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5 그래도 설원입니다 =========================
며칠이 지났다.
하늘이 흐리고 무겁다.
눈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우고, 찐고구마라도 먹어볼까.
그런 생각이 드는 2월이다. 나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웅크리고 있다. 지나갈 것은 지나갔고, 마주해야 할 것은 마주했으며, 내게 남은 건 이제 살아내야 할 길고 긴 시간이다.
책임졌어야 할 아이는 이제 없고,
나는 오롯이 홀로, 이 시간들을 지새울 것이다.
여백이 되어버린 이 나날들 속에 내가 바라는 건 없다. 이미 사라지고 증발했고 걷어차고 거부해 버렸다.
닥쳐올 고통과 배반의 시간들을 거부한 대가로,
내게 남은 것은 지루한 일들과 고독한 시간들일 것이다.
하지만 썩 나쁘지 않다.
사람은 외로워서 죽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그리움에 사무치는 고독의 밤을 보내지 않는다. 이 권태감 속을 견뎌낼 만한 인내심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 무료함을 달랠 새우깡 같은 것이나 있으면 퍽 좋겠다.
기대하고 원하는 것은 있지만,
그것이 내게 오지 않음을 알고, 그것을 갈구할 생각도 없기에
나는 태양이 죽어버린 영원의 여명 속에서 오지 않는 새벽을 기다릴 뿐이다.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여름이, 가을이 가고 또 겨울이 올 것이다.
그 잊혀진 사계절 속에서 나는 온기를 감각할 수 없는 작은 짐승처럼 이 방에서 계속, 계속 살아가겠지. 내가 걷어차버린 것들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어딘가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다들 살아가겠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아. 내게 일어났던 모든 기적이 악의적인 신의 장난질이나 다름없었던 것처럼. 차라리 그런 기적이라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
나는 멍하니 하늘을 보며, 조금씩 나풀거리는 눈송이를 본다.
그래도 나, 아직 여전한가봐.
눈이 오는 걸 보니까 기분이 좋아.
아주 오랜만에 눈을 보는 것 같아.
올해에 눈이 왔었나.
아니면, 눈이 왔다는 것을 느낄 틈도 없었나.
내 눈은 언제나 내 안을 향해 있었기에, 바깥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내 마음 속에서는 올해의 첫눈이다.
2월에 내리는 첫눈.
하지만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눈.
나풀거리는 눈송이가 세상에 조금씩 내려앉는다.
나는 메일을 확인한다. 박헌영은 바로 그 날 수신확인을 했다. 내가 이러는 건 별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헛된 기대를….
조금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껏 답장 같은 건 오지 않았는데.
지금 막, 답장이 왔다. 메일 제목은 간단하다.
[틀린 거 있어서 수정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것을 보고 멍하니 있는다. 애초에 화자가 난데, 그 소설에 틀리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메일을 열어보자 수정된 문서 파일이 첨부되어 있다. 나는 그걸 열고, 박헌영이 확인해보라고 한 페이지로 넘어간다.
그것은 파일의 마지막 페이지다. 내가 쓴 마지막 감상 아래에, 아주 짤막한 내용이 적혀 있다.
2월 8일, 저녁
나는 태원호수 입구에서 박헌영을 만났다.
단 한 줄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 내용도 없다.
2월 8일은 오늘이고. 지금은 낮이다. 밤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박헌영은 미래를 쓴 것이다. 틀렸다니. 틀렸다니….
나는 왈칵 눈물이 솟는다.
내 삶에
그 고통의 시간을 넘고 넘어서.
내게 유일하게 허락된 기적이 나타났다.
이걸, 사실로 만들면 돼….
이건 그 밤에 오겠다고 한 거나 마찬가지야.
나는 부리나케 준비하고, 집을 나선다. 나를 용서해 줄지, 화를 낼지, 매도할지, 비난과 분노건 뭐건 아무 상관 없다.
일단, 한 번 만나보자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눈발이 날리는 태원시는 벌써부터 눈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 나는 급하지만 천천히, 마음은 이미 그곳에 도착한 것처럼 차를 몰아간다.
차를 세우고, 나는 태원 호숫가에 도착한다. 태원공원에 밀려 사람들은 잘 찾지 않는 곳이다. 무엇보다 겨울이라서 사람이 거의 없다. 눈은 이제 함박눈이 되었다. 입구 근처에는 카페가 있지만, 나는 조용히 그 눈을 맞는다.
너무 일찍 오긴 했어. 아직 네 시밖에 안 됐다.
나는 눈이 온 호수를 천천히 걷는다.
사실, 그리 희망적인 기대는 하지 않는다.
나는 박헌영을 배신했고, 내가 보낸 내용은 박헌영을 기쁘게 할만한 내용이 아니다.
임신과 유산,
그것만으로도 박헌영이 내게 또다른 복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지, 그냥 나를 기다리게 하고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이 곳에서 과거의 이선준처럼 나를 매도할지도 모른다.
긍정적인 기대는 항상 나를 배반했고, 나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선준 때처럼 당황해서 울기만 하면 안된다. 바람맞을 수도 있는거고, 욕을 먹을 수도 있고, 심하면 나를 때릴 수도 있겠지.
무슨 말을 듣게 되어도, 나는 사과할거다. 어떤 심한 욕을 듣게 될지.
잠깐, 생각해본다.
‘미안해.’
‘쓰레기 같은 년아.’
‘잘못했어.’
‘걸레 같은 년.’
‘나는 너에게 너무 많은 잘못을 했어.’
‘네 몸뚱이 함부로 굴리다가 그렇게 된 거니까. 그래도 싸.’
‘진심으로 사과할게….’
‘혹시 내가 너랑 다시 만나 주겠다고 착각이라도 했냐?’
‘너한테 고마워. 그리고 항상 미안했어.’
‘또 속냐? 너는 하나도 안 변했어. 너는 여전히 그대로야.’
‘다시….’
‘내 눈 앞에서 꺼져.’
생각만 해도 마음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다.
자학도 이 정도면 예술이네.
하지만 현실이 항상 내 상상을 압도했던 것처럼,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모른다. 가장 심한 상황을 생각해보자.
인적이 드문 태원호수.
겨울,
눈 오는 밤.
헌영아….
너, 나 죽일거야?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다.
그래도 설마…. 그럴리가.
아냐, 그럴지도 몰라. 지, 진짜 그러면 어떡해?
나는 여유롭게 산책을 하다가. 조급하게 움직인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그, 그래도 살인은 좀 아니잖아. 내가 많이 잘못하기는 했지만, 그, 그 뭐냐.
살인은 나쁘잖아….
차라리 자살하라고 해줘.
아,
나 진짜 여전히 심각하네.
“하하….”
이렇게나 많은 눈이 온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기든 괜찮아.
나는 눈을 좋아해. 벤치의 눈을 털어버리고 그 위에 앉는다. 나는 조용히 눈을 맞는다. 머리와 어깨에 눈이 쌓여간다. 이대로 가만히 하루만 있으면, 눈사람이 될지도 몰라.
눈은 정말 좋아.
눈은 공평하게, 모든 걸 덮어버리니까. 행복도, 상처도, 눈물도, 아픔도 다 덮어버리고. 다들 엇비슷한 높이로 만들어 버리잖아.
눈이 가진 그 공평함이 마음에 든다. 따뜻해 보이지만, 닿는 순간 녹아버리는 그 덧없음도 마음에 든다. 정확히 말하면 눈보다 눈송이가 좋다고 봐야겠지.
제법 쌓인 눈은 걸을 때마다 뽀드득 하는 소리를 낸다. 눈은 좋아. 정말 좋지. 많이 좋은데.
음,
역시 춥잖아.
나는 눈을 털고, 근처의 호수 카페로 들어간다. 손님은 몇 명 없다. 심드렁한 표정의 카페 주인에게 나는 녹차를 부탁하고 천천히 마신다. 따뜻하네.
눈송이는 내리고
시간은 지나간다.
눈발은 굵어졌지만 바람이 없어서, 세상은 아주 조용히 눈에 덮여간다. 아,
이 정도라면 말이야.
온 세상이 설원이 되겠네.
나는 그 광경이 재미있어서 혼자 킥킥 웃는다.
밤이 되었고, 가로등 불이 켜졌다. 해가 넘어간지 오래다.
박헌영은 오지 않는다.
그러네.
오지 않는구나.
나는 세 잔째의 차를 마시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시각은 이제 여덟시 반을 넘어간다.
“손님, 저희 영업 끝나요 이제.”
카페 주인이 조심스럽게 말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영업이 끝나는 아홉시가 되어서도 박헌영은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으세요?”
가게 문을 닫으며 카페 주인이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네.”
네가 오지 않아도,
나는 슬퍼하지 않아.
내가 그런 일을 당해 마땅해서 그런 게 아니야.
버림받는 게 익숙해서도 아니야.
그저,
나는 이제 그런 것으로 슬퍼하지 않으니까.
잠깐 눈을 구경하러 나왔을 뿐이니까. 카페가 문을 닫고, 나는 눈 오는 호숫가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어둑한 호수는 꽁꽁 얼어붙어 있겠지. 하얗게 눈 쌓인 호수는 그저 평범한 설야로 보일 뿐이다. 저 호수를 밟고 건너편으로 가볼까?
호수의 가운데에 서서, 눈을 밟으며 빙빙 돌아볼까?
뭐든 좋다.
눈을 좋아하는 나니까.
얼마든지 더 기다릴 수 있어.
우산도 없이 나는 텅 빈 호수변을 맴돈다.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거리마다 인적은 없다. 그저 하염없이 쌓이는 눈송이가 점점 두께를 더할 뿐이다.
이건, 그냥 눈이 아니라 폭설이네. 나는 주차장으로 가 멍하니 선다. 세워져 있는 차는 내 차 한 대뿐이다.
음,
그런건가봐.
시각은 열 한 시.
이제 곧 자정이고, 날짜가 바뀌는데.
박헌영은 오지 않는다.
그런가.
그저 평범한 엇갈림이거나,
평범한 기만이거나.
그저 장난 정도였겠지.
아니면, 결국 나를 만날 결심이 무너질 정도로 나를 환멸해 버렸을지도 몰라. 이 정도면 그래도 견딜만해. 이선준이 한 거에 비하면 정말 발톱에 때만큼도 안 되는 거니까. 박헌영 이 졸렬한 자식.
네가 할 수 있는 복수는 고작 이런거냐?
한심해.
정말.
나 이런거에 속상해 하고 울지 않아. 내 멘탈은 거의 제곱 수준으로 강해졌다고. 이깟 호수, 한 바퀴 산책하고 갈 수도 있어. 그래. 그러네.
오랜만의 눈이니까.
오랜만의 호수니까.
산책이나 좀 하다 돌아가자. 눈 이렇게 맞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천천히 걸어 호숫가의 산책로로 들어선다. 가로등 불빛을 반사한 눈이 희게 빛난다. 밤인데도 환하다. 길은 구불구불하지만 어딘가로 이어져 있고, 어디로든 갈 것이다.
삶이 향하는 길도 이런 식이겠지.
어디에 닿았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로 향할 것이다. 나는 혼자서 산책로를 걷지만, 그게 슬프거나 외롭지는 않다. 그래도 괜찮아. 혼자라도 괜찮아. 나는 달라졌으니까. 누군가가 있어야만 기운을 차리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도, 예전과는 달라, 옅은 눈발이 턱없이 부족하게 내리던 그 때와는 달라.
지금은, 온 세상이 설원이니까.
혼자 걸어도 괜찮아.
나는 천천히 걷는다. 언제까지고 혼자 걷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지금은 슬프지 않다. 경쾌하게는 아니더라도 사뿐히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