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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3화 (13/224)

00013 세상에 안 어려운 게 어디있냐? =========================

그 아저씨가 말했던 것처럼 입금은 금방 되었다. 금액은….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은행에서 곧바로 학자금 대출 상환으로 넘어가 버렸다. 지금까지 7학기를 등록했다. 그게 전부 한 번에 상환되었다. 어떻게 상환하는지도 몰라서 은행에 묻고 진땀을 빼야 했다.

한국장학재단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하다보니 시간이 금방 지났다. 삼천만원에 가까운 큰 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손 안에 들어오는 동시에 빠져나갔다.

그 돈이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 집 대출금도 갚을 수 있다. 컴퓨터 안 좋다고 매일 징징대는 동생한테 컴퓨터를 사줄 수도 있었다. 너무 큰 돈이 갑자기 들어와서 오히려 내 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내 돈도 아니다. 학자금을 전액 상환하고 남은 돈은 이백팔십삼만 오천육백이십칠원이었다. 갚으면 엄청나게 후련할 것 같았는데, 막상 아무 느낌도 없었다. 이선준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 아저씨한테 감사해.”

“응….”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갚아야 했던 돈은 대체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 그 빚의 무게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당장 내가 취직을 해서 많이 받는다 쳐서, 한 달에 이백을 받고, 많이 아껴서 백만원을 저축한다고 해도 이 년은 넘게 모아야 하는 돈이었다. 이 년을 오로지 돈만 모아서 학자금을 갚아야 했다. 정말로 큰 돈이었다.

빚의 무게를 실감하기 전에 그것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큰 돈이 내 손에 들어왔다가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런 감상만 남아있었다.

그다지 큰 기쁨도, 감동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좀 허무했다.

“하하….”

실감이 안 나니 그다지 감동도 오지 않는다. 머리로는 이게 엄청난 일이라는 걸 알겠는데 해결되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헛웃음을 몇 번 뱉었다.

“옷 사러 가자.”

나는 휘적휘적 나갔다. 그래도 내가 만져보지 못했던 큰 돈, 이백여만원이 있었다. 생필품을 사도 충분히 남을만한 돈이었다.

“좋네, 대한민국 만세!”

나는 은행 밖으로 나와서 과장되게 손을 하늘로 번쩍 들었다. 이선준은 탐탁치 않다는 듯 입술을 비죽였다.

나는 옷보다는 신발을 먼저 사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신고있는 건 헐렁헐렁하고 걸어다닐 때마다 자꾸 벗겨졌다.

“신발은 몇 켤레나 있는게 좋을까?”

하나만 있어도 별 상관없지만, 젖었을 때를 대비해서 몇 개 정도는 더 있는게 좋다. 젖은 운동화를 신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 이선준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지더니 말했다.

“세 켤레 정도면 되겠지.”

나는 패션에 크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무난한게 좋다.’라는 생각이었다. 지나치게 튀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구두 한 켤레, 겨울용 부츠 하나, 운동화 하나, 슬리퍼. 딱 그 정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딱히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난한 디자인에 약간 어두운 계열, 내가 자주 사는 종류들이었다. 운동화는 볼 때마다 점점 발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에어맥스라던지, 뭔가 추접스럽게 이것저것 달린 거 싫어한다. 기본 디자인이 좋다.

솔직히 신발은 크면 이상하다. 여자들 신발을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고, 여자친구가 신어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꽤 했었다. 하지만 그걸 내가 신다니, 기분 이상하다.

근처에 있는 신발 매장은 뉴발란스와 스베누였다. 수제화를 파는 곳도, 구두를 파는 곳도 있었다. 이선준은 그 매장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기분이 나빴다.

“이 꼴이 됐다고 내가 원피스 입고 구두신는 일은 절대로 없을거거든?”

“아무 말도 안 했어.”

이선준은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아, 뭔가 짜증난다.

“그냥 그렇다고! 으….”

흘러가는 대로 놔둘 생각이다. 남자인 나를 붙잡을 생각도, 여자인 나를 인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나는 젖어가듯 조금씩 바뀔 것이다. 그 변화를 그냥 거부하지 않겠다는 것 뿐이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조금씩,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현실을 부정해봐야 돌아오는 건 절망뿐이다. 전력으로 여자가 될 생각도 없지만 전력으로 남성을 사수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며칠 전에는 남자였다. 아직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남자인 친구가 나를 어려워하는 거라던지. 내외하듯 하는 거라던지. 그냥 개인적인 서운한 문제들도 있었고, 이런 옷차림 같은 문제들이 있었다. 애초에 구두랑 치마는 척 봐도 불편하다. 굳이 여자가 되었다고 여자가 되었으니까 투피스랑 원피스 입어야지! 이런 행동 하기는 절대로 싫었다.

굳이 여자가 되었다는 상황을 과하게 받아들이기 싫다는 뜻이다. 말했듯,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도 않을거다. 그냥 평범하게, 평범한게 좋다.

나는 스베누 매장에서 하나, 뉴발란스 매장에서 두 개의 운동화를 구입했다. 약간 밝은 색의 운동화 세 켤레였다.

“너 이런 색 신발도 신냐?”

내가 항상 어두운 색만 골라 입는다는걸 알기에 이선준이 토를 달았다.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뭐, 나는 이런 거 신으면 안 돼?”

노란색에 빨간색, 민트색 운동화였다. 그냥 기본에 가장 가까운 디자인으로 샀다. 적당히 편했다. 그리고 나는 발이 엄청 작아졌다. 230정도였다. 키가 작아지니 발도 작아진 모양이었다. 지금은 노란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이런 색깔을 신는 날이 오다니, 뭔가 껄쩍지근하면서도 묘했다.

“애초에 어두운 색이 좋았던 게 아니라 그게 그나마 어울려서 신었던 거야.”

밝은 색깔은 별로 받지를 않았다. 디자인이 화려한 건 싫지만 색감 자체는 밝은 톤이 더 좋았다. 하지만 심하게 안 어울려서 그냥 안 신고, 안 입고 다닌 것이었다. 방금 말했지, 어두운 계열을 자주 샀다고, 자주 샀다는 것이 곧 그게 좋다는 뜻은 아니야.

사실 밝은 색이 입고 싶었다. 솔직히 변한 건 엿 같은 일이지만 외모 자체는 괜찮았다. 내가 두려운 건 사람들의 시선과 이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대체 어떻게 설명하냐는 것이었다.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주는 중압감과 혼란보다 그게 더 스트레스였다.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산다. 사람들의 달라진 시선과 편견, 오해, 그런 것들은 실제로 사람을 정신적으로 살해할 수도 있는 위험한 것들이었다. 속된말로 나는 멘탈이 약한데, 그걸 제대로 견딜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하지만 이미 부딪히기로 결정했다. 뒤로 갈 수는 없다.

“신발 편하네.”

발에 맞는 신발을 신으니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이제 옷부터 사러 가야겠다. 신발 두 개를 들고 있는데 벌써 양손이 포화 상태였다.

“저기, 이선준씨?”

“왜?”

“나 마초인거 알지?”

“….그 얘기가 갑자기 나오는 이유가 뭐냐?”

“그러니까 마초남이 TS해서 여자가 되었으니까. 마초적 사고방식으로 행동하겠다는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냐?”

“이런거.”

나는 짐을 이선준에게 떠넘겼다. 이선준은 종이가방 두 개를 받아들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마초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여자의 짐은 남자가 들어주는 걸로 정해져 있어.”

“야, 나는 오래전에 페미니스트로 전향했는데?”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나는 후다닥 앞으로 뛰어갔다. 이선준은 닭 쫓던 개가 닭 쳐다보듯 나를 쳐다봤다. 개소리 같지만 뭔가 웃겼다. 마초남이 TS해서 주변 남자에게 모든 일을 떠넘긴다니, 뭔가 이대로 살면 정말 웃기는 년이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 참….”

나는 옷가게로 들어갔고, 이선준이 뒤를 따라왔다. 캐주얼복을 파는 매장이었다. 말했듯이 치마나 원피스를 살 생각은 없었다. 청바지에 후드티, 그냥 그런 정도면 충분했다. 그리고 곧 봄이니까 봄옷도 좀 살 생각이었다.

“어머 손님, 손님 같은 스타일엔 이런 것도 어울릴 것 같은데….”

묵묵히 후드티와 청바지를 뒤적거리고 있는 내게 점원이 천치마 같은 것을 들이댔지만 나는 무시했다. 나는 거의 구도자적인 자세로 옷들을 골랐다. 노란색, 민트색, 주황색 후드티를 한 벌씩 샀다. 그리고 청바지도 세 개, 왜 세 개씩만 사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세 개 하면 안정감이 있다. 왠지 홀수는 묘하게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 제삿상도 홀수로 차리잖아.

나는 그 참에 옷도 갈아입었다. 트레이닝복 차림에서 나는 청바지에 노란색 후드티, 노란색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었다. 이선준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병아리냐?”

“왜, 존나 귀엽냐?”

내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하자 이선준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말을 말자….”

자꾸 장난을 치는 것도, 이렇게 이선준을 자꾸만 놀리는 것도 사실 실감이 안 나서였다. 뭔가 이러면 이럴수록, 내 본질적인 부분은 변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든다. 마치 체험판처럼, 지금은 여자 몸을 잠깐 체험하는거고, 그래서 평소에 겪지 못했던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 같았다. 이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나는 원래대로 돌아오고 이 때 일어난 일들은 그냥 상황극처럼 기억될 것 같았다.

그래, 상황극이다. 여자가 된 상황극, 그런 걸 하는 기분이었다. 실감이 안 나고 뭔가 붕 뜬 기분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유쾌하게 행동하는 게 아무렇지 않았다.

아직 이틀째다. 실감을 느끼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야. 잠깐은 이래도 되잖아.

그런 생각이 든다.

“너 그런데 너무 대중없이 사는거 아냐? 후드티 세 개 청바지 세 개, 무슨 제복이냐?”

“그럼 뭘 사? 아 맞다! 봄옷 사야지.”

나는 옷을 몇 개 더 샀다. 가격표도 보고, 너무 비싸지 않은 것으로 셔츠와 가디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것들 위주로 샀다. 외투는 겨울이 끝나가는 지금 사면 좀 비싸니까 그냥 있는 것으로 버틸 생각이었다. 그냥 큰 옷 입은 사람처럼 보이니까. 옷과 신발을 샀는데 벌써 지출이 60만원이 넘어갔다. 한 번에 사니까 이렇게 비싸구나…. 내가 번 돈이 아니라서 그런지 씀씀이도 어쩐지 헤프다.

마지막으로 속옷 매장에 들어서자 이선준은 꺼려하는 눈치였다. 그래, 일부러 부담되는 걸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남자랑 여자랑 속옷매장에 같이 들어가면 그런(?) 사이로 오해할 게 뻔했다. 그런 시선 받는 건 내 쪽에서도 사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 들어간 걸 후회했다.

“컵은 어떤 종류로 드릴까요? 풀컵? 3/4? 1/2? 아직 추우니까 풀컵이나 3/4가 좋지 않을까요? 음….”

한참을 떠들다가 직원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왠지 내가 처음이라는 것을 눈치로 알아챈 모양이었다. 내가 어버버하고 있자 여직원은 줄자를 꺼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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