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3 영원한 여명 =========================
후련하다.
이런 생각이 든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한적한 나날을 보낸다. 뭔가 내 삶에서 한 부분이 완결된 느낌이 든다.
그 완결이란 후련함보다는 공허함으로 다가온다. 성취감 같은 것은 더더욱 없다. 그저, 내 삶의 어떠한 시퀀스가 영원히 끝나버렸다. 허망하지만, 그렇기에 우울감은 그리 크지 않다. 그저, 조금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물론,
여전히 울고, 여전히 아파하고, 여전히 힘들어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너무 추워도 산책을 나가서 기분전환을 하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간다. 나는 예전에 써놓은 증오와 분노로 가득한 문장을 지워가며, 다시 그래도 설원입니다를 완성해 간다.
목표라면, 하나 있다.
박헌영에게 이걸 보내주는거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어. 이런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나 엄청 힘을 내고 살아가려 한다고, 그 말을 하고 싶다. 다시 만나려는 건 사치다. 그저 박헌영이 내게 부탁한 것처럼, 나는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무슨 일이든 몰두한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소설을 쓰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내가 이랬던가. 나는 어떻게 생각했지? 어떤 마음을 먹었지? 그런 생각을 한다. 꾸준히 쓴다. 집에서, 침대 위에서, 카페에서, 도서관에서, 공원 벤치에 앉아서.
고적하다.
소란이 없는 삶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할만하다.
그리움 때문에 사무쳤던 순간들은 이제 지나갔다. 이제는 그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관계가 무의미해진 건 아니다.
그저, 혼자라는 것에 그나마 만족할 줄 알게 되었다. 결국 이 또한 체념에 불과하다. 하지만,
때로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고요함에 감사합니다. 이 휴식을 허락해 줘서 감사합니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만족한다. 의외로,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태도는 쉽게 바뀌었다.
누구를 굳이 원하지 않아도 산다는 건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한정운과는 인연이 닿아 있다. 이야기를 하고, 메일을 주고받는다.
메일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건 좀 묘해. 전화로 해도 될 걸 한정운은 메일로 보낼 때도 있다. 전화로는 적당한 안부를 주고받는다. 나는 메일로 많은 일들을 말해줬다. 이미 전부 끝나버렸기에, 그것이 나를 괴롭히지만 막상 당했을 만큼 절박하지 않았기에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한정운은 전화로도, 메일로도 많은 이야기들을 해줬다.
훈계하는 게 아니라. 내 입장에서, 내 감정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를 긍정해주려고 한다. 한정운은 정말 좋은 녀석이다.
그것은 위로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메일을 나누던 도중에, 나는 정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누나.]
“어, 정운아.”
어쩐지 친동생을 대하듯 말하게 되었다.
[저 전역했어요.]
“……뭐?”
[전역했다구요.]
아니, 아직 때가 아니잖아 미친놈아.
이게 무슨 소리야?
[의병 전역했어요.]
어,
이게 무슨 소리래.
나는 한적한 공원의 카페에서 한정운을 기다리고 있다. 전역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랬던 걸까.
전역한지는 이틀 정도 된 모양이다. 시간에 맞춰서 한정운이 들어온다. 머리칼은 조금 길었다. 전역한지 이틀 된 병사라기에는 꽤 길지 않나 싶다. 깔끔한 옷차림에 얼굴도 잘 생긴 탓에, 사람들이 쳐다본다.
“누나.”
“어, 왔네.”
나는 손을 들어 인사한다. 한정운은 표정이 조금 밝다. 우리는 음료를 마신다. 나는 카페라떼, 한정운은 레몬에이드다. 전역했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신기하네.
“불명예전역자를 만나뵙다니 이거 황송해서 원….”
나는 피식 웃고, 한정운은 여유롭게 웃는다. 잘 웃는 녀석인줄은 몰랐는데, 하긴 이 녀석도 보면 볼수록 색다른 매력이 있다. 음,
생각해 보면, 나는 결국 연하는 취향이 아닌 모양이야.
연애 감정 같은 건 하나도 안 느껴진다. 그냥 잘생기고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는 녀석이라는 생각만 든다.
“너 어쩌다 전역했냐?”
“찔렀어요.”
그런 표현을 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찌른 건 찌른건데…. 왜 네가 전역을 해?”
“군대가 얼마나 좆 같은 곳인지 깨달았죠. 그래서 엿 같아서 때려치웠어요.”
아니,
때려치운다고 때려치울 수 있는 문제라면 이십대 남성의 대부분은 군대 때문에 고민 안 할걸? 한정운은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먹고 인상을 찌푸린다. 시어서 짓는 표정이 아니다.
그저, 갑자기 정말 혐오스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 날…. 있잖아요.”
“응.”
“누나랑 얘기하고, 복귀했을 때요.”
“응. 얘기해.”
한정운은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말한다.
“그, 마음의 편지로 했어요.”
소원수리, 마음의 편지. 어찌되었든 결국 내무부조리를 고발하는 익명의 편지를 썼다는 소리다. 나는 한정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다.
“저, 저 있잖아요…. 하하.”
“응.”
“씨발….”
한정운이 욕을 한다.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음료 컵을 들고 있는 손이 떨린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다.
“야…. 진정해. 괜찮아.”
나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아준다. 차갑다. 한정운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린다.
“그, 그 비밀 유지라는 거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당연하지.”
“제가 그거 썼더니, 그 새끼가 불려갔어요.”
“응.”
“그런데…. 간부가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나는 한정운의 분노에 찬 표정을 쳐다본다.
“방송으로 저를 부르더라고요.”
기도 안 찬다.
하긴, 군대란 결국 그런 곳이다. 비밀 유지 비밀 유지 하면서 병사 개개인의 비밀은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군대니까’ 라는 말로 퉁 치고 넘어간다. 인권유린을 하지 않으면 군대가 아니라는 것처럼 열성적으로 해댄다.
“아니, 아니 누가 그걸 몰라요? 그딴 걸로 그 새끼가 엮였다는 거 다 아는데…. 다 알고 있는데…. 거기서 저를 부르면 저는 뭐가 돼요?”
성군기 위반으로, 군내 성폭력으로 찔린 놈이 불려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송으로 한정운을 불러간다.
대가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한정운이 피해자고, 밀고자라는 걸 당연히 알 것이다.
“대질심문을 시키더라고요. 진짜…. 이런…. 후….”
최악이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얼굴을 마주보고 말한다. 범행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무엇을 당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그런 건 그 누구도 존중하는 게 아니다. 그저 편하기 위해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 같지만, 내가 있던 부대에서도 있던 일이다. 이런 부대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부대는 어디에나 있다. 한정운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계속 말한다.
징계 대상자는 징계위원회가 열릴 때까지 아무 조치도 받지 않았다. 부대 내에서 그저 근신 처분을 받았을 뿐, 한정운과 계속 생활했다. 당연히 그 징계 대상자도 기피 대상이 되었지만, 한정운 또한 그런 가혹한 시선에 노출되어야 했다.
나도 덩달아 화가 날 정도다.
“영창에 가더라고요.”
“뭐, 뭐라고?”
“영창요.”
“이런 씨팔.”
이번에는 내 쪽에서 욕이 나온다.
강간이다. 강간인데 영창이라고?
영창은 범죄 취급하지 않는다. 그냥 군생활이 며칠 늘어날 뿐이다. 겨우 그런 처벌을 받고 사건이 끝났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사건 축소는 얼마든 일어나는 일이다. 아마 대대장이든 사단장이든, 이 사건이 커져서 좋을 게 없다 생각하고 사건을 대폭 축소해서 영창 수준의 징계를 내렸을 것이다. 사건이 터지면 지휘관급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그런 병신 같은 시스템 때문에 사건은 사건화되지 않고 조용히 묻히는 게 더욱 많다.
“저한테 막…. 이거면 됐지 않냐. 걔도 인생 종치는 건데 그러면 안 되지 않냐. 걔도 뭐 미래가 창창하고 다른 부대로 전출 보내면 너는 문제가 없을 거니까 넘어가니 뭐니 그딴 소리를 해대는데…. 하.”
한정운이 하는 분노가 이해가 된다. 나와 헤어진 이후로 계속 그런 시선 속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속된 말로 정말…. 후장 따인 놈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쳐다봤을거다.
“그래서…. 어떻게 한 거야?”
한정운은 레모네이드를 쪽 마시며 말한다. 마치 세상에 엿을 날리듯, 비웃으며 말한다.
“인권위원회에 찌르고, TS바이러스 발병자라는 거 밝혔어요.”
아,
그런 방법이 있었나?
TS바이러스 발병자에 대한 신분 세탁은 완벽하다. 흔적이 남지 않는다. 내가 짤없이 예비군 훈련 통지서가 나왔던 것처럼, 한정운도 가만히 있었으면 아마 영장이 나왔을 것이다. 그저 자진입대를 했다. 한정운은 그저 평범한 성인 남성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한정운은 자신이 본래 여자였고, 군대에는 어울리지 않고 적응을 못 하겠다 말했을 것이다.
“재심사 들어가고, 저는 그 뭐냐…. 그린캠프? 그런 데 격리되어서 좀 지냈어요. TS발병 관련 서류도 발급받고, 정신감정도 받았고요.”
“그거 보통 일 아니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쉽게 전역을 시켜줘?”
“뭐…. 인권위원회 걸린 일도 있고, 그거 그냥 솔직하게 말하니까 저를 완전 미친놈 취급하던데요?”
“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한정운은 웃는다.
“자살 생각해본 적이 있냐 그래서 네. 하고, 가끔씩 뭔가 파괴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냐 해서 네. 하고.”
내 부모가 가끔씩 친부모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가?
이따금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가?
간혹, 세상이 무너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누구나 사실 그런 생각 한다.
안 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냐? 대가리가 꽃밭인 놈들이나 자살 생각 안 해보지. 그런 생각 하니까 그렇다.
사실 그런 설문이나 질문에 대해서, 다들 일부러 정상을 위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이 귀찮아지니까 그렇다. 그런 건 결코 정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을 위장하고 흉내낸다. 그런 잣대에서 바라보면 세상 사는 모든 사람들은 정신병자고 자살위험자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정신이 이상하다고 판단한다. 그런 설문 내용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만들어낸 허위다.
당장 그거 만든 사람도, 이건 좀 이상한데 싶을거다. 아마 자기도 그 기준 안에 속하겠지. 그저 귀찮은 게 싫어서, 비정상으로 보이는 게 싫어서 그럴 뿐이다. 인간은 규격화할 수 없다. 사람의 정신은 계량화할 수 없는 수치다.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수치를 증거라고 들먹이며, 우리 병사들은 행복하다. 문제가 없다. 이런 식으로 딸딸이나 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다 사실대로 말하니까. 좀 기다렸더니 전역시켜주던데요.”
TS바이러스 발병자라는 사실이 드러난 게 주효했을 것이다. 정신 감정이야 진단이 필요했을 뿐이다. 한정운은 짤막하게 자신의 반토막난 군생활을 평가한다.
“엿 같은 군대.”
침이라도 뱉을 기세다. 내가 해 줄 말은 하나밖에 없다.
“잘 했어.”
견뎌내지 않았다 해서 한정운을 비난할 마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