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7 그래도 설원입니다 =========================
“으, 으으…. 이 이걸 왜 봐야 되는데?”
“네 글이잖아.”
“아…. 너 진짜 최악이야.”
박헌영의 차에서, 우리 둘은 히터를 켜놓고 언 몸을 녹이고 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이 녀석은 실실 웃으며 자신이 인쇄해온 그 거대한 서류 뭉치의 마지막 페이지를 꺼낸다.
“낭독해봐.”
“시, 싫어 진짜….”
나는 도저히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젓지만, 박헌영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들려줘. 네 목소리로.”
“…….”
이건 진심이다. 그래, 그래…. 사실 사과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겠지. 내 입으로 나에 대해서 말하고, 내 입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온전한 관계를 잇는 거겠지. 너는 나를 용서했지만 완전히 용서한 게 아니고, 미안하다는 말 몇 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 진지한 눈빛 때문에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다.
“알았어….”
“그래.”
박헌영은 좌석에 몸을 묻고, 여전히 눈 내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조수석에 앉아서 ‘그걸’ 본다.
내가 쓴 소설이자.
박헌영이 쓴 소설
『그래도 설원입니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는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서. 이제야말로 어딘가 새로운 삶의 지점을 맞이하기 위해서.
천천히…. 읽어간다.
“저는…. 설원입니다.”
저는 설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여자가 되어 버렸어요.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소꿉친구가 저를 강간하려고 했어요.
동생이 제가 잘 때 저를 더듬었죠.
왕따를 당하고, 욕을 먹었어요.
후배가 제게 반하고, 차버렸어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죠.
친구 두 명이 저를 사랑했고,
저는 하나를 선택했지만, 도망쳐 버렸어요.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고 도망쳐서,
설원이기를 포기했어요.
다시 그 두 명을 만났고,
여전히 같은 사람을 선택했어요.
괴롭혀지고, 찢겨지고, 학대당하는 그 순간에 힘들어했고,
괴로워했지만…. 결국 저는 그 사람을 용서했어요. 잠깐은 행복했어요.
배신당하고….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제 친부모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요.
그 사람들의 유골함 앞에서, 다시 살고자 마음먹었어요.
곧, 진실을 알게 되었고,
유산했어요.
저는 살아온 시간이, 살아내야 할 시간이 두려웠어요.
죽으려고 했지만 죽지 못했어요.
삶을 긍정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살아가려 해요.
이게 지금의 저에요.
아직 저는 살아가고 있어요. 죽지 않을 겁니다. 살아갈 생각이에요.
저는 남자인 설원입니다.
저는 여자인 설원입니다.
저는 어장관리녀 설원입니다.
저는 모순 덩어리 설원입니다.
저는 친구를 배신한 설원입니다.
저는 친구를 또 배신한 설원입니다.
저는 여전히 착한 후배를 기만하는 설원입니다.
저는 임신했던 설원입니다.
저는 유산한 설원입니다.
저는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던 설원입니다.
이제 아무도 의지하지 않는 설원입니다.
저는 엄마가 되지 못한 설원입니다.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한 설원입니다.
아, 그 신발은 아직 가지고 있어요.
저는 살아있는 설원입니다.
저는 노력하는 설원입니다.
저는 참 많은 이름을 가졌어요.
긍정적인 건 별로 없네요.
저는 수많은 잘못과, 실수와, 거짓과, 기만과, 슬픔과, 분노와, 이율배반과 이중잣대 속에서 살아가는 설원입니다.
저는 바보에요.
멍청이기도 하구요.
뭐가 제게 좋은 일인지 알면서, 결국 항상 나쁜 결과를 불러올 선택을 하는 그런 사람이에요.
바보같죠?
그런데,
어떡합니까.
이게 저인것을요.
저는 이렇게 살아왔어요. 이렇게 사는 게 옳다고 말한 적, 저는 한 번도 없어요.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누군가에게 강요한 기억도 없어요.
그냥, 이런 사람도 있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거면 충분해요.
이런 바보라도,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그저 숨만 쉬는 것도 제게는 꽤 노력이 필요한 일이랍니다.
저도 살아갑니다.
저 같은 바보, 천치, 얼간이라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삶을 긍정해야만 살 수 있는 건 아니죠. 불행하다 해서 죽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아름답다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추하고, 못났고, 어리석어요. 아, 제가 자기비하가 심한 타입이라는 거, 잘 아시죠?
하지만 이따금,
감사하기도 해요.
저는 제 추함과 못남과 어리석음 또한 저 자신으로 인정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름다운 사람이 어디 세상에 있나요? 원래 인간은 좀 추해요. 구차하고, 찌질하기도 해요. 나는 남들보다 좀 더 그래. 하하.
원래 인간은 그러한 거니까. 제가 그 속성이 조금 더 크다면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밖에 없겠죠?
저는 꽤, 사람다워요.
현명하지 않고, 못났고, 아집이 심하고, 바보 같은 그런 저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사람다워요. 유일한 장점이란 결국, 제 단점들을 뭉뚱그려 말했을 뿐이네요. 이게 정말 장점인가 몰라.
음, 그래요. 맺음말이 필요한 시간이네요.
긴 이야기였어요.
짧다면 짧지만
길다 하면 길다고 할 수도 있는 제 이야기였어요.
네, 저는 설원입니다.
수많은 저의 속성들이 저를 만들어요. 개별적으로 그것들 모두 설원이고, 그 모든 걸 합쳐도 설원입니다.
저를 저로 만드는 게 무엇인지, 개별이 개별을 구성하는 근본이 무엇인지 저는 아직 잘 몰라요.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하나는 알 수 있어요.
저는 여전히 설원이고, 앞으로도 설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실수와 잘못과 불행이 이 뒤에 더 있어도 말이에요…. 그래도 유일하게 확실한 건 하나 있어요.
그걸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네요. 그래도….
그래도 설원입니다.
여전히, 설원입니다.
- 完 -
============================ 작품 후기 ============================
수고했다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