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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46화 (146/224)

00146 밤은 지나갑니까? =========================

한참을 달리고 달려서, 한밤중이 되어서야 나는 오피스텔에 도착한다. 운전을 너무 오래 한 탓에 지치고 피곤하다. 어서 쉬고 싶은 생각만 가득하다. 너무 무리하는 건 안 좋은데.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

[설원씨 휴대폰 맞나요?]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불현듯 불안한 예감이 든다. 누가 내게 이런 문자를 보낼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답장을 보낸다.

[맞는데 누구세요?]

답장을 하기가 무섭게 전화가 온다.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약간 갈라진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원아, 오랜만이야.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가물가물하지만, 기억이 날 것도 같은 목소리다.

[선준이 엄마야.]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는다. 나와 할 얘기? 그런 게 왜 있다는 걸까. 잠깐 대화를 나눈 뒤, 전화를 끊는다.

나는 소파에 가만히 앉는다.

“흐흐….”

웃는다.

“흐흐, 흐흐흐흐…..”

미친 사람처럼 웃는다.

“흐. 흐흐. 흑…. 으윽….”

그리고 운다.

“으으윽…. 흐윽…. 으우. 우우….”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울어낸다.

다음 날, 나는 인근의 카페에 왔다.

생각해 보면, 이선준의 부모님으로 인해 찍은 사진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 불안한 관계가 조금은 더 오래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진과 그 입맞춤 때문에 모든 감정이 폭발해버렸다.

그것은 물론 방아쇠에 불과했다. 그 사건에 한해서 이선준의 부모는 책임이 없다.

그저, 그런 인과가 있을 뿐이다.

만나도 될 일이고, 만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이선준의 부모에게 나는 전 여자친구인 동시에, 파혼을 유발할 뻔한 암세포 같은 것이다. 나를 싫어하면 싫어했지,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나를 만나서, 대체 무슨 할 얘기가 있다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스턴건도 챙겨왔다. 무슨 짓인가 하려고 하면, 전부 지져버릴 것이다.

피의 복수 같은 걸 할만한 깜냥은 없다. 하지만 내 몸을 지킬 수는 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은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제 이선준이 결혼하기로 했으니 나에 대한 관심 같은 건 없어졌을 것이다.

변명이 있다면 들어보고, 비난을 한다면 얼굴에 커피를 끼얹어 주겠다. 그 정도 악은 남아있다. 어찌보면 그 부모들도 피해자다. 사실, 피해자 아닌 이들이 세상에 있기나 한가?

종소리와 함께 카페에 잘 차려입은 중년 여성이 들어온다. 알고 있는 얼굴이다. 이선준의 어머니. 곱게 늙은 중년 여자는 우리 엄마와는 하늘과 땅 차이만한 어떤 갭이 느껴진다. 세련되었고, 기품이 있다.

말을 함부로 하지도 않고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다. 내가 헤어지고, 일 주일만에 이선준에게 맞선을 보라 얘기했다고 한다. 현실 논리가 지배하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승리한 사람이다. 아마 날 때부터 승리했을 것이고, 계속 승리해왔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잣대가 된 사람이다.

사람은 보이는 것처럼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것처럼 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웃으며 인사할 수는 없다. 이선준의 엄마,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 그 사람은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는다.

“아, 그래…. 오랜만이네 원아.”

그 사람이 나를 뭐라고 부르든 신경쓸 건 없다. 처음 만났을 때, 이 사람은 나를 어려워했다. 아들의 여자친구를 보며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쩔 줄 몰라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때의 어려움과 지금의 어려움은 다르다.

“잘 지냈어?”

“아뇨.”

나는 딱 잘라 말한다. 나는 그 사람을 무심하게 쳐다보며 말한다.

“잘 못 지냈어요.”

내가 떳떳할 이유는 없다. 나는 아들이 약혼녀를 버려두고 바람을 피웠던 대상이다. 이 사람은 나를 헐뜯고, 꾸짖고, 미워해도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단 한 톨의 죄책감도 없다. 나는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본다.

“커피 시켜놨어요. 이거 드세요.”

나는 미리 시켜놓은 더치커피를 앞으로 밀어놓는다.

“아, 아…. 그래. 고맙구나.”

입에 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따뜻한 커피를 양손으로 꼭 쥐고 있다. 겁을 먹은 것 같은 표정이다. 키도 작고, 큰 눈망울은 본성이 선한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궁금한 걸 묻는다.

“이선준은 잘 지내요?”

내가 직접적으로 물어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지 움찔거리며 당황한다.

“아…. 그럼.”

“음, 하긴. 영어도 원래 잘 했으니까요.”

“응, 그렇지….”

그 사람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나는 왈칵 화가 나지만, 조용히 커피를 마신다. 미국이라.

미국 좋지.

씨팔.

“무슨 일로 보고 싶다고 하신 거에요?”

내가 묻자 그 사람은 눈을 잠시 아래로 내리깔고 있다가 나를 바라본다.

“그냥…. 네 얘기 듣고 나니까 잘 지내나…. 걱정이 되어서 그랬지.”

고양이가 쥐를 걱정하는 건가.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온다. 나를 걱정해야만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하나 있다면 그저 나라는 사람에 대한 혐오밖에 없어야 한다. 내가 이선준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말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막장드라마에서나 나오듯, 나를 납치해서 강제로 중절 수술이라도 하려고 할까? 아니면 내 양육권을 강제로 빼앗으려고 할까? 그런 이야기들이 어디까지 현실에 있는건지 나는 모른다.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 아이일 뿐이다. 그 누구도 내게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이러저러하게 되었으니 책임지라는 말 같은 건 할 생각이 없다. 내 삶은 내 것이다.

더 이상 누구에게 양도하거나 의지할 생각은 없다.

“보다시피 저 잘 지내요. 직장도 있고. 용건 끝났으면 가세요.”

내 말에, 결국 그 사람은 살짝 미간을 좁힌다.

“원이 너…. 왜 그러니?”

“뭐가요?”

나는 마주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다. 그 사람은 점점 기가 차다는 듯 손을 떤다.

“너…. 왜 그렇게 당당하니?”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어요?”

내가 마주 말하자 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미소가 사라진다. 나는 공격적이다. 그리고 직설적이다. 나는 내 마음을 여과없이 쏟아낸다.

“너, 너…. 너 때문에 선준이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알고 그러는 거니? 걔가…. 걔가 네가 멋대로 사라져버려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아?”

“네, 알아요.”

“알면, 선준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면 부모 속이 얼마나 썩어들어갔을지도 생각했어야 하는 거 아니니? 대체, 대체…. 너….”

그 사람은 잠시 숨을 고르고 나를 노려본다.

“뭘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거야?”

이선준은 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다. 자살시도도 한 모양이고 폐인처럼 지내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도망친 것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못 타당한 그 말에, 나는 살며시 웃는다.

“저는 죗값 다 치렀어요.”

“뭐, 뭐라고?”

“제가 잘못한 건 알아요. 저는 나쁜 짓을 했어요. 도망쳤어요. 하지만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해야 할 만큼 했어요.”

이선준의 요구사항을 전부 들어줬다. 박헌영을 만나지 말라고 해서 절교했다. 나와 섹스 파트너 같은 관계를 원한다고 해서 해줬다. 용서해 달라고 빌어서 용서해줬다. 나는 이선준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한 치의 거부도 하지 않고 들어줬다.

끝끝내 나는 임신까지 해버렸지만, 그 또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법적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그냥 보내줬다.

이런 내게, 더 이상의 죄를 묻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나는 잘못했지만,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 충분하고 차고 넘칠 정도로 받아버렸다.

그러니 이선준의 부모님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

“그러니까…. 저는 이제 잘못한 거 없어요.”

“너…. 이런 앤 줄 몰랐는데…. 진짜 뻔뻔하구나.”

고운 얼굴에 분노가 어린다.

“너, 네가 상식적인 애면 약혼자 있는 애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은 못 했어?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약혼까지 한 애를 파혼 직전까지 몰고가니? 네가 상식이 있으면 그냥 적당히 거리를 둬야 하는 거 아니니?”

“상식이라니…. 무슨 소리세요?”

나는 기가 차서 이를 악문다.

“제게 비상식적인 관계를 요구한 건 이선준이에요. 약혼자가 있어도 그냥 평범하게 섹스 파트너로 지내자고 한 것도 이선준이에요. 제가 너무 아파서 못 하겠다고 말하니까 입으로 하라고 했던 것도 이선준이에요. 저를 무슨 물건 취급하면서 사람도 못 만나게 한 것도 이선준이에요.”

나는 어른과의 대화에 지켜야 할 예의 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한 채 그 사람을 노려보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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