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9 True ED - 여왕님 =========================
“…….”
박헌영이 나를 보며 미소짓고 있다.
“이거 어때?”
“너 진짜….”
나는 인상을 쓰며 씹어뱉듯 중얼거린다.
“죽여달라고 고사 지내는거냐?”
“왜! 왜! 이, 이거 구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한테 맞는 사이즈 구하는 게 어디 쉬웠는 줄 아냐?”
녀석은 내게 천쪼가리와 검은 스타킹을 비롯한 요상한 옷, 그리고 머리띠를 흔들며 말한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녀석의 손에서 그걸 빼앗아 상자에 처넣은 뒤 구석으로 확 밀어버린다. 어쩐 일로 집까지 찾아왔나 했더니, 저런 미친 물건을 사왔다.
바니걸이라니
제정신인가 정말?
“너…. 네 이상성욕은 충분히 알고 있는데 말이야…. 진짜 역겨우니까 하지 말아줘.”
“그, 그렇게 심하게 말할 건 없잖아….”
박헌영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나는 그런 박헌영의 등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린다.
“됐고, 나가서 밥먹자.”
박헌영과 나는 바깥으로 나간다. 우리는 약간 가까이에 붙어있지만 조금 어색한 느낌으로 애매하게 서있다. 그 날로부터 일 년이다. 다시 만나기로 결정하고, 평범한 친구관계로 지낸 게 일 년이다.
자그마치 일 년이다.
우리는 연애 중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전에 그러기로 했다. 내가 기사를 쓰고, 박헌영은 소설을 쓰는 중이었다. 우리는 종종 만나서 작업을 같이 했다. 서로 같이 있으면서도 각자 다른 작업을 한다.
그러던 와중에, 박헌영이 말했다.
‘야.’
‘왜?’
‘연애할래?’
‘그러던가.’
남 일 말하듯, 진짜 뭐 이런 게 있나 싶었지만 진짜로 그랬다. 싱겁고, 긴장감이라고는 없는 고백이었다. 어디서 뭘 먹자 이런 말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속으로는 뭐, 당연히 방방 뛰고 싶은 지경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연애하기로 한 뒤로 우리는 별 진전이 없다. 박헌영은 조심스러웠다. 나도 마찬가지다. 손을 잡는 것조차 어쩐지 이상했다.
그래서, 두 달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평소와 별로 다를 게 없다. 애칭으로 부르는 것도 없고, 그저 이따금 손을 잡는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이 된다.
급할 건 없다. 급하게 먹은 밥이 체하듯,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오래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가면 된다. 섣부르게 끌어안아서 서로를 부숴버리는 건 싫다.
물론, 박헌영은 그 뒤로 이런저런 옷을 보여주며 입어주면 안되냐고 개소리를 자주 했다.
당연히 거절했다. 미친놈이 걷기도 전에 날아가려는 심보다. 물론 실망하기는 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조금 다르다.
이 녀석은 그거다.
그냥, 뭘 입어달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생긴 게 좋은 것 같다. 나도 굳이 억지로 자빠뜨리고 싶지도 않으니 우리는 연애 중이면서 그리 달달하지 않게 지낸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와 밥을 먹는다.
“한정운 걔 최종심 올랐다며?”
“흐음,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이제.”
졸업을 하고 뭘 하려는지는 잘 모르지만, 나는 한정운과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만난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박헌영과의 이야기도 듣는다. 그 녀석은 최종심에는 자주 오르는데 결정적인 등단을 못 하고 있다. 박헌영은 그 말을 듣고는 피식 웃는다.
“방귀가 잦으면 똥 나오는 법이지.”
“……굳이 이 상황에 그런 말을 해야 되는거냐?”
우리는 자주 만난다고 했다.
진짜로 자주 만난다. 이 녀석도 나도 프리하다 보니까 거의 매일 같이 있는 셈이다. 이제는 너무 봐서 질릴 정도다.
그래도, 집에 와서 자고 가는 일은 없다. 내가 그냥 자고 가라고 해도 박헌영은 굳이 꼭 집에 가버린다. 이유를 물어보면 항상 ‘그냥 너가 불편할까봐.’라고 말해버린다. 솔직히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두 달 동안 마음의 준비도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했다.
흐음,
사실은 콘돔까지 사놨는데.
그런 게 부끄럽고 쪽팔린 일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건 생활필수품 수준으로 구비해 둬야 한다. 밥을 먹고 나서, 우리는 식당 밖으로 나온다. 어쩐지 미적지근한 연애다. 뭔가 특별한 데이트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다.
하지만, 손만 잡는 연애라니 조선시대도 아니잖아. 나는 살짝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리듯 말한다.
“너 고자야?”
“어, 어?”
“벌써 그럴 나이야?”
내 갑작스러운 말에 박헌영이 화들짝 놀란다.
“아, 아니! 어, 엄청, 엄청 강인한데!”
“안 그런 것 같은데….”
흘겨보며 말하자 녀석이 노발대발한다. 사실 그게 엄청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냥 놀려먹는 게 좋다. 우리는 다음 코스인 카페로 간다. 밥, 카페, 생각해보면 우리는 만나서 계속 일을 하는 셈이다.
“아무래도 우리 시작이 뭔가 이상했어.”
“뭐가?”
내 말에 박헌영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뭐냐. 끈적끈적한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네가 고백을 병신같이 해버려서 물 탄 술마냥 어정쩡하잖아!”
아무런 감정의 갈등과 해소 없이 그냥 물 흐르듯 사귀어 버려서 진척이 없다. 뭣보다 그런 로맨스적 감상 같은 게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시간을 좀 낼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박헌영이 너무 바쁘다.
“이거 신작 준비만 빨리 하고…. 미안하다.”
완결이 다가오는데다가 신작 준비까지 해야 해서 박헌영은 말 그대로 밥 먹고 똥 싸는 시간만 빼고 글을 쓴다. 노는 것 같아도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는 건 안다. 그리고 무슨 출판 관련한 일 같은게 겹친 탓에 이중 삼중으로 일이 많아졌다.
여러모로 여유를 내기에는 곤란한 시간들이다.
카페로 가다가. 박헌영이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아, 네. 담당자님….”
몇 번의 대답과 대화가 오간 다음 박헌영이 전화를 끊는다.
“야, 나 그 미팅 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거긴 왜 맨날 작가를 오라가라하냐?”
“표지 일러스트레이터 구했다는데 얘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종이책 출판에 관련된 일인 모양이다. 뭐든지 하나하나 끼고 싶어하는 건 알지만, 이것도 보면 묘하게 일중독이다. 하지만 가야 되는 걸 가지 말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순순히 보내준다.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착해서, 박헌영이 차를 타고 간다.
나는 악담을 하듯 박헌영에게 으르렁거린다.
“돈 많이 벌어서 나를 부양해. 알았어?”
“알았어! 간다! 내일 연락할게!”
매일매일 보는 사이다. 좋기는 한데, 그리움이 없는 연애라는 건 묘하게 안정되는 것 같으면서도 심심하다. 나는 박헌영을 보내고 오피스텔로 올라간다.
애정결핍은 이제 나아졌다. 박헌영이 조금씩 나를 존중해주고, 나도 그러지 않으려고 마음을 굳게 먹은 탓이다. 의지하지 않고, 서로 기대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슬픔이 사무칠 때 울었고, 박헌영도 괴로움을 호소한 적이 많다. 그 때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줬다.
우리는 아직도 성장하는 중이다. 아직 멈추지 않았다. 완전하지 않은 개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한 걸음씩 나간다.
아마 박헌영은 그 과정을 기다려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천천히 적셔지듯 서로에게 익숙해지면, 그 때부터 가벼운 스킨십부터 해 나가려는 것 같다. 나를 완벽하게 존중해주는 방식이라 참 마음에 든다.
그래도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지루하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나는 구석에 있는 상자를 마치 폭발물이라도 되듯 천천히 다가간다.
머릿속에, 아주 못된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래도 되나? 그래도 되는건가? 나, 나의 존엄성은 어쩌고? 버릇 되면 어떡하지? 뭐든 처음이 무서운 거라고 했는데….
나는 그 상자 앞에서 한참을 고민한다. 천천히,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내 귀에 천둥처럼 크게 울린다.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에는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 이건 나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 아니야. 해치는 일이 아니고말고! 이건 일종의 보답이야. 사주긴 해도 제발 좀 입어달라고 징징거린 적도 없다. 그냥 내가 싫다고 하면 어, 그러냐 하고 말 뿐이었다.
말하자면 박헌영은 사는 걸 좋아할 뿐이다. 그거나 저거나 변태인 건 매한가지지만 어쨌든!
그래, 마음먹었다.
나는 상자를 들고 집을 나선다.
“으, 으으…. 지, 진짜 이거….”
안 하던 혼잣말을 하게 될 정도다.
나는 지금 박헌영의 집에 와 있다. 삼십오평은 될법한 오피스텔은 매우 크다. 내가 사는 곳도 좁은 건 아니지만 박헌영은 많이 버는 티가 팍팍 난다. 나는 전신거울 앞에서 내가 입은 복장을 보며 뭐라 형언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고 있다.
검은색 스타킹,
수영복 같은 묘한 옷(도무지 명칭을 모르겠다)
바니걸 머리띠까지. 게다가 엉덩이 쪽에는 하얀색 솜뭉치 꼬리까지 달려있다. 몸에 지나치게 착 달라붙어서 당연히 속옷 같은 것도 전부 벗고 입었다.
이거 뭐야.
진짜 야하고 이상하잖아!
새삼 박헌영의 취향이 얼마나 이상한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분노가 치솟는다.
이런 남사스러운 걸 지금까지 나한테 입히려고 한거야? 오면 한 대 쥐어패줄 테다.
박헌영의 집 비밀번호야 당연히 알고 있었고, 이런 잠복 정도는 얼마든 할 수 있다. 나는 신발도 숨겨놨다. 박헌영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돌아오면 왁! 하고 놀래켜준다. 그리고…. 음, 다음 이야기는
말하기는 좀 부끄러운 일이겠네.
멍청한 고자자식인데 내가 이 정도는 해줘야지. 나는 부끄러워서 몸을 배배 꼬면서도 거울을 계속 쳐다본다.
나, 진짜 잘 어울리긴 하네. 메이드복도 있고, 제복도 있고, 어째 내 사이즈에 맞는 그런 코스튬이 집에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정말 무서운 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헌영의 데스크탑이 눈앞에 있다.
켜보고 싶지만, 켜지 않을 것이다.
뭐가 저 시공의 핵에 감춰져 있을지 감이 안 온다. 아마 박헌영을 환멸해버리고 뺨을 갈겨버릴 것 같다. 나는 박헌영의 책상에 앉아서 켤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하지 않는다. 이런 건 나쁜 일이다.
누군가의 사생활을 들춰보는 건 존중이 없는 행위다. 사생활은 사생활인 채로 놔두자. 밤이 되고, 시간이 늦어도 박헌영은 오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박헌영은 좋은 녀석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좋은 녀석이다. 연애를 못 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지만 사실 여자친구도 있었다. 나와 헤어졌던 그 시간 동안 연애를 했을까? 두려워서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걸 물어보는건 실례다. 나야말로 어마어마한 과거의 그 자체다. 이런 나를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겨야 한다.
늦네….
박헌영을 믿지만,
어쩐지 불안하기도 하다.
다른 여자를 만날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 하지만 내가 겪었던 불행의 밀도는 그런 일들을 언제고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그런 상상을 해본다.
갑자기 박헌영이 어떤 여자와 뜨거운 입맞춤을 하면서 들어오는 그런 상상을 한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등골에 소름이 돋고 손발이 차가워진다. 나는 그런 장면을 보면 못 견딜거다. 다시 배신감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
사실, 이거 그냥 주거침입이잖아. 나는 지금 괜한 부스럼을 만들고 있는게 아닐까? 박헌영에게도 숨기고 싶은 사생활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데. 괜히 내가 찾아와서 서프라이즈를 한답시고 그런 박헌영의 생활을 침해하는 게 아닐까?
좋아한다기보다.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그러네, 이거 실수하는 걸지도 몰라. 서프라이즈 한다고 가 기분좋은 사람이 어디에 있어? 개인 공간인 집까지 쳐들어와서 이러는 건 실수야. 나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일어나려는데….
발소리가 들린다.
이미 늦었나?
나는 어정쩡하게 서서 현관 쪽으로 간다. 귀여운 표정, 포즈? 앙탈이라도 부려야 하나? 뭘 어떻게 해야하지? 그, 그냥 목석처럼 서있는 건 좀 이상하잖아. 하기로 하면 제대로 해야 하는데….
그러기 무섭게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박헌영이 들어온다. 들어온 박헌영이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어설프게 다리를 굽히고, 양손을 모은 채 내가 생각해도 웃기는 표정으로 박헌영을 쳐다보고 있다.
나는 최대한 귀여운(그럴 것이라 생각되는) 표정을 짓고 박헌영을 응시한다. 하지만 박헌영은 감탄이나 무슨 다른 감상 대신 입을 딱 벌린다.
“뭐야, 왜?”
“뭐냐?”
뒤에서 누가 들어온다. 뒤에서 들어온 두 명의 남자도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나는 돌처럼 굳어버린다. 그들의 손에는 비닐봉투와 소주병, 그리고 안주인 것처럼 보이는 뭔가가 들려있다.
이거,
이거 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 둘은 나를 보며 표정이 딱 굳어버린다. 박헌영도, 나도, 정체불명의 두 남자도 굳은 채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미동도 못 하고 굳어버렸다.
다, 다른 사람이…. 봐버렸어.
도망쳐야 하는데, 발이 안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