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2 밤은 지나갑니까? =========================
결국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민감해진 탓에 향이 강한 음식은 도저히 못 먹는다. 밤이 되기 전에 숙소를 잡고, 모텔에 들어와 씻는다. 체형이 달라진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내 몸은 그대로다.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폭력적인 섹스를 했는데, 내 몸은 여전히 하얗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여전히 매력적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손 대지 않았던 것 같은 모습이다. 보이는 것만 중요하듯, 나는 임신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외모만 보면, 여고생이라고 말해도 누구나 믿지 않을까?
취미생활 같은 걸 해볼까?
독서 모임이라거나, 누구든 사람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눠볼까?
너무 낡고 오래된 인간관계에 집착한 나머지, 새로운 관계를 만들지 않아서 생겨버린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별로 그러고픈 마음이 안 든다.
관계란 고통이고, 상처만 남겨버린다.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고 나와서 침대에 앉는다. TV를 켜고, 멍하니 앉아있는다. 해가 짧은 탓에 이미 저물어 버렸다. 모텔에서 자는 건 솔직히 무섭다. 모텔에 있다가 누군가가 들어온 걸 경험한 적은 없지만, 어두침침한 모텔 복도는 지나갈 때마다 뒷목이 서늘해진다.
옆방에서 섹스를 하는 건지 숨가쁜 소리가 들려온다. 방음도 안 되는 싸구려 모텔이다. 영수증 끊어 달라고 했을 때 카운터에 앉은 사람 표정이 상당히 띠꺼웠다.
골방에서, 누군가가 섹스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멍하니 TV를 본다. 볼륨을 조금 더 올리고, 왁자한 예능을 틀어놓자 그 소리는 안 들린다. 이선준과 했던 폭력적인 섹스보다. 내게 사랑을 속삭이며 했던 그 잠자리가 더욱 지독한 기억이 되었다.
끔찍하다.
-지이이잉
전화가 온다. 번호를 보니 누구인지 대충 알 것 같다.
“여보세요.”
[어, 누나. 저에요.]
“아, 응…. 오랜만이네.”
한정운이다. 일과가 끝났을 시간이니, 전화도 할 수 있었을 거다. 힘든 일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잘 지내세요?]
잠깐 울컥한다. 말해버릴까, 누구에게라도 털어놔 버릴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도 군대를 갔다왔기 때문에 잘 안다.
군대 안에서 어떤 심각한 일을 들어버리면, 며칠동안 그 생각밖에 안 난다. 그리고 나갈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저주하게 된다. 그 시간만큼 괴로운 건 없다. 무력감과 패배감과 분노가 들끓는 그 시간들을 나는 알고 있다.
안 그래도 자기 일 때문에 서러운 한정운이다. 위로 한 조각 얻어내자고 더 큰 부담을 지게 할 필요는 없다. 착한 녀석이라서, 말하기 싫다. 침착하는거다. 행복한 사람을 연기하는거다. 걱정하지 않도록.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어, 뭐 잘 지내지. 너는?”
[네? 아…. 저도 괜찮아요.]
“그 일은…. 잘 해결됐어?”
[음….]
그 말만으로도 알게 되는 게 있다. 뭔가 문제가 있구나. 목소리 톤이 한 층 낮아진다. 한정운은 잠깐의 텀을 두고 말한다.
[아, 잘 해결됐어요.]
그럴리가 없다는 걸 알아. 너 아직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구나. 군대라는 건, 무슨 일이든 깔끔하게 처리하는 곳이 아니야.
한정운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그 사람 전출가고, 비밀 유지도 됐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 응…. 다행이네.”
자기 기밀도 못 지키는 군대가, 네 비밀을 지켜줬을리가 없잖아. 한정운의 말이 거짓이라는 건 알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는다. 내가 걱정할까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짐작된다.
[선임들도 잘 해주고….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계속 듣게 되면, 오히려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별 일은 없고요?]
한정운이 다시 물어온다. 자기 걱정은 말고, 너부터 무슨 일 없는지 말해보라는 거다. 하지만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행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네가 필요없을 정도로 나는 행복해.
그런 태도를 취해야겠다. 한정운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웃으면서 말한다.
“음…. 있긴 있었는데.”
최대한 밝은 목소리가 되길 애쓰면서 말한다.
“이선준이랑 화해했어.”
[아….]
버려졌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울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너 만났던 그 날 이후부터…. 괴롭히지도 않고, 잘 해줘.”
날 버리고 어딘가로 가버렸어.
“나…. 연애 하는 거 같아. 걔랑”
[것 같아는 뭐에요?]
“그, 그냥 좀 부끄러워서….”
[하, 참….]
나 임신했어.
“그래서…. 나 지금 행복해. 이런 기분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불행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불행해.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한정운은 질투나 실망감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순수하게 다행이라고 말해준다. 너는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까?
아마 알거다.
내가 네 거짓말을 눈치챈 것처럼, 너도 내 거짓말을 알겠지.
하지만 우리 둘 다. 서로의 거짓을 들추지 않는다. 서로의 불행이, 결국 서로를 더욱 불행하게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울지 않는다. 울음기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생각해도 내 스스로가 기분이 좋은 것처럼.
“너, 잘 할 거야. 힘내.”
[누나도 잘 할 수 있어요. 아, 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응, 그래. 잘 지내고 또 전화 해.”
[네 누나.]
전화가 끊어지고,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줄수조차 없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느끼는 연민 때문에, 그 말들이 결국 괴로움이 될 뿐이라는 걸 안다.
우리는 불행하면서, 행복하다는 말로 서로를 기만한다. 전화를 끊자, 여전히 옆방에서 섹스하는 소리가 시끄럽다. 한정운도 그 소리를 들었겠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썩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TV도 시끄럽고, 옆방도 시끄럽다. 나는 비좁은 모텔 방에서 웅크린 채 가만히 있는다. 불을 꺼버린 탓에 어둡고, TV의 불빛만 깜빡거리고 있다.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불행을 안고, 나는 조용히 썩어가고 있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흐흑….”
누군가와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때문에 지금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이 더욱 크다. 실감하게 된다.
외롭다.
기사는 결국 가짜로 써버렸다. 먹지도 않았으면서, 결국 그 식당에 다시 가서 인터뷰를 했다. 어쨌든 일이다. 하기 싫다고 해서 안 할 수는 없다. 다음 날, 집에 돌아가서 기사를 작성한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하려고 하니까 의외로 금방 된다. 장인 정신 같은 건 없다. 그저 빨리 해치워 버리고 멍이나 때리기 위해서 얼른 완성해버렸다.
기운이 없고, 감기몸살 기운 같은 걸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게 이상할 정도인 생활인 만큼, 감내해야 한다. 안 받고 싶어도 문득 찾아오는 충동적인 생각에 빠져버리면 머리가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산책이나 해볼까, 아냐, 춥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두문불출하는 날들이 잦아진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기획회의를 비롯한 회의 자리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해해주는 모양이다. 좋은 사람들과 일하게 된 것만큼은 확실하다. 친해질 생각이 내 쪽에서 들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그러던 날들이다.
그저 아교풀 같은 우울감에 빠져서 이러다가 언젠가 숨이 막혀서 죽지 않을까 싶다.
언제는 족발이 먹고 싶어서 한밤중에 배가 터질 지경이 될 때까지 먹어버리고, 하루 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울고, 울고, 또 울다가 잠들어버리는 날도 있었다. 마치 짐승이 되어버린 것 같다.
몸에 곰팡이가 피어버리지나 않을까 싶어서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영화를 보자. 영화 보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뭐든지 움직여보고 싶다. 샤워를 하고,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간다. 차를 타고 운전을 한다. 어쩐지 낯설다.
집 밖으로 나오는 게 너무 오랜만인 것 같다. 마음이 내키면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좀 먹자. 우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너무 우울하게만 살 필요는 없으니까.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끼면서 살 필요도 없잖아.
어떤 영화를 볼지도 생각해놓지 않았으면서, 그저 영화관으로 간다. 태원에서 가장 큰 멀티플렉스에 가서 차를 주차하고 내린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영화를 보러 여기로 가장 자주 왔다. 마지막으로 왔을 때가 기억난다.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다.
박헌영과 왔었다.
이 근처에서 옷을 사고, 영화를 같이 보다가 박헌영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오다가 이선준과 마주쳤다.
생각해 보면, 이미 그 때 시선을 교차하면서 우리 셋이 찢어지게 될 거라는 사실이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선준은 애써 태연한 척을 했고, 뭔가 찔리는 것처럼 얼어있는 나를 다독여줬으며, 박헌영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부끄럽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건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