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6 그래도 설원입니다 =========================
뽀드득
소리가 울리나 싶더니.
“이런…. 얌마!”
“어?”
누가 뒤에서 소리친다.
“너 왜 여기서 청승떨고 지랄이야!”
“어…. 어?”
박헌영이 내 뒤에서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다.
“너, 너…. 왜 여기 있어?”
“어… 응?”
박헌영도 만만찮게 눈을 맞았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얼어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말한다.
“여, 여기로 오라고…. 했잖아.”
“이, 이…. 여기 후문이잖아 이 등신아!”
“어?”
설마.
나 병신인거야?
어, 어쩐지 카페 규모도 작고 좀 그렇더라니…. 지금까지 나 후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내가 어버버 하고 있자 박헌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쉰다.
“이런 등신 얼간이가…. 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그, 그…. 나 여기 처음 와본단 말이야…. 몰랐어….”
박헌영은 어이없음과 분노가 섞인 표정을 짓고 있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포인트의 분노를 마주하게 되어서 당혹스럽다.
“그, 그치만 나도 기다렸는데….”
“…….”
박헌영이 나를 노려본다.
“아, 미, 미안….”
나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선다. 박헌영이 한 발짝 다가온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우리는 그 함박눈의 무더기 속에서 서로 묘하게 밀고 당긴다. 박헌영이 내게 다가온다. 인적은 없다. 우리 둘 뿐이다. 이 폭설 속에서 박헌영과 나는 서로 이외에 그 어떤 누구도 보고 있지 않다.
“허, 헌영아…. 나, 나, 내가 잘못한 건 알지만…. 그,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나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며 말한다. 변명은 아니지만 변명이다. 무서워. 무섭다고, 이 폭설 속에서 박헌영이 나를 죽이려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증폭된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임마? 너 왜 쫄았어?”
“어? 아, 응…. 그, 그, 거리 유지 해 줘. 무섭다고! 으, 으악!”
나는 겁에 질려 버럭 소리치다가 뒤로 넘어져 버린다. 눈 속에 풀썩 넘어진 탓에 아프지는 않지만, 박헌영이 나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손을 내민다.
“너 왜 그래?”
“아? 으…. 아, 아니….”
착각이었네.
다행이다.
나는 박헌영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그리고 몸을 툭툭 턴다. 박헌영은 내가 그러는 모습을 빤히 쳐다본다.
“그, 그냥 전화 하지 그랬어….”
연락처도 알면서 왜 기다린거야? 나는 안 온 줄 알고 연락 안 한건데…. 괜히 그래봐야 더 구차해지는 거니….
음,
너도 나랑 같구나. 나는 박헌영을 바라보며 어설픈 미소를 짓는다. 박헌영도 마찬가지로 웃는다. 그래, 원래 사람이란 찌질해.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지. 솔직하지 못하고, 그냥 전화하면 되는 걸 몇 시간이나 눈 맞아가며 바보같이 기다리고.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나, 지금부터 사과할거야.”
내가 갑자기 선전포고를 하듯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박헌영은, 마찬가지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응, 해.”
잠시 심호흡을 한다. 나는 아직 모른다. 박헌영이 어떤 마음으로 내게 왔는지.
“미안해.”
‘쓰레기 같은 년아.’ 라는 말 대신.
“그래.”
라고 박헌영이 대답한다.
“잘못했어.”
‘걸레 같은 년.’ 이라고 말하지 않고.
“괜찮아.”
라고 말해준다.
“나는…. 너, 너에게 너무 많은 잘못을 했어.”
‘네 몸뚱이 함부로 굴리다가 그렇게 된 거니까. 그래도 싸.’ 라는 폭언이 아니라.
“이해해.”
라고 말해준다.
“진심으로…. 아, 흐…. 사과할게….”
‘혹시 내가 너랑 다시 만나 주겠다고 착각이라도 했냐?’ 와 같은 기만은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고생 많았다.”
나를 위로해준다.
“너, 너…. 너, 너… 윽. 너, 너한테… 흑! 미, 미안…. 미안했어…. 아, 아 그.. 우, 울어서 미안!”
울지 않기로 했는데 눈물이 터져나온다. 나는 결국 뒷말을 더 잇지 못한다. 박헌영은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힘 내지 말고.”
그렇게 말하고,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울어도 돼.”
“으윽…. 으으윽! 흑! 흑! 미, 미안…. 자, 잘못…. 잘못했어어어….”
“괜찮아.”
쉬운 말들이다.
괜찮아. 울어도 돼. 힘 내지 않아도 돼.
쉬운 말들이지만, 누구도 잘 해주지 않는 말들이다. 박헌영은 그런 말을 해줬다. 지금까지 항상 한결같이 그래왔다. 무너지지는 않는다. 무너지지 않지만, 감동한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고개를 치켜든다.
그리고,
양손을 교차해서.
X자를 만든다. 박헌영의 표정이 굳는다.
“그, 그…. 나 알아…. 안단 말이야….”
얼굴이 보일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눈이 그렇게 좋지 않았고,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죽지 않도록 말렸던 그 사람은
박헌영이다.
“너는…. 너는 나를 몇 번이나 구해주는거야….”
알고 있었다.
나는 박헌영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 말고, 간호사가 전화를 했다. 통화내역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보호자 명목으로 박헌영을 불렀고 녀석은 왔다. 하지만 간호사와 의사들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고 말한 모양이다. 이걸 아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화내역을 보고 누가 전화한거냐고 물어봤다.
그 사람들, 입 싸더라고.
박헌영은 내가 깨어난 이후에는 병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나를 배려한 거겠지. 임신과 유산에 대해 알고 있으면 내가 수치심을 느낄 걸 아니까 들어오지 않았던 거다. 그리고 깨어난 그 날, 옥상이 아니라 일층에서 건물을 맴돌면서.
자신이 아닌 척 마스크까지 끼고.
혹시나 내가 옥상에 모습을 드러낼까봐 계속 맴돌았겠지.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밑에 사람이 있으면, 내가 아무리 죽고 싶어도, 이제는 상식처럼 되어버린 바이러스의 전염을 나는 떠올리게 될거고.
내가 피해를 주기 싫어 그런 행동 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겠지.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너무 잘 알고 있어.
너 진짜 뭐야.
너 진짜 왜 그래.
“내가 대체 너한테 뭔데 그렇게까지 하는데…. 흐, 흐흑!”
그래놓고 왜 연락 한 번 하지 않는데.
내가 그렇게 좋으면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거면
나를 여전히 그렇게나 원한다면 한 번 정도는 연락해도 되잖아.
네가 하지 않아서, 나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 그럴 권리는 네게 있으니까. 너는 날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놓고, 왜 아무것도 안 한 척, 모르는 척 하는데. 나는 박헌영을 보고 울며 말한다.
“너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그, 요, 욕 먹을 일이냐?”
“사람이라면 찌질하게 생색 정도는 내란 말이야 이 병신아아!”
병신 같을 정도로 착한 이 녀석은.
내 인생에 마지막 남은 행운 같은거다.
나 같은 건 너와 어울리지 않겠지만, 나 같이 이미 낡고 망가진 사람은 너와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기적이 있었으면 했어. 네가 나를 받아들여주면 안될까 하는 기대를 했어. 하지만 큰 욕심은 부리지 않아. 우리는 둘 다 눈사람이 되어버릴 것처럼 눈을 하염없이 맞고 있다. 박헌영은 나를 보며 말한다.
“생색 내도 돼?”
“그래! 내! 하고 싶은 거 다 해!”
“싫어 멍청아.”
“……이, 이 머저리가….”
“이럴 때 생색 내면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뭐가 되냐?”
일견 합리적이면서,
여전히 나를 배려하는 이 못된 놈이.
나를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나는 눈물을 닦아낸다. 얼굴이 얼어붙어 버렸다. 엄청 추워, 엄청 춥단 말이야. 신발도 다 젖었고 완전 얼음장인데.
나는 지금 녹아내리는 것 같아. 나는 박헌영을 보며 정말로,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낸다.
“흐, 흐으…. 부탁…. 부탁할 게 있어.”
“말 해.”
아,
이래도 되는걸까.
네게 의지하는 게 아니야.
네가 없어도 나는 여전히 살아갈 수 있어.
하지만,
나는 너가 있었으면 좋겠어. 외로움만 있는 이 적막한 삶에, 너가 내 옆에서, 이따금 얘기하고, 이따금 만나서 밥을 먹어도 좋으니까.
동등하게,
그런 관계로 있었으면 좋겠어.
나를 사람들이 걸레라고 욕해도 좋아.
바로 다른 남자 만나려고 꼬리치는 년이라 말해도 좋아. 그런 건 이제 신경쓰지 않아. 내게 지금 중요한 건 단 하나야.
너,
너 하나밖에 없어.
“저와….. 저와 다시…. 다시…. 흑! 흐끅!”
나는 고개를 숙인다.
“다시, 다시 친구가 되어주세요!”
박헌영이 대답이 없다. 고개를 들자, 박헌영이 나를 보며 조금 불편한 미소를 짓고 있다.
“……사귀자고 할 줄 알았는데.”
“……그, 그건…. 그, 그냥 지금은 그, 그 뭐라….”
“너 진짜 까다로워.”
“미, 미안….”
박헌영은 한숨을 쉰다.
“그래, 뭐든 천천히 하는 게 좋겠지.”
박헌영도 추운지 코를 훌쩍인다. 우리 이러다가 얼어죽겠어. 박헌영이 등을 돌린다. 그리고 걸어간다.
“가자.”
“어, 아….”
나는 박헌영의 뒤를 따라가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 그…. 대답은?“
박헌영이 나를 노려본다.
“대답을 꼭 해야 하냐?”
박헌영은 묵묵히 걷는다. 우리 둘 다 덜 된 눈사람 꼴이다.
우리는 호수변의 산책로를 걷는다. 눈발이 조금 잦아든다.
“그런데…. 왜 여기 오자고 했어?”
연고 없는 이 호수변에 와야만 하는 이유는 뭐였을까.
“그냥, 오늘 눈 온다고 해서.”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설원(雪園)이 되잖아. 여기 눈 오면 예쁘겠다 싶어서.”
“…그러니까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저기 봐봐.”
박헌영이 가리킨 곳은 호숫가 너머의 어떤 언덕이다. 나무 하나 자라지 않은 그 언덕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눈발이 너무 거센 탓에 보이지 않았는데, 조금 기세가 약해지자 보인다.
먼 곳에, 희디흰 눈동산이 있다.
“저기 불 났는데, 아직 나무 못 심었대. 그런데 겨울만 되면 저기가 그렇게 예쁘게 눈동산이 된다 하더라고, 애들 썰매 타고 난리도 아닌가봐. 그래서 나무둥치를 다 일부러 밀어버렸나봐.”
“……사람이 감상에 빠졌을 때에는 그런 소리 안 하면 안될까?”
하지만, 그 밥그릇 엎어놓은 것 같은 눈동산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얘는 이런 거까지 다 생각하면서 사는건가?
그 눈동산 위에 늑대는 없다. 내가 항상 보던 늑대, 그 외로운 늑대는 그 위에 없다. 이제 그 위에서 홀로 울어대는 늑대는 이제 동산 아래로 내려왔다.
이제 알겠다.
늑대는 나다. 그 희고 가녀린 늑대는, 그 외로운 늑대는 그저 나였다. 외롭고, 슬프고, 혼자인 그 늑대.
어째서 늑대인지는 모르지만,
사실 늑대가 아니라 여우였을지도 모르지. 아니, 그저 흰 동물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저 외롭다는 마음이 구체화된 그 무언가였을거야.
네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야.
혼자라도 괜찮아.
혼자라도 살아갈 수는 있어.
하지만, 함께 있으면 더 좋잖아.
사람은 홀로 완전하지 않고,
함께라도 완전하지 않아.
하지만, 함께인 편이 혼자인 것보다 조금은, 아주 약간은 더 좋겠지. 박헌영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조용히 눈이 내리는 이 고요한 설원에서, 우리는 서로 마주본다.
“춥다. 오뎅탕이나 먹자.”
“그래.”
우리는 걸어간다. 조용히, 발자국을 남기면서 산책로를 걷는다. 나는 박헌영에게 염치없음을 무릅쓰고 용서를 구했다. 박헌영은 나를 용서했다.
조금만 참으면, 조금만 견디면 더 나아질 수 있다. 내가 버린 친구를, 내가 벗어난 친구를 다시, 비난받을 걸 뻔히 알면서도 되찾으려 했다.
박헌영은 나를 위해서 너무나 많은 일을 했고,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래요.
나는 그래요.
멋지지 않아.
아름답지도 않아.
찌질하고, 어리석고, 염치도 없어. 하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이라도, 아무리 그런 나라도.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할 수는 있잖아.
앞으로 영원히 행복한 나날들만 있을거라 생각하지는 않아. 계속 불행하고, 계속 힘들고 괴롭겠지. 과거의 기억들이 나를 덮쳐올 때마다 나는 수렁에 빠질거야. 그래도 좋아. 적어도 나는 예전보다는 많이 자랐고, 더 많이 견뎌낼 수 있게 됐어.
의존하고 기대기보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마주 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어. 이렇게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직도 슬프지만.
이렇게나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을 보면서
기대고 싶다.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마주보면서 걸음을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큼은 자랐어. 그거면 충분해.
“너, 마지막에 쓴 거 괜찮더라.”
“마지막?”
내가 쓰긴 썼지만, 잘 기억은 안 난다. 소설 말미에 썼던…. 일종의 대단원이었다. 나를 정리하고, 나의 마음을 정리한 그 요약문이었다. 길고 긴 전문에, 짤막한 요약을 달아놨다. 나의 감정을 담아놓았다. 박헌영이 나를 보며 킥킥 웃는다.
“힘들 때마다 읽어보려고 이제.”
“이, 이…. 이 미친, 그러지 마!”
그건 관음증이라고!
“지금 당장 읽어볼까? 나 그거 인쇄해 왔는데.”
“대, 대체 왜 그러는데! 죽을래 진짜?”
박헌영이 뛰어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간다. 발이 푹푹 빠져서 걷기 힘들지만, 나는 부지런히 도망치는 박헌영을 따라간다.
부지런하게.
“서 이 자식아!”
부지런히,
눈 속이라서 빠르지는 않지만, 쉬지 않고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