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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47화 (147/224)

00147 밤은 지나갑니까? =========================

“저는 그 모든 요구를 죄책감 때문에 그냥 받아들였을 뿐이에요. 말하신 것처럼 저는 잘못을 했어요. 그래서 그 잘못에 대해서 책임지려고 그 모든 말도 안 되는 행동을 받아들인 거에요.”

나는 주먹을 꼭 쥔 채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누가 비상식적인 거에요? 물론, 저는 비상식적이에요. 상식적인 사람이면 그런 사람, 경찰에 신고하겠죠.”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더니, 모든 사건의 원흉이 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자기 편하게 생각하는 건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나도 그런 것처럼.

“이선준은 저를 때리기도 했어요. 제가 기절할 정도로 저를 괴롭혔어요. 그건 폭행이에요. 저는 경찰에 신고 안 했어요. 제가 비상식적인 건 그거 하나에요. 등신처럼 그런 걸 다 참고 지냈다는 거. 그거 하나요. 저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들이 범죄자가 되지 않은 건 순전히 내 덕분이다. 그 사람은 할 말을 잊은 채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원래 또 사람이란 역시 그렇다.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입술을 깨물고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이 사람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래…. 내가 미안하다. 이럴 생각으로 온 건 아닌데…. 그냥, 그냥 잘 지내나 확인하러 온 건데…. 나도 솔직히 쌓인 게 좀 있었어. 너 원망도 많이 했고. 선준이가 그렇게 되어서…. 전부 네 탓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들이 폐인이 된 이유가 여자 때문이라면, 당연하게도 그 여자를 증오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무엇보다 더 나를 겁박하려 들지 않아서 나는 조금 놀랐다.

“어쨌든,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혹시나 돈봉투라도 주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건 없는 모양이다. 얼굴에 집어던지며 이까짓 것 필요 없다는 대사 한 번 정도는 해보고 싶었는데.

“너도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 수 있을거야…. 행복하게 지내렴.”

그리고 그 말 때문에, 나는 지금껏 했던 모든 추측이 들어맞는 것을 느낀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재미있나 봐요?”

“응? 무슨 말이니?”

나는 당장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른 채 씹어뱉듯 말한다.

“죄책감 같은 건 없어요?”

“죄책감이라니?”

일어나려다가 그 사람은 내 말에 다시 자리에 앉는다. 나는 메신저를 켜고, 내게 온 메시지를 들이민다.

“이거, 당신이 보낸 거잖아….”

[나 결혼한다.]

[오늘 아침 비행기 타고 정희랑 같이 미국으로 떠나.]

[현실적으로 너랑 같이 사는 거 힘들다는 거 알잖아.]

[미안하다. 행복하렴.]

분노 때문에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다. 그 사람은 내 말에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나는 도저히 분을 참지 못해서 덜덜 떨면서 말한다. 어제까지는 추측에 불과했고, 방금 전까지는 어렴풋이 한 확신이었고, 마지막 말을 듣자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행복하렴

이런 어미, 이선준은 쓰지 않는다. 이미 경악한 모습만 봐도 나는 내 모든 생각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미있어…? 정말…. 무슨 낯짝으로 나를 만나러 온거야?”

내가 빠진 것이 이선준의 단순한 음모였다면 뭔가 어정쩡하다.

나를 완전히 파괴시키려고 했으면, 이런 가벼운 핸드폰 메시지가 아니라 직접 나를 만나서 갈기갈기 찢어버려야 했다. 나를 절망하게 만들고, 나를 조각내 버리면서 비웃었을 것이다. 이선준이 여전히 미친놈이었다면 그래야 했다.

이선준이 나를 다시 만났다는 것을 부모에게 말했을 이유가 없다. 모르는 편이 이선준에게 더 편리하다. 그런데 굳이 부모에게 말하고, 알게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고?

그 이후에 만약 말했다고 치자.

내가 이선준이 미국에 있다는 걸 안다는 뉘앙스를 풍겼을 때, 이 사람은 그것에 대해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물론, 잘 해결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결국 내 말과 행동은 결국 억측과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사람의 태도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된다. 내 떠보는 듯한 한 마디에 당황하고 경악했다. 마치 들켜버렸다는 것을 온 몸으로 광고하듯. 누구나 연기에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의 말과 말 사이에 있는 간극으로 그 사람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에 익숙하다.

나는 민감하고 신경질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거짓말 알아채는 거,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선준의 행동에는 어떤 강압이 있었다. 실제로 미국에 있는지 어떤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 그….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구나.”

그 사람은 질린 얼굴로 뭔가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거칠게 잘라버린다.

“무슨 오해? 당신들이 어떤 미친 짓을 했는지는 몰라, 하지만 그런 주제에 나한테 상식이니 뭐니 하면서 헛소리 지껄이는 거 말이 된다고 생각해? 상식? 상식이라고?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나는 몸을 부들부들 떤다.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건 말건 나는 외친다.

“내가 모르면 당신들이 무슨 잘못을 했건 그 따위 말 지껄일 수 있는거야? 양심이라는 게 단 한 조각도 없어? 더러운 위선자 새끼들! 현실이니 뭐니 지껄이면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짓밟아 버리면서 합리화나 하는 더러운 개새끼들!”

“너, 너 무슨 말을 그렇게!”

“맞잖아! 틀려? 틀리냐고!”

“그, 그런 방법밖에 없다는 걸 모르니? 내, 내가 바보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한테 내가 무슨 말을…. 그러면 네가 먼저 잘못 해놓고 이제 와서 내가 잘못했다는거니? 원이 너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너만 생각해? 선준이 미래를 좀 생각해 봐! 약혼을 안 했으면 몰라. 다 정해졌는데 네가 끼어들어서 이렇게 된 거잖니!”

그 사람은 결국 인정해버린다. 나를 멸시하듯 그런 말을 내뱉어버린다. 뭐가 되었든, 인정해버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역겹다.

“그래 알아! 내가 떳떳할 이유 없는 거 알아! 그런데 당신은 그딴 막되먹은 짓거리 해놓고 나한테 상식 운운해? 미쳤어? 말했던 것처럼 나는 잘못한 거 없어! 그냥 하자는 대로 한 거라고!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 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면서 나한테 그런 걸 요구했는데 그러면 어떡하라고! 이게 내 잘못이야? 너는 약혼자가 있으니까 이런 짓 하지 말라고 내가 말 안 한줄 알아?”

나는 악에 받쳐 소리친다. 그 사람은 나를 노려보며 소리친다.

“그게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짓인 거 모르니? 아직 사회생활 별로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선준이가 지금 죄송합니다 하면 끝나는 상황인 줄 알아? 생각을 좀 했어야지! 사랑 놀음 하기에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몰라?”

이런 씨발.

“현실이 대체 어디에 있는데!”

나는 몸을 덜덜 떨며 말한다.

“현실이라는 건 없어! 그런 건 그냥 당신들이 만들어낸 허위일 뿐이야! 너희들이 하는 모든 나쁘고 못된 짓 정당화하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일 뿐이잖아! 나쁜 건 그냥 나쁜거야! 그걸 인정 못 하고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하려고 하는 그 글러 처먹은 태도가 역겹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사람은 지금 주목받는 상태가 수치스러운지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다.

“잘 해. 이선준이 뭘 할지는 모르겠어…. 그런데, 그런데 있잖아…. 나, 나는 그렇게 생각해. 이젠 다 늦어버렸어. 이선준이 미국에 있는지 어떤지 나는 몰라….”

나는 이를 악물고 내 다른 불행을 만들어낸 사람을 노려본다.

“이미 늦어버린 주제에 이선준이랑 다시 만나려고 했던 건 옳지 못한 일이야.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당신들 선택 잘 해….”

이선준이 만약 내게 복수를 한 게 아니었다면.

“만약, 이선준이 나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라. 당신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강제적으로 이선준을 그렇게 하도록 만든 거라면 말이야.”

나는 폭발해서 전부 때려부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말한다.

“이선준은 진짜로 자살해버릴거야…. 사람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야. 이미 실패해 봤으면서, 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고 해? 그래,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이선준이 학생운동을 하는 것도 막지 못해 인연을 끊고 살았으면서, 이미 한 번 괴로워하는 모습을 봤던 주제에 또 무언가를 강제하고 있다.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나는 그 사람을 보며 결국 분에 차서 눈물을 흘린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울분에 차서 말한다.

“우리는…. 우리는 제대로 헤어져야만 해….”

“…….”

“이대로 끝나면 불행해지는 건 당신 아들이야.”

나는 이제 아무것도 기대하고 원하지 않는다.

다만, 완전한 이별을 하고 싶다. 깔끔한 결말은 아니더라도, 완전한 결말을 맞이하고 싶다. 그 사람은 두려움과, 당황과, 공포가 얽힌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벌떡 일어난다.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아. 이선준이 한 게 배신이든, 당신들 때문에 억지로 생긴 일이든 간에 똑같아.”

나는 그 사람을 지나치며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제 아무 미련도 없어.”

카페를 나선다. 추운 겨울의 바람이 내 살갗을 찢어버릴 듯 몰아친다. 말라붙은 눈물자욱을 소매로 닦아내고, 나는 코트 깃을 여미며 집으로 돌아간다.

하늘이 흐리다.

============================ 작품 후기 ============================

부스터 달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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