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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48화 (148/224)

00148 창백한 새벽 =========================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게 중요하다. 너무 피곤하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다.

이선준은 나를 배신한 게 아니었다.

의심하다가 결국은 포기해버렸던 그게 사실이었다. 어떤 사정이 있어서 나를 찾아오지 못하는 거였다.

지금 나는 기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일단 무슨 일이든 결국 풀려나서 나를 찾아와야 하고, 이선준은 결국 자신이 선택할 일의 책임에 대해 실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싫다.

더 이상 마음을 고되게 하는 일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다.

다만, 안심할 뿐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선준을 믿기로 했던 선택은 어리석은 게 아니었다. 그 마음만큼은 진짜였다. 대체 나를 왜 만나러 왔던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결국 그 때문에 진실을 알게 되었다.

진실은 진실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이선준이 돌아온다 해서 의지하고픈 마음은 없다. 나는 그저 혼자 살아갈 뿐이다.

적막하다. 적막하고 적막한 오피스텔의 방 안에서, 나는 다시 우울해진다.

다시 한 번, 희망이 보인다. 이선준이 나를 다시 만나러 오고, 다시 손을 잡는 그런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긴 밤이었다. 길고 긴 밤이었다.

밤은 지나간다. 여명과 함께 새벽이 오듯, 내 삶의 긴 밤도 지나가는 건가?

정말로, 삶이란 것에도 낮과 밤이 있다면….

밤은 지나갑니까? 여명 속에서 나는 새로운 아침을 찾을 수 있습니까?

너무 많은 고통의 시간들이었다. 이제는 제발, 이제는, 이제는 제발 좀.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그 행복은 일단 내 손으로 잡아야만 한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는 그런 생활과 삶의 패턴은 더 이상 겪고 싶지 않다.

나도 안다. 나는 언제나, 삶의 순간순간마다 항상 이율배반적이었다. 어제의 말을 오늘 뒤집고, 일 분 전에 한 선택을 거짓말처럼 바꿔버린다. 일관되게 사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이중잣대를 가지고 산다. 다만 그것이 나쁘다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최소한 내가 나쁘다는 것 정도는 안다. 너무 힘들다.

괴롭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속아넘어가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이선준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미혼모일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TV앞의 테이블 위에는 아기 신발이 포장된 상자가 내가 놓은 모습 그대로 있다. 그걸 보면 의지가 생긴다. 그래서 일부러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았다. 그래도, 힘을 내야만 한다는 어떤 강박이 생긴다.

이선준은 나와 결혼할 수 없다. 부모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그러고 싶지가 않다. 우리는 마치 관성처럼 서로를 갉아먹게 되는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오히려, 긍정적인 미래가 보이기 때문에 더 불행해진다. 그것을 손에 쥐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할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차라리 영원히 끝내버리자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내가 받아내야 하는 스트레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수준은 아니다. 기운을 내야 한다. 나는 너무 고통받았다.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무렵

갑자기 복통이 찾아온다.

“아, 아….”

아랫배를 묵직하게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진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려다가 넘어져 거실 바닥을 구른다.

“아윽…. 아. 아파….”

안돼.

“흐, 흐으….”

아파.

“으, 으으…. 아으.”

안돼. 이런 건 안돼. 이런 건 원하지 않아.

싫어.

“흐으…. 으으으….”

아랫배를 칼로 난도질하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밑이 빠질 것 같은 아찔한 감각 때문에 눈앞이 흐려진다. 정신을 잃을 것 같아. 의식을 놓아버릴 것 같다. 내 생에 이렇게 아픈 적이 없었던 느낌처럼 아프다.

뭔지 모르겠지만.

뭔지 알 것 같아.

“흐으아…. 안돼. 안돼. 안돼…. 싫어.”

나는 핸드폰을 찾고 119에 전화를 건다.

[119상황실입니다.]

“으으…. 으으 아파…. 여, 여기…”

[네, 어디십니까. 말씀하세요.]

“여기 태원시….”

나는 신음을 흘리며 주소를 말한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바닥을 기어서 문으로 다가간다. 죽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아프단 말이야.

나오지 마, 아직 나오지 마. 아니잖아. 지금은 너무 이르잖아. 지금은 아니야. 조금만, 조금만 참아.

“싫어어어어어! 싫어! 싫다고! 안돼! 흐으. 흐으으. 흐흐! 흐흐! 아, 아악! 악!”

나는 악을 쓴다.

다 견딜 거라고 생각한 순간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

아직도 남았던 거야. 아직도 세상은 내가 행복하길 원하지 않아. 아직도 세상은 내가 죽어버리기를 원해. 왜, 왜, 대체 왜 나는 이런 꼴이 되어야만 해?

누가 나를 도와줘.

누가 나를 구해줘.

누가 옆에 있어줘. 나를 데려가 줘. 천국이든 지옥이든 이런 시궁창만도 못한 일을 겪으면서 더 살고 싶지 않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떠나버리고 싶어.

지금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한 명밖에 없다.

박헌영이다. 박헌영밖에 없다.

근처에 살고, 나를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박헌영 하나뿐이다. 나는 핸드폰 연락처에서 박헌영의 번호를 찾아낸다. 손을 덜덜 떨며 그 번호를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싫어.

차라리 죽을래.

나는 그 번호를 보면서 차마 전화를 걸지 못한다. 나는 결국 누르지 못한다.

차라리 죽자. 죽어버리자. 구차하게 또 다시 의지하고 싶지 않아. 이번만큼은, 정말 이번만큼은 말한 대로 살래. 어차피 구급차가 곧 올거야. 박헌영을 불러봐야 달라지는 건 없어. 또 다른 기만의 역사를 쌓게 될 뿐이야.

“아아으윽! 흐으…. 흐으…. 헥, 헥.”

나는 현관으로 기어가 필사적으로 문을 연다. 열린 문틈으로 난 복도에 나는 엎어져 버린다. 누군가 지나갔으면 하는데 아무도 없다. 나는 차갑고 추운 복도에 넘어진 채 고통에 찬 숨을 색색거리며 내뱉는다.

“아아…. 아아….”

안돼, 죽지 마.

여전히 아프다. 뭔가 일어난다.

죽지 마. 나는 죽어도 되지만 너는 죽지 마. 제발. 제발 살아줘 이렇게 부탁할게.

엄마가 이렇게 부탁할게.

착한 엄마가 될 테니까 제발 죽지 마.

더 이상 희망을 잃으며 살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조금만 힘을 내자. 조금만…. 조금만 힘을 내서 살자.

내가 잘할게, 내가 열심히 할게, 이제 와서 가버리면 어떻게 해. 왜 내 모든 결심은 이런 식으로 끝나야 하는데.

“살려줘….. 살려줘요…. 으으. 흐흑. 흐윽…. 사,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목소리는 내 생각대로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에 닿기를 바라지만, 내 목소리는 너무 작다. 내 울음은 너무 작다. 내 몸부림은 너무 연약하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닫힌 문은 단 하나도 열리지 않는다. 눈앞에 새까매진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병원이었다.

온몸이 식은땀 때문에 축축하다. 악몽을 꾼 것 같은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병원 천장에서 일어나는 건, 가장 최근은 일 년 전이다. TS바이러스에 걸려서,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다.

한정운이 옆에 있었고, 내 현실에 대해 담담하게 말해줬다. 사이코패스인 줄 알았던 한정운은 사실 TS바이러스 발병자였다.

나는 병원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빠진다.

아, 차라리 모두 나쁜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다시, 그 일 년 전의 침대 위에서 깨어난 거라면 좋겠다. 이 비슷한 풍경을 본 이후로 진행된 모든 일이 사실은 없었던 일이고, 나는 그저 길고 긴 악몽을 걷다가 이제 막 현실로 돌아온 거였다면 좋겠다.

그래,

그런거야.

사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그저 내 피해의식과 망상이 만들어낸 한 편의 악몽을 꾸다가 돌아온거야. 이제 나는, 다시 평범한 대학교 사학년으로. 취업을 걱정하며 그저 근근이 마지못해 살아가면 되는거야.

누군가 그렇다고 말해줘.

내가 지금 느끼는 아릿한 복통과 공허감이, 그저 긴 추억이 증발해버려서 느끼는 그런 단순한 공허감이라고 말해줘.

그저,

그저 너무 긴 꿈을 꾼 탓에, 그런 탓에 느끼는 허무함이라고 말해줘. 그저 길고 긴 악몽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낫기 때문에, 모든 게 환상이었기 때문에 지금 허무한 거라고 말해주지 않을래?

누군가 그렇게 말해줘요.

아무 말도 듣지 않았지만….

실감이 나.

그 동안 뭔가 있었던 감각은 없었지만,

뭔가 사라져버린 감각은 있어.

“환자분, 정신이 드시나요?”

연분홍색 옷을 입은 간호사가 내 어깨에 손을 살짝 얹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건 없다.

잠깐의 꿈이라는 그런 달콤한 전개는 없다. 나는 잠깐의 착각 속에서 안식을 구걸했지만, 평화는 내게 찾아오지 않는다. 나는 그저 현실로 다시 한 번 내팽개쳐진다.

살아가는 것은 불행의 연속이고

나는 아직 불행하며

맞딱뜨리지 못한 불행이 여전히 나를 삼키려 한다.

하지만 착각일지도 몰라, 이 공허감은 그저 너무 오래 기절해 있던 탓에 느끼는 공복의 다른 이름일지도 몰라. 아직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저 있는 흔한 복통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아직은 아무것도 믿지 말자.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자.

눈앞이 뿌옇다. 간호사가 나가고, 곧 의사를 데려온다. 의사가 나를 쳐다본다.

안돼.

아무 말도 하지 마.

무슨 말이든 해버리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 무슨 말이 되었건, 그게 무슨 일이었건 간에 나는 아무것도 감당할 수가 없어.

이 이상 더 살아갈 자신이 없어.

그냥 착각 속에 살아가게 해줘.

아이가 살아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게 해줘. 아이가 나오지 않아도, 배가 불러오지 않아도 그런 상상을 하면서 살고 싶어. 더 이상 나는 이 가혹한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

가지려 하면 빼앗아 가고, 닿을 것 같으면 멀어져버리고, 결심하면 무너지는 이 가혹한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나는 이제 뭘 더 빼앗겨야만 하는데? 왜 누군가 계획한 것만 같은 이 불행 속에서 끊임없이 굴러가며 고통 속에서 끝내 목숨을 끊지 못하고 살아야만 하는데?

의사가 입을 열기 전까지, 그야말로 영원과 같은 시간 속에서 나는 주마등을 느낀다. 그 순간의, 짧은, 영원과 같은 주마등의 끝에 의사가 입을 연다.

“유산…. 되었습니다.”

의사는 짧게 설명을 했다. 어떤 경위로, 어떻게 유산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했다. 태아는 이미 죽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미, 죽어있었다.

그 말이 주는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다.

의사는 안정을 취하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짤막한 그 설명은 너무 건조하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이지도 않았다. 의사는 일처럼 설명했고 가버렸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혼자만 있는 병실에서.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제 죽여주세요.

이제 그만, 저를 편하게 해주세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제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나요?

저는 그냥, 열심히 살아보려고 발버둥쳤을 뿐이에요.

어떻게든 살겠다고 힘을 내본게 그렇게 죄였나요?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죽지 않고 아득바득 살아보려고, 받아들이려고 한 제 행동이 누구의 심기를 그렇게 거스른 건가요?

나는 왜

나는 왜.

이 긴 밤의 끝에서 왜 창백하게 얼어붙은 새벽을 맞이해야 하나요?

왜 나는 이 긴 겨울을 지새면서, 낮과 밤, 여명과 황혼이 모두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는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건가요.

이제는 그만 편하게 해주세요.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왜 나는 항상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매일 속에서 무엇이든 움켜쥐려 발버둥쳐야만 하나요.

이런 나를 보는게 재미있나요?

이런 나를 원하나요?

이런 나를 보면서 대체 무엇을 느끼고 싶은 거에요?

결국 제가 견딜 수 없는 불행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게 되면, 저를 손가락질하실 건가요.

나에 대해 설명하는 건 간단하다.

임신했고,

유산했다.

그 두 단어의 간극 사이에 내가 했던 고민과, 다짐과 결심과 같은 것은 결국 모두 증발해버린다. 나는 그저 그 두 단어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비참한 사람일 뿐이다.

아아, 불행은

불행은

이 삶은

내 삶은

이겨내기에는 너무 가혹하고

견뎌내기에는 지나치게 악의적이며

살아내기에는 너무나 절망적이다.

그만 빼앗아가세요.

그렇게나 원하시는 저를 이제 스스로 바칠게요.

============================ 작품 후기 ============================

완결까지 쓰면서 얼마나 우럿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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