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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54화 (154/224)

00154 영원한 여명 =========================

견뎌낸 사람은 견뎌낸 대로 칭찬받아 마땅하고, 견뎌내지 못한 사람은 그것대로 위로를 받아야 한다. 자격론 같은 걸 들이밀고 싶지는 않다.

“수고했어.”

“후우….”

한정운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사람들은 욕하던데요.”

“뭘?”

“한 번 대주고 전역하니까 부럽다고요.”

이런 염병.

“그럼 지들도 하라고 하지?”

“그래서 그렇게 말했어요. 좋아하던데요?”

한정운은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그리고는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는,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누나는 정말 착해요.”

“뭐가?”

“자신의 착함도 모르는 그런 착한 모습이요. 가끔은 못 견디겠어요.”

어떤 지점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것 같다. 함부로 말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한다는 그걸 말하는 거겠지.

“그….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

몇몇 모습만 보고 비난하지 말자.

그 사람의 사정이라는 것도 한 번은 생각해보자.

상대를 존중하자.

물론, 전부 지키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다. 나도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고 정의하고 비난했다. 일례로 나는 이선준의 엄마에게 아주 무례하게 쌍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래도 주변 사람들에게만큼은 꼭 지키려고 노력했다. 물론, 말처럼 살 수 없고, 나는 계속 변하고 다짐을 바꾸고 살아왔지만 그 말만큼은 계속 생각하고 있다. 어째서 그렇냐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당연한거다.

그냥, 내가 착해서가 아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하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키지 못해도, 지켜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도 기준이라는 게 있고, 그 기준을 넘어간 사람에 대해서는 역시나 매도했다.

그래도, 이해해보자. 받아들여 보자. 생각해 보자.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할 만큼 누나는 착하다는 거에요.”

한정운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린다.

“존중이 말살당한 시대에요.”

너 그런 중이병적인 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하긴 뭐, 나는 속으로 수백 수천번은 아니까 뭐라 할 처지는 아니다만.

존중이란 중요하지. 타인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잘못인 것처럼 구는 사람들이 세상 천지 어디에나 널려 있으니까.

“그런 누나 보면 진짜…. 진짜….”

한정운은 약간 부끄러운 듯 참다가 토해내듯 말한다.

“진짜 사랑스러워요.”

“엑….”

뜬금없는 고백에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다. 한정운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당황하면 서운하잖아요…. 배려는 별로 없으시네요.”

“그…. 흠, 그, 그래. 미안….”

확실히 하는게 좋겠네.

“아…. 나는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너는 좋은 동생이야…. 으, 미, 미안!”

완전 식상하고 거지 같은 거절 멘트를 날려버리면서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 된다. 최악이다. 언젠가는 해야만 할 말이었지만 그게 이 타이밍이라니. 한정운은 그리 실망한 표정이 아니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한다.

“그래. 확실하게 딱부러지게 말할게.”

나는 한정운을 곧게 바라보며 말한다.

“너한테 고마운 게 많아. 감사하는 것도 많고, 그런데…. 그런데 있잖아. 아, 정말….”

내가 누군가와 다시 만난다면,

누군가와 다시 연애라는 걸 할 수 있다면.

감정을 공유하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걸 할 수 있다면.

그 때 생각해보자. 아직은 아니야. 아무것도 준비가 되지 않았어. 나는 혼자 있는 것에 대해 이제 외로워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가라앉을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그 때가 된다면 만나고 싶은 사람은….

“나는 연하 취향 아니야.”

나는 한정운을 보며 웃는다.

“쳇, 짜증나네요 정말.”

한정운은 툴툴거리지만 내 대답을 충분히 예측했다는 듯 삐딱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그래도, 동생 포지션은 제 거죠?”

“나 동생 있는데….”

“마음이 시키는 동생은 저잖아요.”

“……네가 우리 그…. 남매의 우애를 어떻게 알아챘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헛헛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너 동생 포지션 잘 어울려. 좋은데?”

“언젠가 손도 같이 잡고 자는 동생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너 군대에서 이상한 거 너무 많이 배운 거 같은데?”

“허?”

한정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즐겁게 웃는다.

“저 원래 그런 거 많이 봐요.”

그 말에 나는 표정이 굳는다. 이 자식이 야동을 본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플라톤이 딸딸이 치는 걸 상상하는 기분이야.

우리는 음료를 마시고 공원을 거닌다. 춥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날씨다. 우리는 주차장으로 걸어가서 인사한다.

“전역 축하해.”

“고마워요. 누나.”

한정운은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에 손을 얹는다. 어린애 취급 하는 것 같은 그 행동에 나는 뒤로 물러나며 눈을 부라린다.

“너 이게…. 조막만한 자식이?”

“누나가 더 조막만한데요?”

“웃기고 자빠졌네 이게.”

“그래도. 저 꽤 만족해요.”

뜬금없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한정운은 겨울의 공원을 둘러보며 말한다.

“누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 음, 아니다.”

한정운은 말을 하다 말아버린다. 한정운은 여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남자고,

원래에는 오빠가 있었고, 그 오빠는 언니가 되었으며, 지금은 누나로 기억하고 있을 형제가 있다.

지금은 죽었을 그 형제를 생각하는 건가?

너는 그 형제를 누구로 기억하니?

형, 오빠, 언니, 누나.

이 네 개의 호칭을 전부 가진 너의 유일한 형제, 지금은 세상에 없고, 네게 바이러스를 넘겨준 그 형제는…. 불행 속에서 죽었지.

너도 나름의 불행을 겪었지만, 너와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거다. 각자의 방식으로, 다른 위치에서,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계속 발버둥칠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지는 않다. 남의 상처를 후벼팔 권리 같은 건 없다. 그저, 한정운에게 나름의 고통이 있었음을 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정운은 내 어깨를 잡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사실, 누나랑 연애를 하든 뭘 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제가 말했죠?”

“어? 응….”

“누나가 행복하게 사는 걸 보고 싶어요. 그게 다에요. 그거면 저도 행복해요.”

“너어…. 그런 말 하면 못써.”

흘리고 다니지 마 이 자식아. 한 번 거절했을 때 떨어지라고!

한정운은 내 반응을 보며 눈가를 파르르 떤다. 못 참겠다는 듯, 입술을 비틀고 비아냥거리듯 묻는다.

“일부러 귀여운 척 하는 거에요?”

“으흥, 이제 알았냐? 읍!”

당한 거 아니다. 나는 입을 가렸고, 한정운이 입술박치기를 시도해왔다. 나는 뒤로 총총 물러나며 말한다. 어린 놈의 움직임 정도야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다.

“느려 멍청아. 너는 안 돼. 평생 어장관리 당하기 싫으면 나 같은 거랑 빨리 인연 끊어라.”

내가 혀를 내밀자 한정운은 인상을 찌푸린다.

“진짜 악질이네.”

“이제 알았냐? 나 간다! 나중에 연락해!”

나는 차를 타고 시동을 건다. 한정운도 터덜터덜 걸어가 자기 차에 탄다. 금수저 자식, 벌써부터 차가 있는거야? 라고 말하면서도 나도 있긴 하지만. 한정운도 전역을 했으니, 이제 원한다면 언제든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의 불행도 안타깝지만, 우리는 서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겠지.

너도 나름의 행복을 찾기를.

나 같은 불량품이랑 엮이려고 하지 마.

너는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나는 이미 한 번 실패했고, 망가졌고, 뒤틀린 채 천천히 변하고 있는 중이야. 내 상처 굳이 감싸주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다행이야.

아직 네가 있어서. 우리 가끔씩, 서로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도, 서로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이로 만족하자.

너는 깨끗하고 좋은 녀석이니까.

그리고 아직, 나는 해야 할 일이 남아있어.

나는 그 후, 집에 돌아온 뒤 다시 소설 쓰는 일에 몰두한다. 나는 그리 작업 속도가 빠르지 않지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그 일에 투자한다.

솔직히, 텍스트 파일이 아니라 책으로 받은 걸 타이핑해가면서 옮겨적고 수정하고 또 쓰는 건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꾸준히 했는데도 여전히 작업량이 많았다. 이건 창작이 아니야.

노동이라고!

최근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몇 번이나 울었다. 그 감정을 되살리는 걸 떠나서,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나는 꿋꿋하게 해낸다.

얼마 남지 않았어.

그 마침표를 찍은 것은 2월이 막 시작되었을 때다. 나는 집에서 캡슐커피를 마시면서 이선준과 헤어지고, 지금 이 모습을 묘사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소설을 완성한다.

길고 긴 작업이었다. 소설이 내 현실을 따라잡도록 만드는 것은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일에도 끝은 찾아왔다.

마침표를 찍고,

메일을 보낸다.

수신자는 박헌영이다. 메일 주소는 알고 있었지만, 마우스를 클릭하는 것이 조금 어려웠다. 이래도 되는걸까 싶지만, 나는 그렇게 한다. 메일은 알아서 확인하겠지. 나는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아,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냈다.

이제 나는, 어디로든 흘러가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든, 박헌영과의 마지막 약속만큼은 지키자. 내가 몇 번이고 기만하고 배신한 박헌영에게 할 수 있는 사과는 그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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