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8 허구 =========================
달콤한 시간이었다.
불행한 시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게 웃기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절대로 다시 엮이지 않을 거라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고 해놓고 이선준의 마음을 받아들인 내가 웃기다. 우습다. 멍청하다. 지키지도 못할 말을 항상 해왔고, 그 말들에 배반되는 상황을 항상 마주해왔다.
생각을 바꾸고, 말을 바꾸고, 행동 원칙을 바꿔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들은 지금껏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내 말을 뒤집었다.
나는 이선준과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있다.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고, 어이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선준도 어색한 건 마찬가지인지 내 눈을 쉽사리 마주치지 못한다. 사람들이 오가는 시내에서 나는 그렇게 말한다.
“뭐 먹을래?”
“어, 음. 그…. 아무거나.”
“뭐가 아무거나야 이 자식아.”
이선준의 적당히 하는 대답에 내가 비난하듯 말한다. 이선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한정식 괜찮게 하는 데 있는데….”
그 말에 나는 인상을 쓴다.
“너 진짜…. 그, 그 이런 상황에서는 좀…. 캐주얼한 데가 좋지 않을까 싶은데?”
한정식이라니, 으리으리한 곳에서 코스요리를 먹는 건 이런 발랄한 시내 거리하고는 도저히 안 어울리잖아. 이선준, 못 본 새에 비싼 것만 먹다 보니 사람이 이상해졌다. 일 년 만에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거야?
이선준은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다. 너는 왜 당황하는거야?
“이런 상황이라는 게…. 뭐야?”
“이런 상황이라니…..”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솔직히 한 마디밖에 없잖아.
나는 약간 비위가 상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말한다.
“그, 데, 데, 음…. 데이트…. 잖아.”
어쩐지 처참한 기분이 된다. 그럴 것도 없는데, 그렇게 된다.
“아, 그, 음…. 그래, 데이트지!”
“크, 크게 말하지 마 병신아!”
누가 들으면 뭐 어떻다고, 나는 이선준의 입을 막아버린다. 이선준은 발버둥치며 내 손을 떼버리더니 인상을 팍 쓰며 말한다.
“야, 너 그런데 아직도 말이 험하다?”
“뭐, 병신한테 병신이라는데 뭐!”
이선준은 한숨을 푹 쉬며 내 팔을 잡아끈다.
“피자나 먹으러 가자.”
“어…. 그래.”
우리는 시내를 걸어간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카페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아무 얘기도 못 했다. 나는 굳어있는 이선준을 보며 말한다.
“야 너, 마지막으로 연애한 거 언제야.”
“으음…. 3년? 2년? 그쯤인데…. 너는?”
“어…. 난 그거보다 좀 더 오랜데….”
우리는 둘 다 얘기하다가 한숨을 푹 쉰다.
연애를 안 해본지 오래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둘 다 잘 모른다. 무엇보다도, 친구에서 연인이 된 경험은 이선준이나 나나 없다. 물론 친하게 지내다가 연애를 하게 되는 건 왕왕 있는 일이다.
하지만, 속된 말로 엄청난,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그런 친구와 연인이 된 건 처음이다. 애초에 그런 대상은 서로에게 우리 둘이 유일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뭘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커피를 대충 마시고 나와서 무작정 걷는다. 나는 일반적 여성과는 많이 다르다. 날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모를 것이다. 열 명의 여성이 있다면 그 열 명 전부가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고 쳐줘도 결국 다른 부분이 있다.
심지어 나는 남자였던 여자다. 그리고 엄청 친했던 친구다.
뭘 어떻게 해야 잘 연애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연애 처음 하냐 멍청아?”
나는 제대로 말도 못 꺼내는 이선준을 보며 말한다. 하지만 나도 그래놓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이선준과 나는 연애를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서로가 서로를 어쩌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다. 길을 걷다가 문득 이선준이 어딘가를 쳐다본다.
“뭘 그렇게….”
모텔
“…….”
이선준이 나를 쳐다본다.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지만, 아주 열렬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선준을 보며 웃다가 주먹을 세게 쥔다.
“대낮부터 미친놈이!”
-퍽!
“윽!”
옆구리를 맞은 이선준이 몸을 꺾는다. 나는 짐짓 우울한 목소리로 이선준을 보며 말한다.
“너는 나…. 그러려고 만나?”
“아, 그, 그게 아니잖아! 나는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어, 나도 그냥 이 말 한 번 해보고 싶었어. 여자만 할 수 있는 말이잖아.”
남자도 못 할 건 없지만 말이지. 우리는 다시 길을 걷는다. 나는 가만히 있다가 묻는다.
“그런데 우리…. 연애…. 하는거야?”
“음…. 그렇겠지?”
“대답이 아주 미적지근하게 들리는데….”
“연애 맞지! 그럼!”
이선준의 반응이 우습다. 아직 실감은 안 난다. 우리는 걸어가며 소설 얘기도 하고, 일 얘기도 한다. 별로 달라진 건 없다. 한참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말들을 나눈다. 그 말들은 예전에 나눴던 무의미한 토론 같은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나는 문득 떠올라서 그렇게 말한다. 이선준도 웃는다. 우리가 지금 하는 대화는, 내가 도망치기 전 이선준과 내가 나누던 대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로를 무시하고, 매도하고, 혐오하는 순간을 지나서, 우리는 결국 과거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 시절을 연애로 기억하고 있지 않을 뿐, 사실은 연애를 했던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스킨십과 애정 표현만 없었을 뿐, 서로가 필요했다. 없으면 불안했고,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색해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냥 하던 것처럼 하면 된다. 뭔가 특별한 걸 할 필요는 없다. 그저 편하게 지내면서, 가끔씩 애정을 확인하고 싶을 때 사랑한다고 말하면 된다.
엄청 좋은 음식을 먹고, 데이트를 굳이 하고, 어딘가에 놀러 가지 않아도 된다.
그저 옆에 있으면서, 서로 편하게 있으면 된다. 단지 그거면 좋다.
너무 힘들었던 탓에, 나는 그 정도만 해도 만족한다. 한 줌의 애정만 받아도 나는 행복해진다. 과정은 극도로 혐오스러웠다.
끔찍했고
절망적이었고
반인륜적이었으며
폭력적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는 애정결핍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불행의 끝자락을 맛봐버려서, 애정을 갈구하며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이선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 기색이다. 이선준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한다.
“사랑해.”
“나도.”
우리는 마주보며 웃는다. 이대로도 충분하다. 이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선준이 내게 준 상처는 아물지 않았지만, 서로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픔을 잊을 수 있다. 이선준이 나를 보며 말한다.
“술이나 마실까?”
“좋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많다. 그래서 아직 불안하다. 하지만 손을 잡고 있다. 이 손을 잡게 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너무 많은 날들을 고통받고, 그리워하고, 힘겨워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힘들었던 시간만큼 더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해가 저물 때까지 걸어서 어딘가로 가고 있다.
그래도 설원입니다 – 完
이라고,
방점을 찍었어야 했다.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