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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52화 (152/224)

00152 영원한 여명 =========================

“이번에는…. 확실해. 도망가자. 진짜로 도망가자 우리…. 내가 잘못했어. 정말, 정말 미안해.”

이선준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이선준은 내 얼굴을 그제야 제대로 쳐다본다.

“그런데 너…. 머리 잘랐네.”

“응.”

“예쁘다…. 정말로, 잘 어울려.”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면서 목소리 끝을 떨고 있다. 나는 이선준의 눈을 쳐다보며 말한다.

“왜 잘랐는지 맞춰봐…. 이런 말 하려고 했는데. 역시, 그런 건 싫어.”

나는 내 손을 덮은 이선준의 큰 손을, 다른 손으로 쓰다듬는다. 준비했던 말, 하려고 했던 말, 이제는 해야만 할 말을….

해야겠다.

“이선준….”

“응.”

나는 여자다.

“안 돼.”

“…….”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도 나를 사랑했다.

“이미…. 너무 늦었어.”

우리는 연인이 아닌 척 하는 연인이었고,

“나는 이제 우리 관계에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서로 증오하는 연인이었다가.

“우리는 서로 너무 많은 상처들을 주고받았어.”

다시 사랑에 빠졌다가.

“네가 실수를 하고, 내가 용서하고, 내가 잘못을 하고, 네가 용서를 하고, 다시 또 내가, 다시 또 네가 용서하고….”

다시 찢어지고, 배신이라는 기만에 빠져 괴로워하고

“이제 힘들어.”

그 와중에 생긴 불가피한 불행도 있었다.

“이제, 불행을 공유하는 건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자.”

너도, 이걸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

나는 지갑을 뒤져서 사진을 꺼낸다. 이선준은 그것을 보고 말이 없어진다.

“내 아이야.”

그 사진을 이선준에게 밀어놓는다. 초음파 사진이다.

“오빠 아이기도 하고.”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결국 토해내듯 말한다.

“이제…. 없는 아이이기도 하고.”

이선준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나를 바라본다. 나는 변명하듯 말한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걸 보자마자 나는 감정이 격해진다.

“지, 지운 거 아냐…. 으, 으, 나, 낳으려고…. 낳으려고 했, 해, 해, 했는…. 했는데….”

결국.

이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다.

“으, 흐, 아…. 아…. 후, 후우…. 후우….”

나는 숨을 천천히 쉬며 경련을 멈추려고 노력한다. 이선준은 얼이 빠져서 사진을 멍하니 쳐다본다.

“그, 그…. 유, 유산…. 유산했…. 흐, 흐흐…. 흐흑!”

결국 참지 못하고 나는 흐느낌을 뱉어낸다. 이선준은 내가 참아냈을 불행을 가늠하는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군다.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이선준은 기꺼이 아빠가 되어줬을지도 모른다. 이선준의 부모도 마지못해 허락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너를 밀어내려 했지만, 결국 너와 나의 그 유일한 매개를 저버리지 못해서 다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는 없어.

나는 울음을 억지로 구겨넣는다.

“그, 그러니까 안 돼….”

이선준은 말없이 울고 있을 뿐이다. 해가 지나서 나는 스물일곱이다.

이선준은 스물여덟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우리는 이십대에 불과하다.

십대에 부모가 되는 이들이 있다 해도, 우리는 아직 그 이십대다. 우리는 아직 어리다. 생명의 무게를 실감하기에 우리는 미성숙하다. 성인이지만, 우리는 어른이 아니야.

“나는 더 이상 못 하겠어…. 너랑 나는 이상해.”

“미, 미안…. 미안하다…. 정말…. 정말 미안해….”

“더 이상 어떤 불행도 참아낼 수 없어. 견디고 싶지 않아. 너는 그냥, 너대로 행복해. 나는 나대로, 어떻게든 살 테니까…. 우리 끊어내자 이제.”

이 지긋지긋한.

너와 나.

“우리 이제 서로 없었던 것처럼 살자…. 오해하지 마, 나 너 미워하지 않아.”

“아, 안 돼…. 제발, 제발. 부탁이야. 잘 할게, 뭐든지, 뭐든지 할게 설원…. 사랑해. 정말 사랑해. 하자는 대로 다 할게. 정말….”

“싫어. 싫어 이제는…. 너와 함께 있으면서 견디고 참아야 할 게 너무 많아. 앞으로도 더 뭐가 있는지 모르겠어. 너하고 나는 달라.”

애초에 이런 건 있을 수 없었어.

“수준이 안 맞아. 나는 드라마처럼 살기 싫어…. 신데렐라 같은 거 되기 싫어…. 그냥, 그냥 혼자 살래. 혼자 살다가. 그냥 마음 맞는 사람 있으면 만날래…. 아마 없겠지만…. 어쨌든, 너하고 나는 이제 끝이야. 완전히 끝이야. 너하고 얽힌 나쁜 일과 감정들이 너무 많아.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설원, 설원 진짜로…. 싫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줘. 미안해. 정말…. 제발….”

우리는 구질구질하다.

솔직하지 못해서 문제였고,

용서하지 못해서 문제였고,

마지막에는 쿨하지 못해서 문제다.

우리 지금 완전 찌질해. 서로 울면서 헤어져달라고, 만나달라고 구걸한다.

“용서해. 용서해. 너 잘못 없어. 고마워. 나 다시 한 번 좋아해줘서 고마워, 배신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서 고마워. 용서해줄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끝내자. 끝낼 수 있다면 지금밖에 없어.”

다시 만나서, 또 네가 이런 문제에 휘말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또 뭔가 배신당해버릴지도 모르잖아. 나는 더 이상 그런 가능성을 내포한 채 불편한 행복을 누리고 싶지는 않아. 행복이 아니라도, 차라리 불행이더라도 나는 너와는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하며 나도 괴물이 되어버리기는 싫어.

“그, 그럼 사귀는 게 아니더라도…. 만날 수는 있잖아.”

“안돼. 싫어 절대로 싫어.”

더 비참한 관계를 강요하지 마.

“으, 으…. 울지 마 등신아.”

나도 울면서 우는 이선준을 달랜다.

“확실히 말해. 이번에는 도망 안 칠 테니까. 확실하게 너도 이거 받아들이겠다고 말해.”

또 먼 나중에, 나를 도망쳤다고 기억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상처입히지 않도록 이걸 받아들여 줘. 행복하겠다고 말해 주진 못하더라도, 내가 없어도 살겠다고 말해줘. 이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울고 있다. 나는 결국 이를 악물고 소리친다.

“제발…. 제발 좀! 이 병신아 나 그만 놔줘!”

나는 이선준에게 애원한다.

“그만 하자고 좀! 제발…. 더 불행해질 뿐이잖아…. 지금 당장 행복해져도 너랑 같이 있으면 안 좋은 생각밖에 안 날 것 같아! 제발…. 제발 부탁이야….”

이선준은 소매로 눈을 훔친다. 고개를 든다. 마지막 모습이 이렇게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니, 이 상황에서도 어이가 없다.

“제발…. 사랑해.”

“싫어. 듣기 싫단 말이야!”

나는 울면서 소리친다. 그딴 말 하지 마. 네가 진짜 배신했든 아니든 나는 고통받는 순간동안  그저 악밖에 남지 않았어. 환멸과 배신감은 아직도 남아있어. 이선준은 이를 악물고 한숨을 쉰다.

“미, 미안하다…. 그래. 그래 알았어. 미안하다 설원…. 정말,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너 잘못 아니야. 너 용서해. 너 잘못 안 했어. 그냥 우리는 지독하게 운이 나쁘고 궁합이 안 맞는거야…. 응? 그러니까…. 그러니까 행복하게 살아 제발. 나 찾지 말고, 알았지?”

“……그래…. 노력해볼게. 그래….”

이선준은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내 말을 거절할 수 없다. 매몰차도 어쩔 수 없다.

“마지막으로…. 뭐…. 부탁할 거, 그런 건 없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이선준이 나를 바라본다. 그래, 받아들여줘서 고마워. 나를 포기해줘서 고마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지긋지긋하고 지독한 관계는 이제 끝이다.

언젠가 누구에겐가 들었던 말을 이번에는 내가 한다.

“죽지 마. 그거면 돼.”

나 때문에, 나와 만날 수 없어서 죽으려고 하지 마. 이선준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연다.

“하나만 물어볼게.”

“응.”

이선준은 터미널 건물을 보며 뿌연 숨을 뱉어낸다.

“왜…. 여기서 보자고 한거냐.”

나는 마찬가지로 그 터미널 역사를 보다가, 이선준을 본다.

“너도 알잖아.”

그 우동을 다시 한 번 먹고 싶었다. 우리 안에서 죽어버린 무언가를, 그걸 먹으면서 조금이나마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했다.

나는 너무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내 마음이 약해지기를 원하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그 우동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 우동을 먹었다면

이선준이, 역시나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에 무슨 일이 있든 그걸 견디고 나아갈 다짐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우동집은 이제 없다. 주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제 기억나지도 않는다. 무엇을 가정하든 남는 것은 결과뿐이다.

그 우동집은 없어졌고,

우리의 우정도, 사랑도, 집착도, 연민도

이제 더 이상 없다. 내가 기대보며 했던 마지막 우연은 증발했다.

이선준도 아마 그걸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아니까. 나는 차라리 그 우동집이 없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선준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한 번만…. 안아보면 안돼?”

“돼.”

이선준이 일어나서 내게 다가오고, 나를 끌어안는다. 나도 이선준을 마주 안아준다. 큰 키라서 나는 까치발을 들어서 목과 머리를 끌어안고 쓰다듬어 준다.

“행복해. 제발, 부탁이야. 나 찾지 말고.”

“그래…. 그래….”

이선준은 몸을 떼며 나를 쳐다본다. 뚫어질 정도로 빤히 쳐다본다. 그 눈빛이 뭘 원하는지 알 것 같다. 뻔한 놈 같으니. 나는 인상을 쓴다.

“마지막이야.”

“어, 엇!”

그리고 이선준의 멱살을 잡고 아래로 끌어당긴다. 얼굴이 내 쪽으로 확 당겨지고, 나는 박치기 하듯 살짝 위로 뛴다.

아주 가볍게 살짝.

나는 입맞춤을 해준다. 이선준은 놀라는 동시에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이선준에게서 떨어진다.

“이제 내 인생에서 꺼져.”

나는 독살스럽게 쏘아붙인다.

“그래.”

질척하지만, 묘하게 유쾌한 뒷맛이 남는 이별이다. 이선준은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걸어간다. 나는 그 뒷모습을 계속 쳐다본다. 한없이. 한없이 바라본다. 미련이 남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나도 저기로 가야 되는데.

헤어지는 마당에 어깨 나란히 하고 걸을 수는 없잖아.

쳇,

나는 딴전을 피우며 시선을 돌린다. 이선준이 멀어져간다.

이제 볼 일은 없겠지.

죽지 마.

나 때문에 죽지 마. 행복하게 살아. 나는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온다. 나는 이를 악물고, 등을 돌린 채 주먹을 쥐고 눈물을 쏟아낸다.

미련이 없을 리가 없잖아!

나라고 너를 잡고 싶지 않았겠어?

내가 조금이라도 덜 병신이었다면,

내가 너를 버리지 않았다면,

내가 너에게 먼저 연락을 했더라면,

시상식 때 쫄지 말고 당당하게 꽃다발을 건네줬더라면,

네가 나를 조금만 더 일찍 용서했더라면,

네 부모가 조금이나마 네 이기심을 이해해줬더라면,

우리 아이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그리고 그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 우동집이 아직 남아있었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몰라.

이런 일 맞지 않고 평범하게 연애를 하고 잘 살았을지도 몰라. 우연이 만들어낸 이 지독한 엇갈림 때문에라도 나는 너를 만날 수가 없어.

우리는 행운과 불행의 동전 뒤집기에서 열 번 다 불행의 뒷면이 나오는 사람들이야. 우리는 그런 관계야.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가혹해.

그래, 그래도 완전한 이별이다. 후회가 많고, 미련이 많고, 해소되지 않은 감정이 너무 많은 이별이지만.

그래도 둘 중 하나가 도망치는 게 아니었고, 완전한 끝을 본 것으로 만족하자.

이선준

너를 증오하고 미워하지만.

그 만큼이나 너를 사랑했으니까.

용서해줄게.

나는 여전히 얼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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