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1 영원한 여명 =========================
집에서 울고 실성한 듯 문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지냈다. 일을 하고, 종무식 때문에 내게 참석하라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 편집장에게 이번 한 달만 쉬면 안 되냐고 물었다. 너무 고단했고, 너무 힘들었으니까. 도저히 아무 것도 할 기력이 생기질 않았다.
임신했고, 유산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체면과 평판에 집착하지 않게 된 이상 무슨 말이든 못 할 게 없었다. 편집장은 그 말을 듣고 어지간히 놀랐지만 결국 한 회 정도는 쉬도록 허락을 해 줬다. 곧, 2월까지의 유예를 얻었다.
예뻐서 불행한 것처럼, 예뻐서 좋은 일도 얼마든지 있다. 나는 그걸 명민하게 써먹고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건 나쁘다고 계속 생각해왔으니까. 나는 내가 선택한 합리와 윤리 속에서 산다. 누구의 잣대대로 살 생각은 없다.
1월, 새해가 되었다.
머리를 잘랐다.
나는 미용실에서, 거울 속의 단발머리가 된 나를 본다.
“이 스타일도 꽤 잘 어울리시네요.”
미용사가 칭찬을 한다. 일단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가볍다.
긴 머리는 일단 불편하고, 무겁다. 목이 뻐근해지는 건 다반사고, 어깨 결림도 심하다. 어깨 즈음에 닿을 듯한 단발머리를 한 나는 낯설다. 웨이브펌을 했을 때에도 낯설었던 건 마찬가지다. 낯선 모든 것은 언젠가 익숙한 것이 된다. 거울 속의 무표정한 나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긴 머리를 자를 때에는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미용사는 내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싶은 표정이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 표정이 워낙 굳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들은 큰일을 겪으면 머리를 자르는 식의 클리셰를 많이 봤다. 그걸 따라하고 싶기도 했다. 그 기분이 뭔지 알고 싶은 게 가장 컷던 탓이다.
다만, 무언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그리고 가장 쉽게 할 수 있으면서, 가장 큰 변화를 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당연히 머리를 자르는 것이다.
장발이든, 단발이든 나는 여전히 예쁘다. 이미지가 확 달라지긴 했지만, 이대로도 충분하다. 칼로 딱 자른 것 같은 단발이 아니라, 가볍게 펌도 했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돈을 지불하고 미용실을 나온다.
머리는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이건 시작이다. 어떻게든, 이제는 다르게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쉬운 것부터 천천히, 바꿔 나간다.
사실 크게 변한 건 아니다.
단발머리를 한 나는 아직도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하하
“토 나올 것 같네.”
괜히 혼잣말을 한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보며 킥킥 웃는다. 검은 롱코트에 검은 구두, 흰색 목도리를 하고, 나는 하늘을 본다. 창백한 입김이 나오는 겨울이 아직 길다. 핸드폰을 두드려 전화를 건다.
[어, 여보세요….]
잠긴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만날래?”
나는, 억지로 약간 밝은 목소리를 내며 말한다.
[어, 어…. 지금 바로 갈게, 어디야?]
“태원 터미널로 와.”
전화를 끊고, 나는 한숨을 푹 쉰다. 이제 변해야 하는 나다. 급한 일을 가장 먼저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오늘 이선준을 만난다.
태원 터미널은 오랜만에 온다. 차를 산 이후로는 버스라는 걸 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도망치면서 한정운과 만났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나를 살린 건 한정운이었다. 말하자면 은혜다. 내가 죽고 싶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감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 문제는 해결이 되었을까? 연락을 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다.
한정운과 갔던 터미널 앞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킨다. 평일 낮에도 터미널에는 몇몇 사람들이 오간다. 다들 어딘가로 가겠지.
무슨 말을 할지는 알고 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생각해 놓지 않았다. 이선준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빠르게 도착했다. 전화로 위치를 알려주자 쉽게 찾아왔다. 유리문을 열고 이선준이 들어온다.
갈색 트렌치코트에 보라색 스웨터, 거기에 청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있다. 거기에 야구모자까지.
미친, 저게 무슨 옷차림이야?
보자마자 입맛이 떨어질 정도다. 이선준은 나를 보더니 천천히 다가온다.
“미, 미친…. 제정신이야?”
나는 얼이 빠져서 말한다.
“어? 뭐, 뭐가?”
내 적대적인 반응에 이선준은 뭔가 잘못됐나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경찰서 앞 지나가면 테러리스트로 잡힐 것 같은 옷차림인데?”
안 본 눈을 사고 싶어질 정도로 못난 옷차림이다.
“그, 아…. 급하게 나오느라.”
얼마나 급했으면 저가 뭘 입는지도 모르고 나왔을까. 나는 시켜놓은 음료를 권한다. 이선준이 그걸 받는다. 이선준은 우물쭈물거리고, 나는 빤히 쳐다본다.
“나가서 얘기하자.”
더 이상 카페에서 민폐 끼치며 꽥꽥대는 건 사양이다. 고성방가를 할 생각은 없지만, 상황에 따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나, 생각해보면 카페 갈 때마다 지랄이었어.
우리는 카페를 나와 터미널 건물을 벗어난다. 승차홈이 있는 유리문, 상점가를 지나면서 이선준이 말한다.
“그거…. 없어졌네.”
“응. 봤어.”
우리가 함께 우동을 먹고는 했던 그 가게는 이미 없다. 얄궂게도, 그 가게는 다른 프랜차이즈 우동집으로 바뀌었다. 그냥 평범한 맛을 내던 우동이었다. 추억할래도, 그게 무슨 맛이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우리가 공유했던 추억, 아름다운 추억을 되찾을 수 있는 곳은 이제 사라졌다. 사라진 우동 가게, 새로 들어온 프랜차이즈 식당.
과거는 사라지고, 추억은 흐려지고, 사람이든 집단이든 상점이든 기업이든 어떻게든 변해간다.
더 쉽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식을 택해가며.
살아남아 간다.
우리는 터미널 바깥의 테이블 벤치에 앉는다. 춥지만, 그래도 꽤 견딜만하다.
나는 나름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정하게 될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고적하게 지내며 계속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고 노력했다.
이미 너무 늦어버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선준을 부른건, 그 만큼 내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그런 것이다.
살이 많이 빠졌다. 그러니까, 빠진 게 아니라 야위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선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다. 계속 생각했던 것처럼 이선준은 나를 배신한 게 아니다. 그래.
내 미움은 헛된 거였구나, 그래, 그거면 됐어. 나는 묻는다.
“어디에 있었어?”
“아…. 그, 남해 별장에….”
“갇혀 있던거야?”
이선준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변명해봐.”
나는 부드럽게 말한다.
“미안하다 정말….”
이선준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선준과 내가 화해했던 날, 이선준과 약혼녀, 도정희는 크게 싸웠다. 이선준은 결혼 하기 싫다며 딱 못을 박아버렸다. 도정희는 화가 나서 돌아갔고, 이선준은 나와 화해한 뒤 집에 돌아가서 파혼 의사를 밝혔다.
그들의 비즈니스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하기로 한 결혼을 무효로 만드는 것은 상대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을 것이다. 이선준의 부모님은 상대에게 백배사죄하는 동시에, 이선준을 설득하려 했다.
이선준은 절대로 싫다며 반대로 부모님을 설득하려 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다른 사람과 살고 싶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당연하게도,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온전히 이선준과 나의 잘못이다. 이미 벌려놓은 일을 취소해야 한다. 그것을 합리화하는 무기는 오로지 감정 하나뿐이었다.
사랑이라, 달콤한 말이지만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그 때문에 벌어질 손해와 타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선준은 그런 걸 책임질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이선준은 약혼자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난 못난 놈이고, 나는 예전에 차고 도망간 주제에 다시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얼간이였다.
나도, 이선준도 어떠한 논리도 없다. 우리는 당당하지 못하다. 하지만 이선준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했다. 연을 끊으면 끊고, 사죄를 하라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연히, 그 말로도 설득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일단 결혼은 하고, 나중에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이선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 일단 좀 여행이라도 가서 머리를 식히라고 말했다.
당연히, 이선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와 논쟁은 결국 서로를 설득할 수 없었고, 이선준의 부모님은 결국 나를 걸고 협박했다.
나를 못 만나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직접적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방법이 무엇일지 나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내 목숨 가지고 협박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물론, 나는 그쪽 사정 같은 건 모르지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을거다. 돈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이선준은 핸드폰을 빼앗겼고, 남해의 별장에 거의 가택 연금 수준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인터넷도, 전화도 없이 그저 밥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무엇을 하든 감시하는 사람들이 따라다녔다고 했다.
생각을 고쳐먹을 때까지. 일단 가둬두는 것으로 했다. 이선준의 부모님은 그 와중에도 위태위태한 파혼을 어떻게든 막으려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 도정희라는 사람도 이선준을 사랑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들은 일종의 을이라서, 그 결혼을 성사시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단다. 그래서 그들은 자존심이 상해도 일단은 참고 있다는 모양이다.
이선준의 부모님은 내게 이미 연락을 다 해놨으니 만날 생각은 말라고 했다. 더 무슨 허튼 짓거리를 하려고 하면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책임질 수 없다는 말만 했다.
뭐, 결국 나는 살아있었고 어떤 감시나 스토킹의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이선준의 부모님은 그저 공갈협박을 한 것에 불과했다.
이선준은 죽어버리겠다고 맞협박을 했고, 역시나 거기에는 내 목숨이 협상 카드로 걸렸다. 네가 죽으면 너 그렇게 만든 설원이는 내버려 두겠냐. 이런 식이었겠지.
그 말에 이선준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모르는 새에 내 목숨 가지고 대체 몇 번의 딜이 있었던거야?
“너네 진짜 재수없어.”
내가 싸잡아 욕해도 이선준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이선준은 나를 계속 걱정했다. 내가 그런 상황 속에서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다. 이선준은 울며불며 부모님에게 매달렸다. 설원이 무사한지 제발 확인만이라도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선준의 엄마가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비인간적이다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다.
하지만 결국 사람은 사람인 모양이다.
차라리 나를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 합리였을 텐데,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결국 사람이다.
물론, 동정하고 이해할 생각은 없다. 괴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정략결혼을 위해 감정을 말살하고, 자식을 연금시켜버리는 부모라니. 그런 거, 진짜 이 세상에 있었구나.
하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언제나 벌어지는 게 세상이다.
하지만 계속 말했던 것처럼, 이선준과 나는 떳떳한 관계가 아니다. 이선준의 모든 변명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음, 어느 정도는…. 알겠어.”
이선준의 엄마에게 나는 독설을 퍼부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꾼 모양이다. 바로 그 날 이선준은 풀려났지만, 나는 병원에 있었다. 내가 했던 폭언이 효과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의 핵심은 아마 내가 했던 말일 것이다.
우리는 제대로 헤어져야만 한다.
이 말이, 이선준을 풀려나게 한 열쇠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말대로 해줘야겠지.
“내가 정말 미안하다…. 나는…. 나는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서…. 내 부모가 정말 미쳐버려서 네게 나쁜 짓을 해버릴 것도 무서웠어. 내가 함부로 행동해서 그런 일이 생겨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 그리고, 그리고 몇 번이나 마음이 바뀌었다고 거짓말도 해봤는데. 결혼식 날 때까지는 절대로 못 나오게 한다고…. 해서….”
그래,
철저한 사람들인 만큼, 그 정도에 속아넘어가지는 않았겠지. 이선준의 피치못할 사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들었고 이해했다. 그저, 피해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잠깐의 시간동안 행복했으니까. 그래도 우리 피임은 확실히 했는데, 어째서 임신이 된 걸까.
하긴, 정관수술을 해도 임신하는 사람이 있는 마당에, 이 정도 일이야 사실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엿 같은 일들 중에 하나겠지.
사실 모두가 피해자다.
나도, 이선준도.
잘 닦아놓은 아들 혼삿길이 망가질 것 같은 이선준의 부모님도,
이선준의 약혼자도, 그 약혼자의 부모님도.
그저 지독하고 악랄한 우연과 우리의 지독한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피해자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