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세상에 안 어려운 게 어디있냐? =========================
“일단 사이즈부터 잴까요?”
“네, 네네네네네넷?”
“사이즈요.”
“가, 가슴을요?”
여자들이라면 당황하지 않았겠지만 나라면 다르다. 여자가 내 가슴 사이즈를 잰다니!
뭔가 이런 고민 하는것도 병신같지만 진짜로 긴장되었다. 줄자를 가져온 여자는 내 가슴둘레를 쟀다. 나는 잔뜩 얼어서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밑가슴둘레를 재고, 윗가슴둘레를 잰다. 처음 알았다. 여자의 가슴 사이즈가 결정되는 방식이 어떤건지.
밑가슴둘레, 그러니까 가슴을 빼고 잰 둘레는 68cm였다. 윗가슴둘레는 80cm다. 그 차이가 컵을 결정하는 모양이었다.
“B컵이네요.”
“에?”
끽해야 A컵일 줄 알았던 내 생각은 무너졌다. 내가 알기로 대한민국 여성들 평균 컵이 A라고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작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까지 작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손님 몸매 축복받은 거에요. 엄청 말랐으면서….”
직원은 질투난다는 듯 나를 보며 웃었다. 할 말이 없다. 나는 그냥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가장 심플한 디자인의 속옷을 구매했다. 와이어니 뭐니 하는 얘기까지 듣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내 가슴 사이즈를 알았다. 70B란다. 쉽게 나오지 않는 사이즈라는 걸 보니 TS바이러스라는건 정말 미적 기준에 충실한 이상한 바이러스였다.
속옷은 좀 많이 삿다. 총 일곱세트를 삿다. 이번에도 지출이 크다. 나는 이것저것 비교하며 최저가로 구매하는 건 성격에 안 맞았다. 종이가방을 들고 나왔는데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갔대?”
전화를 하려고 보니 카톡이 와 있었다. 거기에는 짤막하게 이선준이 보낸 카톡이 써 있었다.
[양말이랑 이것저것 사온다. 거기서 기다려.]
이상한 부분에서 섬세하다. 그러고 보니 내 발 사이즈에 맞는 양말은 없다. 나는 지금 양말을 안 신은 채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이러면 발에서 냄새 나서 싫다.
그러고 보니 여자들은 피부관리도 하고 그러던데, 내가 볼 때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일처럼 보였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근처의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사람들은 많이 지나다닌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지나다니던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나와 눈이 잠깐 마주치는가 싶더니 곧 다시 보고 있던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옷차림과 길거리에서 헤드폰을 끼고 걸어가는 폼, 그리고 좀 꼴같잖은 팔자걸음이 눈에 띄었다. 내가 잘 아는 녀석이다. 그 면상을 보니 불현듯 떠올랐다. 내가 TS바이러스 발작을 일으키기 전, 한정운 전에 만났던 놈이었다. 놈은 내게 악담을 했다.
[흐흐…. 너 TS되서 윤간당한 다음에 막 임신테크 타면 존나 웃기겠다.]
윤간은 아니었지만 TS는 실제로 일어났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뒷목이 뻐근해지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야, 이 개새끼야!”
나는 종이가방도 내팽개치고 달려가 그 자식에게 날라차기를 먹였다.
“컥!”
내 전 체중을 실었기에 덩치가 꽤 있는 녀석도 뒤로 나자빠졌다. 별로 관계는 없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열이 뻗쳐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야이 개새끼! 씨발새끼!”
-퍽! 퍽! 퍽!
“억! 으억! 뭐, 뭐야!”
“죽어! 죽어! 죽어 이 씨팔! 죽어버려어어어어어어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다 쳐다봤고, 얻어맞는 놈은 갑자기 조막만한 여자애가 위에 올라타서 주먹질을 하자 이게 왠 날벼락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 설원이라고….요?”
“그래 이…. 이 개새끼야! 죽어! 놔! 놓으라고!”
“마, 말로 해….요”
녀석은 팔을 붕붕 휘두르려는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내가 한창 지랄발광을 한 탓에 우리 둘은 자리를 근처의 한적한 공원으로 옮긴 상태였다. 나는 아직도 화가 머리 끝까지 뻗쳐있었고, 박헌영은 지금 이 상황이 대체 뭐가 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설원이라는 것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니가, 니가 미친…. 그런 미친 개소리를 해서! 지, 진짜로 말이 씨가 됐잖아!”
나는 주변에 들고 내리칠만한 돌 같은 것이 없나 찾았다. 내 광기 섞인 표정을 봤는지 녀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납득했다.
“지, 진짜 설원 맞나보네….”
“그럼 맞지 아니냐? 죽어! 죽어! 맞다가 죽어! 대가리를 부숴버릴거야!”
화가 나면 진짜 미쳐서 발광하는 나를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진정되는 것에는 시간이 꽤 필요했다. 나도 안다. 이 자식이 한 농담과 내가 발작을 일으킨 것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었다. 그냥 재수가 지독하게 없던 것 뿐이었다. 그 날 한정운이 내 앞을 지나가지만 않았어도, 그 녀석이 내 술 먹자는 제안에 응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산다는 건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극적인 우연의 연속이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진이 다 빠져버렸다. 헥헥대는 나를 보며 박헌영은 물었다.
“너 그런데 어쩌다가….”
“나도 몰라, 술 처먹고 필름 끊겼는데 병원이었어. 몸은 이 모양이고.”
나는 한정운과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박헌영은 내가 한정운과 술을 마셨다는 사실도 꽤나 놀라운 것 같았다.
“와, 진짜 미친, 내 친구가 TS발병자라니….”
“왜, 기분 엿같냐?”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 임마! 그냥, 그냥 이딴 일이 진짜로 내 근처에서 일어난다는 게…. 믿을 수가 없네.”
격한 TS찬양론자인 놈은 실제로 나를 보니 그리 신기한 표정만은 아니었다. 그래, 이건 현실이다. 만화나 어느 다른 가상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박헌영은 자신의 책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가 한 말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녀석이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불안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이선준만큼 이 녀석도 나와 지낸 시간이 길다. 서로에 대해서 꽤 알고 있다.
평소에는 유쾌하고, 헛소리가 심하고, 오타쿠 컨셉질을 하지만 그건 전부 자기방어 같은 거였다. 실제로 오타쿠인 건 맞다. 하지만 이 녀석은 항상 본심을 숨기고 사는 녀석이다. 멘탈이 제일 강한 것 같지만 사실 무너지면 이 녀석만큼 우울해지고, 극단적으로 변하는 놈이 없었다. 얼굴은 그나마 괜찮으면서 아직까지 모태솔로인 이유였다. 이 녀석도 글을 쓰고 싶어하는 놈이다. 글 쓰고 싶어하는 놈들 중에 정상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들 어딘가 비틀렸고, 뭔가 결핍된 인간들이다. 그건 우리의 인생에서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라서, 우리들은 서로 그것을 묻지 않는다. 나도 내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선준도, 한정운도 어딘가 비틀려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게 뭔지 모를 뿐이었다.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타인의 아픔을 억지로 들춰내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다.
“미안…. 미안하다….”
“됐어. 니 잘못이겠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육체적 중독에서는 벗어났지만, 정신적 중독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습관은 무섭다. 나도 모르게 주머니를 만져봤다. 담배를 못 피우면 불안하고, 짜증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아직도 ‘어떤 상황에서 담배를 피웠다.’ 라는 습관 자체는 뇌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상황이 되니까 담배가 고프다.
-지이이이잉
“어, 전화! 맞다!”
나는 그제야 한참을 종이가방 속에서 울고 있는 핸드폰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 곧바로 격앙된 이선준의 목소리가 귀를 매섭게 찔렀다.
[야! 너 어디야!]
“어? 어 나 그 건물 뒤편 공원에….”
[뭐, 아무 일 없지?]
“어? 아 나 박헌영이랑 있어.”
[박헌영?]
“어, 가게 앞에서 만나서….”
[그래, 알았다.]
이선준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뭐야, 왜 화를 내는거야?
박헌영은 나를 보더니 물었다.
“선준이 형이야?”
“어.”
“같이 있었어?”
“원래 내 방에서 잣잖아….”
“아아….”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냥 평범한 태도인 것 같은데, 나는 왠지 불안한 느낌이 확 솟았다.
”잠깐, 너, 너 지금 되게 실례되는 생각했지.”
아무리 정도를 지키는 놈이라지만 TS TS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놈이다. 실제로 오타쿠적 취미가 심하고, 야동보다는 망가를 즐겨보는 새끼다. TS관련 망가라고 나한테 추천해준 것들도 꽤 많았다. 이 자식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아니? 무슨 개, 개소리야?”
“왜 말 더듬냐? 어?”
“무, 무슨 개소리야 임마!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거짓말을 잘 못하는 이 자식이 말까지 더듬을 정도면 당연하다. 의도적으로 망상한 건 아니더라도 본능적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딴 쪽에 취미가 없는 나라고 해도 제삼자들이 그런 상황에 있었다고 하면 혹시나 하는 생각은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내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너 진짜 죽어. 죽어!”
내가 녀석에게 공원 근처에 있는 벽돌을 집어들고 달려들자 박헌영은 안색이 진짜로 파랗게 질렸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진짜로 내려칠 생각이다.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소름이 끼쳤다. 녀석이 상상했다는 것을 추측했으니, 나도 같은 상황을 떠올린 탓이었다.
이선준이 내 몸 위로 올라타고, 나는 그 밑에 깔려있는 장면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워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아직 나는 그 정도로 변하지 않았다. 진짜 싫다. 토할 것 같아. 진짜로 토할 것 같아.
나는 녀석에게 달려들다 말고 벽돌을 놓쳤다. 진짜로 속이 메스껍다.
“너, 너 꺼져….”
나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뒷걸음질쳤다. 박헌영은 내가 진짜로 상태가 이상한 것 같자 천천히 일어나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