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0 밤은 지나갑니까? =========================
눈앞에는 두꺼운 케이블 타이가 있다. 손가락만한 넓이의 케이블 타이는 뭐든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두꺼운 전선이든, 로프 더미든, 사람 목이든.
굳이 뭔가에 목을 매달아서 죽지 않아도 된다. 조금 숨이 막힐 테지만 잠깐의 고통이다.
케이블 타이를 원형으로 만든다. 따라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블 타이의 끝과 끝이 서로 얽힌다. 그걸 목에 건다.
눈 딱 감고 확 잡아당기면 된다.
이 더럽고, 구차하고, 끔찍하고, 서럽고, 서운하고, 고독하고, 지겹고, 진저리 나는 이 세상과 작별한다.
너무 오래 살았다.
이런 꼴로 너무 오래 산 탓이다.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아서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선준은 내가 이런 꼴로 죽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고통받고, 외로워하고, 배신감에 치를 떨며 오래오래 살기를 바랄 것이다.
내가 몸도 마음도 완전히 망가진 채로, 바닥을 기며 생각과 삶을 포기한 사람이 되길 원할 것이다.
그렇게는 하지 않겠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는 네 뜻대로 나를 농락하고 기만했겠지만, 마지막은 네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선택으로, 네가 나를 농락한 이 현실과 나 자신에서 다시 한 번 도망칠거다. 확인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나를 보며 네가 조소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악이다.
어떻게든 찾아가서 네 아이에 대해 책임지라고 소리치는 구차한 짓거리는 하고 싶지 않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내게 찾아올 모욕과 수치심을 견디고 싶지 않다.
나는 패배자처럼, 아무하고도 싸우지 않고 혼자 죽을거야.
내 마음을 더 이상 괴롭히고 싶지 않아.
천천히, 케이블 타이를 당겨간다. 조금씩 조여든다. 솔직히 무섭다.
죽는 건 너무 무섭고 싫다. 하지만 더 이상 사는 것도 싫다. 그리고 제일 무서운 건 따로 있다.
나는 나 혼자 죽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무언가와 같이 죽는다. 나는 자살하면서, 살인도 한다. 사람을 죽여야만 내가 죽을 수 있다. 누군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내 안에 살아있다.
손발이 덜덜 떨린다. 어떡해, 어떡해야 해.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나를 버리고 간 이선준의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그 아이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거야?
낙태는 할 수 없어. 나는 그런 건 싫어. 누군가를 죽여가면서 살아남는 건 싫어, 너무 싫고 무서워.
생리를 하는 것도 무서운데, 아이를 낳아야 한다니.
그리고 아이가 이미 내 안에 있다니, 분 단위로, 시간 단위로 자라면서 내 안에 살아있다니.
끔찍해.
무서워.
두려워.
네가 싫은 게 아니야. 내가 싫은거야. 나 자신이 싫고, 내가 이렇게 되어버린 줄도 모르고 나를 버리고 도망간 이선준이 싫은거야. 네가 잘못이 없다는 건 나도 알아.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너는 죽지 않아도 되는데, 너는 살아도 되는데, 너는 살아있어도 아무 문제 없는데.
나는 왜 너를 죽여가면서까지 죽어야만 하는지 나는 몰라. 하지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걸. 너를 키울 자신도 없고, 너를 안고 갈 자신도 없어. 험하다 못해 각박하고 쪼그라진 이 건조한 세상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라는 시선을 받으며 살아갈 자신이 없어.
그래, 그래, 인정할게.
나는 너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거야.
이선준도, 나도,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어. 너무 무서워.
너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나는 네가 너무 무서워.
너와 나를 못된 시선으로 바라볼 세상이 무서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은 너와 나를 낙인찍고, 비난하고, 헐뜯을 세상이 무서워. 너도 무섭지 않니?
그러니까 우리 죽자. 죽어서 없어지자. 더럽고 비참한 꼴 보며 상처받고 슬퍼하며 살 바에는 죽어버리자. 죽어서 사라지고, 아예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어딘가로 가버리자.
케이블 타이를 조금 더 당긴다. 차가운 플라스틱이 목에 닿는다. 조금만 더 세게 당기면 나는 호흡 곤란과 혈액 순환 장애로 쓰러지게 될 것이고, 죽을 것이다. 그 과정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사람이 죽으면 똥오줌을 쏟아낸다고 하지. 나도 그런 더럽고 추한 몰골로 죽게 될 것이다. 아름답게 죽고 싶은 욕심은 없다.
조금만 더 당기면 되는데,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되는데,
눈을 딱 감고 확 잡아당겨버리면 모든 게 끝나는데.
“흑! 흐흐흐…. 흐흐…. 으으… 으으윽…. 아. 아아아아, 아아아! 아! 아윽! 왜, 왜 나야…. 왜 나인데….”
죽는 건 무섭고,
누군가를 죽이는 건 더 무서워.
“으으…. 으으으으! 윽! 아악! 악!”
소리쳐도 아무도 오지 않아.
혼자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더 무섭다.
결국 죽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낙태를 할 생각은 없다. 내가 살아야 한다면 그 이유는 아이 때문이다. 내 몸에 깃든 생명이라 해도 타인이다. 나의 일부가 아니라 완벽한 타자다.
그러니까 그 목숨을 나는 함부로 할 수 없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이건 종교 이전의 문제다. 죽으려고 했던 주제에, 아이를 핑계로 살아놓고 그 아이를 없애버리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건 최악의 변명이다. 아이를 죽일 거라면 나도 죽어야 한다. 그게 공평하다.
하지만 공포나 두려움은 그대로다.
어떻게 낳아야 할지.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아무것도 모른다.
애초에, 낳는다는 확신조차 없다. 갑자기 어디론가 아이가 사라져버릴 것 같다.
아무에게도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다. 누구에게 말하든 지우라고 할 게 분명하다. 나를 버리고 간 놈의 자식이니, 내 잘못이 아니라면서 지우라고 할거다. 애초에, 그 아무도 내게는 없다.
한정운, 그리고 가족들뿐이다.
한정운은 내 고민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폐쇄된 공간에 있다. 자신만의 문제도 벅찰 사람에게 내 이런 상황을 말할 수는 없다. 더 큰 짐을 안겨주게 될뿐이다.
가족에게는 당연하게도 안된다. 나를 걱정하고, 슬퍼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아이를 지우라고 할 게 눈에 보인다.
나는 강간당한 게 아니다.
다만 책임져야 할 놈이 도망가버렸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나를 걱정하며, 내 안에 있는 생명을 떼어내라고 할 게 안 봐도 뻔하다. 그 어떤 부모도, 남편 없이 아이를 임신한 여자에게 그 아이를 낳아 키우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생명은 지금 나에게만 소중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 발목을 붙잡는 짐 덩어리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소중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나를 엿 먹이고 도망간 이선준의 피가 섞이든 그러지 않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안에 있으니까, 내가 보호해 줘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둘밖에 없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 밥을 굶지 않는다.
태교 같은 걸 억지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다.
이제 완연한 겨울이다. 춥고, 서러운 겨울이 이미 눈앞이 아니라 내 주변 전부를 채우고 있다.
살면서 맛봤던 겨울 중에서도 가장 추운 겨울을 맞게 될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임신한 채로.
아이를 갖게 된다면 혼잣말을 많이 하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내 경우는 아니었다. 내 하루는 건조하다 못해 냉랭하다.
밥을 먹고, TV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박헌영이 준 소설의 내용도 틈틈이 써보고 있다. 돈은 모아둔 게 좀 있어서 생활에는 큰 무리가 없다. 돈이 엄청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장을 볼 때가 아니면 밖에 나갈 일이 없다. 집에 있을 때에는 도저히 참지 못해서 울거나,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려고 꼼짝하지 않고 있는다. 하루의 팔십 퍼센트는 나쁜 생각을 하는 데에 소모한다. 나머지의 시간은 먹고, 씻고, 소설을 완성하는 것에 집중한다.
박헌영의 소설을 완성하는 건 몰두할만한 작업이었다. 나에 대해서 정리하고, 생각하는 일은 의미가 있었다. 후회도 하고, 비난도 해가면서 천천히 진행해간다.
자연스럽게, 하루에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애초에 혼자 있으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업무상의 전화도 그렇게 많이 걸려오는 건 아니다.
애초에 내가 맡은 업무는 그리 과중한 양이 아니었기에, 이 상태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배가 그렇게 불러온 것도 아니다.
산부인과에 가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가지 않는다.
그저 무기력한 날들의 연속일 뿐이다.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 어딜 가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저 기계적으로 좋은 장소를 찾고, 거기에 대해서 좋은 말들을 써내려갈 뿐이다. 내가 쓴 문장이지만, 거기에 내 감상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내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감상들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편집장도, 내 원고를 본 그 누구도 나의 그런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다. 알아달라고 한 것도 아니니, 별 문제는 없다.
하루 종일 하는 생각들의 대부분은 이선준에 대한 것과, 아이에 대한 것이다. 죽여버리고 싶다. 정말로, 진심으로 죽여버리고 싶다. 나를 버리고, 끝까지 나를 기만해놓고 본인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제발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방식으로 죽어버리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럴리가 없겠지. 잘 먹고, 잘 살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어떻게든 정을 붙여서 살아다. 좋은 옷, 집, 차를 사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
“흐흐….”
억울해.
왜 나만 불행해야 하는데?
등가교환 같은 건 세상에 없다. 내가 불행해진 만큼, 이선준이 불행해지는 게 아니다. 그저 나는 불행하고, 이선준은 약올리듯 나를 조롱한 것이다.
원래 세상은 불공평하다.
그 불공평에 비참하게 희생되어 버렸다.
나는 그렇게 잘못하지 않았어. 이런 일을 당해야 할 정도로 나쁜 짓을 했던 건 아니야. 확신할 수 있어. 차라리 나를 죽여버리지, 그러면 이해했을 텐데.
어째서 이런 상황에 빠져야만 하는거지? 죽고 싶은데, 내 안의 책임감 때문에 죽지도 못하는 이런 상황에 놓여야만 하는거지?
“억울해….”
입으로 내뱉어 봐도 불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곳에, 내 몸에 자리하고 있다. 가득 채운 뒤 뚜껑을 용접해버린 물병처럼, 나는 무거운 불행을 안고 어딘가로 가야만 한다.
나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내 불행들을 써내려간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증오와 복수심에 가득 차서 내가 겪어온 일들을 써간다.
그래도 설원입니다는 박헌영이 이해를 위해 쓴 책이지만, 내 수정 작업은 증오와 복수심만 낳아간다. 죽어버려, 쓰레기 새끼.
증오의 말을 쏟아낸다.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에게 복수 같은 걸 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냥 나는 혼자서 닿지 않는 비명을 길게 그려가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곁에 있어줘, 제발.
너무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괴로워서 힘들어. 누군가 내 푸념을 들어줬으면 좋겠어.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한 게 아니라고 말해줘. 나를 긍정해주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어.
미친 사람처럼 떠오르는 대로 아무 생각이나 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이따금 배를 만진다. 아무 움직임도 없지만, 만질 때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미워, 네가 너무 밉고 싫어. 왜 거기에 있는거야?
그러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해서 운다.
“으윽…. 윽…. 잘못했어…. 흑, 흐흐…. 미안해….”
낳기도 전부터 아이가 불행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생각은 좋지 않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엄마와 자식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관계다. 아이는 엄마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아이는 나만 볼 것이다. 다른 곳을 볼 여력도 없이. 오롯이 나만을 사랑할 것이다.
그렇게나 받고 싶었던 사랑은 아이에게서 찾으면 된다. 얼마든지 사랑해줘도 아이는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멋진 관계다.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이는 내가 원하는 만큼 나를 의지하고 사랑할거다.
멋지잖아.
다른 건 아무것도 상관 없어.
그래, 그런거야.
그런데 하나도 기쁘지 않아.
멍청해져서 소파에 누워 창밖을 바라본다.
이대로 자다가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