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139화 (139/224)

00139 허구 =========================

더 이상 아무 얘기도 없다. 그 너머에는 누구에게 들려줘도 하나도 재미없는 그런 행복한 일들만 남아있다고 말해야 했다. 아무도 관심이 없고, 들어봐야 질투만 생기는 그런 날들을 겪어가며 산다. 라고, 그렇게 마무리지었어야 한다.

이선준은 내가 여전히 불안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거의 매일 나를 만나러 왔다. 같이 취재를 가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손을 잡고 걷고, 끌어안고 잠들고, 키스를 하고, 애정이 넘쳐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날들을 보냈다. 이선준이 어떻게 해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약혼녀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일도 없었다.

불안감은 희석되었고, 이선준은 어딘가 우리가 몰래 숨어서 살만한 곳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런 행동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행복했다. 그래서 이선준을 믿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행복이 내 손에, 내 마음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은 탓이다. 그 정도로 나는 만족을 넘어 감사하고 있었다. 나는 행복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다고 은연중에 체념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끝맺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은 살아있는 한 살아가고, 살아있는 한 불행하다. 내가 겪어야만 하는 불행의 할당량은 아직 다 채워지지 않았다.

2주 지났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핸드폰을 확인한다. 이선준은 집에 돌아갔다. 내 집에서 자고 가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잠은 되도록이면 집에 가서 자라고 설득했다. 아예 집을 나와버린 것처럼 되면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선준에게 카톡이 와 있다.

[나 결혼한다.]

[오늘 아침 비행기 타고 정희랑 같이 미국으로 떠나.]

[현실적으로 너랑 같이 사는 거 힘들다는 거 알잖아.]

[미안하다. 행복하렴.]

어,

이 문장들이 잘 이해가 안 된다.

이게 무슨 소리인걸까.

이게, 이게 무슨 말인 걸까.

내가 이해한 뜻이 틀린 것 같아서, 나는 그 메시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걸까.

이선준에게 전화를 한다. 받지 않는다.

이선준에게 전화를 또 한다. 받지 않는다.

이선준에게 전화를 다시 한다. 받지 않는다.

이선준에게 연거푸 전화를 한다. 역시 받지 않는다.

뭘까.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무슨 대체,

대체 무슨

어떻게 대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런 어떻게 대체 말도 안 되는 일이 이렇게

벌어지는 거지?

나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받지 않는 전화를 계속 건다.

받지 않는다.

“으, 으으…. 으으….”

아닐거야. 아닐거야. 아무 일도 아닐거야. 아무 일도 아닐거야. 아무 일도 없을거야 분명해. 장난이야. 이건 누군가의 못된 장난이야. 누가 이선준을 사칭해서 카톡을 보낸거고, 이선준은 그냥 자고 있을 뿐이야. 아니면 잠깐 어디 가 있거나, 핸드폰을 누가 주웠거나 뭐 그런 거겠지. 당연하잖아? 어제까지만 해도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몇 번이나 입맞춤을 하고 끌어안고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럴리가 없잖아.

그럴 이유가 없잖아.

심호흡을 하자. 심호흡, 심호흡이 중요해. 지금 나는 혼란스러워. 이해를 해야 돼.

“하, 하하…. 후우, 후우우우우…..”

하지만 그러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다.

마지막 복수.

이선준을 버리고 도망쳐버렸던 나에 대한 마지막 복수.

사랑을 주고, 나를 행복하도록 만든 뒤에, 나를 가차없이 버리고 도망가버림으로 인해 완성되는 마지막 복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나를 그토록 사랑했던 이선준이다.

내가 없어서 얼마나 아파했을까… 괴로워했을까…. 고통받았을까….

그 고통을 그대로 나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머리는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다.

내 몸도 망가뜨리고 한 번의 절망을 주고, 다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나를 그 수렁에서 건져내고, 나를 충분하게 행복하게 만들어 준 뒤 다시 한 번 버린다.

희망이 없는 절망보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희망을 눈에 보이는 곳에서 흔들어대는 것이 더욱 잔인하고 비극적이다.

달콤한 꿈을 선물해주고, 나를 다시 지옥을 떨어뜨려 버린다. 그 모든 달콤함이 사실은 가짜였고, 나를 기만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음을 인식시킨다.

“아냐, 아냐아냐아냐아냐.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젓는다. 계속 전화를 걸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전화를 받지 않는다. 메시지를 보내도 확인하지 않는다.

나는 외면당하고 있다. 마치 칼로 쳐내듯 깔끔하게 도려내졌다.

아닐거야.

뭔가 문제가 있는거야.

기다리면 연락이 오겠지.

일주일이 지났다.

11월이다.

아무 연락도 오지 않는다.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핸드폰을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나는 방에 오도카니 앉아서,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쳐다본다.

“…….”

홀로 남았다.

함께였다가, 혼자였다가, 다시 함께였다가….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나는 버려졌다.

나는 모든 걸 받아들인다. 밝은 미래 같은 건 없다. 이선준이 모두 가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내게 희망과 행복을 선물하고 잡아뜯어버렸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화장실로 간다. 케이스를 열고, 소변을 본다.

지금까지 너무 무서워서, 두려워서 확인하지 않았던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

아침 첫 소변, 가장 정확도가 높다고 들었다. 나는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있는다. 보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확인하고 싶지 않다. 원래 주기가 불규칙했으니까 이번은 그 주기가 조금 긴 것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혼자 남았고, 모든 것은 내가 해나가야 한다. 나는 ‘그걸’ 손에 들어 본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단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에 음각을 하듯 새겨진다.

어떡하지.

그 단순하고 명료하며, 내 모든 고민과 고뇌를 담은 말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같은 말이 반복 재생된다. 답은 나오지 않고, 질문만 계속 생산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결국 아무것도 해답을 내리지 못한 채, 나는 끓어오르는 모든 말을 하나의 비명으로 내뱉는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악! 악! 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른다. 미친년처럼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세상이 무너졌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분량이 애매한테 파트 끝이라서 이렇게 올릴 수밖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