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1 밤은 지나갑니까? =========================
차를 타고 순천에 왔다. 순천만과 갈대밭이 12월호의 주제다. 운전하고 오는 게 엄청 힘들었다. 너무 멀잖아.
결국 살아야겠기에 일을 하고, 뭐든 잊어버려야겠기에 일 생각을 한다. 아마 만삭이 되면 이렇게 돌아다닐 수도 없을 것이다. 그 때가 된다면 숨길 수도 없을거다.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 당장 내일도 모르겠는데, 몇 달 뒤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 때까지 목 안 매달고 살아있을지도 모르겠어.
남쪽 끄트머리라 해도 일단 겨울은 겨울인지라 춥다. 스웨터에 롱코트, 그리고 청바지를 입었다. 임신 중에 꽉 끼는 옷은 안 좋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직 잘 실감이 안 난다. 정말로, 아무 느낌도 없다. 그냥 거짓말 같다.
목도리를 여미면서 사진을 찍는다. 사람은 꽤 많다. 손 잡고 걸어다니는 연인들과, 여성으로 이뤄진 여행객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든다.
외롭네.
내가 외로운 것도 있지만, 겨울의 바다는 아무리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도 외로워 보인다. 그 너른 갯벌을 보고 있으면, 그저 외롭다는 생각만 든다.
내 불행은 그저 내 불행이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도 있을테고, 나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기구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은 온전히 내가 느끼는 것이고, 각각의 불행은 그 개인에게 절박한 문제다. 남이 나보다 불행하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지지 않는다. 그저 누구나 힘든 것처럼 나도 힘든 것이다.
누구든 견디기 힘들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 나도 내가 불행하다고 소리치고 울 자격이 있다. 이 세상 누구나, 힘들어한다고 해서 그게 나쁜 건 아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천천히 걸어다닌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따금 나를 쳐다본다.
‘진짜 예쁘다.’
‘부럽다.’
중얼거리는 소리들도 들려온다. 나는 목도리를 고쳐 매 얼굴을 반쯤 가린다. 그런다고 해서 시선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런 시선들에는 이제 익숙하다. 나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 나는 예쁘다.
하지만 나는 이 외모 때문에 불행해졌어. 조금이라도 못났다면, 누군가 나를 좋아하지는 않았겠지. 외모가 전부인 세상이니까. 외모만 보고 판단하고, 외모를 먼저 보고 마음을 나중에 판단하는 세상이니까.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 같은 건 없었겠지.
예쁜 건 좋지만,
예뻐서 불행했다.
예쁘다니,
기만적이고 이율배반적이고, 나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모자란 단어다.
임신한 여자.
남편도 없이, 연인도 없이 임신해버린 여자.
혼자서 출산하고, 혼자서 육아를 하고, 혼자서 성장한 자식에게 죄의식을 느끼겠지.
이런 엄마라서 미안하다는 말도 해야 될거다. 아빠 없이 자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해야겠지.
다가올 인생의 어느 먼 지점을 짚어봐도, 까마득한 불행만 보일 뿐이다. 한 살, 두 살, 다섯 살, 열 살, 스무 살이 될 내 아이를 생각해보면….
모든 게 부담이 될 뿐이다. 나를 비난하고 비뚤어지는 아이를 보며 불행하다고 한탄하겠지.
차라리 아들이기를.
나처럼 예쁜 딸아이가 아니기를 원한다.
예뻐서 행복할지도 모르지만, 예뻐서 불행할지도 모르니까. 남자로도 살아봤고, 여자로 살고 있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남자가 차라리 낫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은 차라리 남자인 편이 낫다. 매달 생리 하면서 고통에 몸을 비틀고, 아이까지 낳아야 하는 여자는 근본적으로 불평등에 노출되어 있다. 결국, 이선준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은 채 떠나갔다. 그리고 나는 책임져야 할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
내 불행은 여자라서 그랬던 건 아니다. 다만,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기타 사회적, 문화적, 남성적 사고관이든 뭐든, 여성에 대한 대상화고 나발이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여자는 불행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지금처럼, 나처럼 한 번의 실수와, 한 번의 잘못된 믿음이 불러오는 대가가 너무 크다. 남자라면 그저 침이나 한 번 뱉어버리면 된다. 그러니까….
잘생겼든 못생겼든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딸을 보면 울어버릴 것 같다. 그 아이가 살아내야 할 세상에 어떤 못된 손길과 악의적인 장난이 끼쳐올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
그러니까 아들이었으면.
많이 사랑해주고 예뻐해줄게. 내가 받고 주지 못했던 사랑 다 너한테 줄 테니까.
그래, 딸이라도…. 어쩔 수 있겠니. 원래 선택권이라는 건 없다. 성별도, 외모도, 인종도, 부모도 선택할 수 없다.
모든 탄생은 타의적이다. 선택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어간다. 선택이란 결국 기만에 불과하다. 그런 건 세상에 없다. 그저 주어진 조건 안에서 발악하며 살아갈 뿐이다.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몇 없다. 그저, 딸이든 아들이든 좋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닌 걸 알면서. 나는 문득 배를 쓰다듬는다.
사랑해줄게
네 탓 하지 않을 테니까.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다는 말 하지 않을 테니까.
무사히 태어나줘.
사랑해줄게.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 주고 싶었던 사랑 전부 줄 테니까.
나를 원망하지 말고 자라줘.
엄마가 된다는 건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하지만, 결심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거기에 다가선 기분이 된다. 계속 말했던 것처럼,
나는 버려졌다.
태어나면서 한 번 버려졌다.
내 부모는 나를 왜 버렸던 걸까.
이제는 잊어버렸던 의문을 다시 꺼내든다. 나는 이선준에게 버려지기 전에, 이미 오래 전에 태어나면서부터 버려졌다.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건가. 나는 결국 버려지는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예언이라도 하듯, 시작부터 버려졌다. 부모가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저 그들만의 불행을 어디선가 살았고 죽었거나, 지금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는 안 해, 내가 겪었던 불행을 내 아이에게 대물림하지 않을거야. 나는 지독하게 살아남을 거야.
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가 다가온다.
“저기요….”
나는 말없이 말을 걸어온 쪽을 바라본다. 남자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바빠요.”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을 거절하고 돌아간다. 저런 사람들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첫 눈에 반한 사람을 지금껏 몇 번이나 봐왔다. 그들의 감정이 그저 내 감정이 아닐 뿐이다. 씨발년이 더럽게 튕긴다고 욕을 하는 취객도 있었고, 그냥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무리를 지어서 나를 협박하던 사람도 있었다.
세상은 넓고, 미친놈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 놈들이 내게 꼬일 뿐이다. 이번에 만난 남자는 나를 따라오거나 그러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한 번 자줄 테니까, 내 아이를 같이 키워주지 않을래?
그런 말을 하면 무슨 소리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아주 웃긴다. 창녀가 되어버릴까. 의미상의 창녀가 아닌, 진짜로 몸을 팔고 돈을 받는 직업여성이 되면 어떨까?
실없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거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을 거면서.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비관적인 생각들만으로도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
배가 고프다. 밥을 먹어야겠다.
밥은 순천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벌교에서 먹기로 했다. 꼬막이 유명한 만큼, 이번 기사에는 꼬막 맛집을 소개하기로 한 탓이다. 지역 맛집으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밥때가 지나고 평일이라 그런지 한적하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메뉴를 주문한다.
혼자 밥을 먹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다만 나는 주목을 쉽게 받는다.
타지에 혼자 와서 밥을 먹는 여자라고 하면, 다들 나를 사연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연이야 누구나 있는 거지만,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나는 완벽할 정도로 사연 있는 여자다.
임신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천천히 밥술을 뜨다가, 꼬막무침을 하나 입에 넣는다.
“웁….”
비려. 엄청 비리다.
나 원래 비린 거 잘 먹는데….
나는 사장이 쳐다보는데도 불구하고 고막을 뱉어버리고 화장실로 뛰어간다.
“우욱! 으…. 으으….”
도저히 못 먹겠다. 진짜로 못 먹겠어.
이게 입덧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평소에는 아무 문제 없이 잘 먹던 걸 못 먹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가씨, 괜찮아?”
내가 계속 헛구역질을 하자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이 내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온다. 내 지치고 열에 들뜬 표정을 본 그 사람은 나를 보며 혀를 찬다.
“입덧 하는가보네….”
대체 어떻게 안 건가 싶지만, 나는 부정할 생각도 없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내 모습과 표정을 보며 입을 다문다.
벌교 사람도 아닌 것 같은 여자가 남편도 없이 혼자서 왔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생각할 것이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 내가 못 먹고 뱉은 꼬막을 본다. 보기만 해도 다시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도저히 못 먹겠다. 인터뷰고 뭐고, 나중에 하자. 지금은 안된다.
“어이구…. 괜찮아?”
“아, 네…. 죄송해요.”
나는 계산을 마치고, 채 먹지도 못한 채 가게를 나온다. 취재는 무리다. 생각만 해도 울렁거린다.
“흐흐….”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웃으면서 차에 탄다. 시동도 걸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는다. 입덧이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정말 이게 뭐야. 그저 텔레비전에서 클리셰로 나오는 걸 볼 때에도, 그런 게 내게 찾아오리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대체 어느 남자가 임신하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하고 살아?
아직도 더 겪어야 할 게 남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인생은 정말 아름다워.
앞으로 겪어갈 모든 상황도 생각지 못했던 일들 투성이일거다.
만약 불행했던 만큼 행복해진다면, 내가 이 날들을 견뎌내서 얻을 행복은 엄청나겠지. 그런 망상이나 하고 있는게 지금의 나다. 그런 건 없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건 개소리야.
고생 끝에는 고생밖에 없고, 불행 끝에는 불행밖에 없어. 무언가를 견뎌내지 않고도 뭐든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나는 체제가 만들어낸 말도 안 되는 기만을 믿으면서 살지 않아.
그래도
일단 살아보자.
살 수밖에 없다.
시간을 믿어보자. 시간이 지나가면 지금의 절망과 불행 같은 건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희석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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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