞으로 튕겨나가며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이선준이 무슨 지랄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선준은 양손에 보따리를 잔뜩 들고 있었다. 그의 눈가가 매섭게 좁혀졌다. 살짝 화난 것 같다.
“너 없어진 줄 알고 걱정했잖아!”
“어, 어?”
“말은 하고 돌아다녀! 전화 몇 번을 했는데….”
이선준이 화가 난 것 같자 나는 지레 겁먹었다. 이선준이 화나면 정말 무섭다. 맞은 적은 없지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덜컥 들 때가 많았다. 나를 걱정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걱정이 그다지 유쾌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무슨 걱정을 해….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야, 너 지금 네가 무슨 꼴인지….”
그 말이 내 감정에 불을 당겼다. 나는 감정적인 인간이다. 원래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그래. 여러모로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나는 예민하다. 곧,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내가 무슨 변태새끼한테 끌려가기라도 했을까봐 그래?”
“야, 말이 그렇다는게 아니라. 위험하다는 거잖아.”
“대낮이야! 그딴 일 안 생겨! 그렇게 따지면 나만 위험하냐!”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건 과보호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내 한 몸 지킬 힘은 없지만 소리는 지를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이제 내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 싫다.
그건 평등하지 않다.
지금껏 이선준과 나, 박헌영은 평등한 친구였다. 서로를 지켜줄 필요도, 돌봐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선준은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내가 예민하다고? 미쳤다고? 그래, 미쳤다. 나는 내가 정상이라고 말한 적 없어. 나는 비뚤어졌고, 편협하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다. 그런 성격은 며칠 전보다 더 심해졌다. 내 상황이 되면 누구나 그럴거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나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중대한 문제다. 한 녀석은 나를 지켜줘야 하는 존재로 인식했고, 다른 녀석은 아주 잠깐이기는 하지만 날 성적 대상으로 바라봤다.
둘 다 소름끼친다. 변한 건 외모 뿐인데, 순식간에 이렇게 달라져 버렸다.
뭐야 이거, 어려운 일은 아닐 줄 알았는데…. 직접 겪으니 당황스럽고, 분하고, 수치스럽다. 아직 시간은 내게 많은 변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남자에 가깝다. 이런 것은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내면이 변하는 것보다 타인의 인식이 이렇게나 빨리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무서울 정도였다.
“친구잖아. 왜 내 겉모습이 변한 것 때문에 그런 취급을 받고, 그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건데?”
나는 이선준과 박헌영에게 말했다. 박헌영은 말이 없었다. 자신이 한 행동이 잘못된 거라는 걸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남성적 본능에 따라올 수밖에 없는 상상일 터다. 그렇게까지 비난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안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온몸의 솜털이 가시처럼 솟아오른 기분이다.
“그만 해, 열받아.”
이선준의 착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표정을 몇 번 못 봤다. 진짜로 화났을 때에나 짓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고개를 숙여버렸다. 무섭다.
“애새끼도 아니고, 변했으면 인정해. 네 마초이즘에 따르면 네 본질이 어떻든 지금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야. 내 걱정이 과잉된 면이 있었던 거, 인정한다. 하지만 너 지금 예민해. 정도 이상이야. 그냥 받아들여도 되는 걸 너무 지나치게 확대해서 받아들이고 있어. 너랑 박헌영이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지금 굉장히 눈에 띄고, 사라지면 걱정하는게 당연해. 너는 원래 남자니까라는 말로 나나 박헌영을 설득하려고 하지 마라. 그건 네 이기적인 생각이야. 우리를 생각한다면 지금 네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해. 너는 지금 우리가 너를 네 외면을 무시하고 본질만으로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어. 그건 폭력이야. 나와 박헌영은 네 외면부터 볼 수밖에 없어. 그걸 무시하고 너를 원래의 설원으로 대할 수는 없어. 노력은 해보겠지만 당연히 한계도 있는거야.”
정론이다. 빼도박도 못할 만큼 정론이었다. 변한 걸 인정해야 한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이선준도 많이 참고 있었다. 내 태도와 행동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모순된 행동을 어제와 오늘 사이에 몇 번이나 해왔다. 이선준은 당연히 그걸 알면서도 지적하지 않았다. 내 혼란을 최대한 이해하려 한 것이었다.
나도 저렇게 화내고 싶다. 반박할 생각이 쥐꼬리도 안 들 정도로 압도하고 싶다. 나는 압도되어 버렸다. 외면이 중요하다고 그렇게나 생각해놓고, 변할 수밖에 없다고 해놓고 소중한 사람들이 나를 본질적으로 대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폭발해버렸다.
나는 이선준을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한다. 평생 함께할 친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럴 때만큼은 왠지 슬프다. 단 한 마디도 꺼내기 힘든 이 상황이 오면 나는 자괴감을 느낀다.
저 인간과 나는 사고의 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다. 한정운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응….”
그 말밖에 할 수 없다. 서러워. 차라리 울고싶다. 울면서 위로를 받고싶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다. 알량한 자존심이 아직 남아있다.
“미안, 걱정할 수 있는건데, 내가 너무 신경질적이었어.”
몇 없는 내 좋은 점들 중에 하나는 인정해야 할 건 인정한다는 것이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사과한다. 물론 더러운 똥고집을 부릴 때도 있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나는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사과한다. 그래서 이선준과 나는 크게 싸운 적은 별로 없다. 나는 박헌영에게도 사과했다.
“미안, 말 심하게 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 그래, 남자니까.”
“아, 아냐…. 진짜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
“그런데 무슨 일인데?”
이선준이 물어왔다. 오자마자 내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죽어버리라고 하고 있었으니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다. 나는 그 상황을 설명했다. 어제 둘이 함께 방에 있었다는 얘기를 하자 잠깐 침묵했다는 것,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는 것을 말했다. 이선준은 박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위 여부에 대해서 묻는데, 진짜냐?”
“어? 아, 그, 그게….”
“진짜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지?”
이선준은 갑자기 잔뜩 들고 있던 종이가방과 봉투들을 내려놨다. 이선준은 외투를 벗고, 오른팔을 걷었다. 너무 두껍지는 않지만 단단한 팔에서 근육이 꿈틀거렸다. 나는 뭔가 일이 벌어지려는 것 같아서 다가가려 했다. 내가 제지하려 했지만 이선준은 무서운 기세로 박헌영에게 다가갔다. 박헌영은 각오하고 있다는 듯 눈을 꽉 감았다.
“저, 저기…. 형?”
“한 대 맞아라.”
-퍽!
이선준의 주먹이 박헌영의 복부를 후려쳤다.
“끅!”
“뭐, 뭐하는거야!”
박헌영이 푹 고꾸라졌고, 이선준은 걷어 올린 팔을 다시 내렸다. 방금 전에 나에게 화냈을 때와는 또 다른 표정이었다. 이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을 본 건 진짜로 처음이었다.
박헌영은 숨을 꺽꺽거리며 제대로 못 쉬었다. 벤치에 앉은 채로 내가 등을 쓸어줬다.
“야, 괜찮아?”
“어…. 으… 어, 좀 낫네.”
“사람을 왜 때려! 미쳤어?”
“벽돌로 쟤 대가릴 찍으려던 놈이 할 말이냐?”
“하지는 않았잖아!”
물론 나도 미치면 진짜로 내리찍을 정도로 돌아버리는 녀석이기는 했다. 하지만 진짜로 누군가를 심하게 때린 적은 없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항상 주변에서 말렸다. 나는 사람을 때린 적은 별로 없다. 때릴 뻔한 적은 정말 많았지만.
이선준이 사람을 때린 것은 처음 봤다. 인상은 험악했지만 대개 인상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된 탓이었다. 나는 내 딴에는 무서운 시선으로 이선준을 노려봤다.
“미친놈아! 사과해!”
나는 뿔나면 형이고 뭐고 없이 마구 욕을 해댔다. 하지만 이선준은 듣지도 않았다.
“화내도 되는 상황이었어.”
이선준은 담배를 피워물었다. 박헌영도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맞아도 싸.… 그만 해…. 미안하다 어쨌든.”
“아 씨.… 진짜… 짜증나 둘 다.”
왠지 둘에게 화낸 것 자체가 미안해졌다. 박헌영은 자기가 잘못한 걸 알았고, 이선준은 뒤끝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건은 이걸로 끝이다. 나중에 얘기가 나올 일은 없다.
“밥이나 먹자. 배고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