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7 허구 =========================
이선준은 결국 결혼하게 될거다. 이건 영화가 아니다. 드라마도 아니다. 그냥 엿 같은 현실이다.
“네가 날 비웃으면서 했던 그 말들 다 어떻게 책임질건데? 네가 나를 이제와서 사랑하면, 나는 네 첩이라도 되어서 살라고? 웃기지 마…. 너, 너 진짜 책임지지 못할 행동 하지 마!”
불륜녀와 불륜남이 되어서 구차하게 만나느니 차라리 그냥 내 몸이 필요한 것처럼 굴고 가버려. 그게 깔끔하잖아.
“다 늦었어. 다 끝났어. 뭐든지 원래대로 돌아가고, 제대로 시작하기에는 다 늦어버렸잖아. 네가 그걸 선택했잖아. 말 뒤집지 마…. 둘 중에 하나 선택해.”
“말해봐.”
“당장 꺼져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다른 건?”
“하던 대로 그냥 섹스나 해. 그리고 결혼한 다음 꺼져버려. 나랑 마음이든 감정이든 공유할 생각 같은 거 하지 마. 더러운 기만자 새끼야. 나를 어디까지 갖고 놀 생각이야?”
내 거친 욕설에서 이선준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나는 숨을 고르며 이선준을 노려본다. 자, 뭐든 선택해. 둘 중에 하나.
완전히 나를 떠나버리던가. 하던 대로 섹스 파트너처럼 지내던가. 개인적으로는 전자가 좋지만, 너랑 한 약속도 있으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 다시 마음을 주고받아 봐야 끝이 너무 확실하잖아. 불행해질 게 뻔하잖아.
너 하나만 끝나는 게 아니라. 너희 부모님에게도 큰일이잖아. 사업이니 뭐니 잘 모르지만, 정략 결혼이 무산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게 큰일이라고, 무르기 힘든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
“책임질게.”
“……뭐?”
“미안하다.”
“….”
“미안하다는 말로 안 끝난다는 건 알고 있어.”
“개소리 하지 마 제....”
“들어줘. 제발.”
“…….”
이선준은 입술까지 부르르 떤다.
“전부 다 버릴게. 아무것도 필요 없어.”
“…….”
“너 하나만 있으면 돼.”
“미친 소리 하지 마….”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진짜로 미안해…. 너무, 너무 미안해….”
사과를 왜 하는거야?
“하지 말라고 했어….”
“미안하다…. 내가 할 말이 없다.”
“하지 말라고 진짜! 역겨운 새끼야아아아!”
나는 분에 못 이겨서 이선준을 걷어찬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선준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또 무슨 상처를 더 주려고 그딴 개소리를 하는데! 어? 뭐가 더 남았는데! 제발…. 제발 하지 마. 제발. 내가 부탁할게. 응? 재미있지? 응? 내 몸을 가지고 노는 게 이제 재미없어? 이제 내 마음을 가지고 놀고 싶어? 어디까지 부숴버리고 싶은건데! 왜 지금인데! 왜 지금이냐고!”
내 미련에 불을 당기지 마.
“결혼 포기할거야…. 야, 나…. 잘 나가 꽤. 원고도 여기저기서 달라고 하고…. 노가다 같은 거 안 하고, 그깟 돈 필요 없어. 가족들이랑 인연 끊고 죽은 척 하고 살면 돼. 먼 곳에서. 응? 돈 좀 벌면 해외로 나가서 살자. 나 자신 있어.”
“아, 아…. 아, 너…. 왜 그래…. 진짜 미친 또라이야….”
“내가 불행하게 한 만큼, 아프게 한 만큼 행복하게 해줄게…. 미안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거밖에 없어. 불행하게 했던 만큼…. 응? 아니 그보다 더. 훨씬 많이. 내가 너 괴롭히고 상처줬던 거 기억도 안 날 만큼 행복하게 해줄게….”
“…….”
“내가 잘못하는 거 알아. 정당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어. 만회할게…. 제발.”
역겨운 궤변일 뿐이다. 이선준은 눈이 새빨갛게 된 채 울고 있다. 울어야 할 사람은 난데, 왜 이선준이 울고 있는거지. 잘 모르겠다.
하긴, 원래 못난 놈이 우는거다.
나도 결국 울어버리는 것처럼.
“나는 너 안 믿어.”
“그래….”
“절대로…. 안 믿어.”
“미안하다.”
“때려죽여도 안 믿어!”
그런데
믿고 싶어진다.
믿으면 안 된다고, 그런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믿고 싶다.
이미 끝났어.
다 식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 같다. 조금이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던 것 같다.
혹시나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던 작은 기대가 남아있었던 것 같다. 이선준의 말이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진심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더 이상 불행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왈칵 밀려온다. 이선준의 말이 가슴에 깊숙하게 박힌다. 나를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다는 그 말이 너무 달콤하다. 나 하나만 있으면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그 고백이 너무 절박하게 들린다.
“으윽…. 흑! 야, 야 쓰레기 새끼야….”
“말해….”
“어떻게 할건데, 어떻게 도망칠건데, 어떻게 책임질건데.”
나는 결국 포기한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좋으니 사랑받고 싶다. 그런 마음이 너무 강하고 간절하다. 나중에 불행해져도 좋으니까. 지금 당장 조금이라도 나를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행복해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선준의 말을 믿고 싶어. 이선준이 뭔가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 표정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선준의 표정에는 셋 다 있다. 웃으면서, 울면서, 기뻐하고 있다.
미친놈.
뭐라고 말은 하는데 하나도 안 들린다. 장황하게 뭔가를 막 설명한다. 계획은 어떻고, 어떻게 하자. 이런 식이다. 그래, 그 멍청해져서 아무것도 안 하는 그 시간 동안, 그런 계획이나 짜고 있었냐.
나랑 어디로 도망가서, 어떻게 해서 먹고 살지. 그런 망상이나 하면서 멍하니 있었던 거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선준에게 소리친다.
“병신아!”
“어, 어?”
“이 등신 멍청이 새끼야!“
“왜, 왜 그래…. 화났어?”
“당연히 화가 나지 이 얼간이 새끼가!”
나는 이를 갈면서 이선준을 노려본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나는 악을 쓰듯 외친다.
“이럴 때는 그냥 안아주는거야 이 머저리야! 뭘 자꾸 설명하고 자빠졌어!”
“어, 어….”
이선준이 천천히 내게 다가와 나를 끌어안는다.
믿어도 되는걸까.
나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선준이 나를 침대에 눕힌다. 내던지듯 했던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부드럽게 내게 입맞춤을 한다. 따뜻하다. 물어뜯는게 아닌 입맞춤은 내게 행복감을 준다. 나는 이선준의 입술을 내 입술로 누르고 압박한다. 마치 갈구하듯 다가가자 이선준의 혀가 내 입 속으로 들어온다.
아주 천천히, 급하게 나를 탐했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천천히 내 입술을 핥고 내 혀와 혀를 얽어맨다.
내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는다.
“미안해….”
이선준이 말한다.
“미안하면 잘 해.”
“어, 응….”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 너무 힘든 시간들이었다. 이선준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이선준이 나와 눈을 마주친다.
“나 사랑해줄거야?”
“응.”
“결혼 안 할거야?”
“응.”
“나만 있으면 돼?”
“그래.”
“너, 사랑한다고 아직 한 번도 말 안 했어.”
“사랑해….”
“아프게 안 할거지?”
“아, 싫으면 안 해도 괜찮….”
“변태놈아. 그거 말고…. 마음 아프게 안 할거냐고 말한건데….”
“그, 그래. 당연하지. 잘 할게 진짜로…. 미안해. 그, 그리고 너 아프잖아…. 안 해도 돼.”
이선준의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그리고 이선준의 목을 끌어안는다.
“아냐 해도 돼. 나…. 오늘은….”
이선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하고 싶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선준이 짐승처럼 내게 달려든다.
“아앗! 미, 미친! 아프잖아!”
“아, 미, 미안!”
우리는 한 번도 섹스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서툴게 서로의 몸을 만진다. 나는 어쩐지 웃겨서 웃는다.
“헤헤….”
“왜?”
“아, 아니…. 이상해서….”
“왜? 안 좋아?”
“그게 아니라….”
방금 전까지 죽여버릴 듯 소리치다가. 지금은 이선준의 몸에 매달려서 사랑해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 내 자신의 이중성과 변화 속도가 놀라울 정도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선준은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한다.
“원래 죽일 것처럼 싸우다가도 십 분 지나면 섹스하는 게 사람이야.”
“그런 경험담 들어봐야 안 기쁜데.”
“아…. 미안.”
“조심해.”
“그, 그래.”
섹스는 많이 했다. 하지만 이런 섹스는 처음이다. 이선준은 조심스럽게 내 몸을 만지고, 옷을 벗긴다. 알몸이 되어서 우리는 이불을 뒤집어쓴다. 나는 부끄럼을 많이 탄다. 그 때문이다. 그런 하나하나의 배려들이…. 솔직히 서운하다.
“내가 뭘 싫어하는지, 뭘 원하는지 다 알면서…. 안 했던거네.”
“그게….”
“됐어. 그냥 한 말이야. 앞으로 신경써주면 돼. 나 그런 거 좋아해. 나도 신경써줄게.”
이선준이 내 가슴을 조심스럽게 움켜쥔다.
“음, 하으…. 웁. 으흣, 앗! 가, 간지러워어….”
연거푸 키스를 하고, 애무를 하고 서로의 몸을 더듬는다. 나는 결국 우는 소리를 낸다.
“어, 언제까지 이것만 할거야….”
“어? 아….”
“나 미쳤나봐….”
원래도 잘 젖는데, 지금은 마치 오줌이라도 지린 것처럼 흐르고 있다. 나는 이선준의 손을 잡아 내 아래쪽에 가져다 댄다.
“엄청 뜨거운데….”
“아, 알면…. 어, 어떻게든 해 봐.”
나는 고개를 돌린 채 그렇게 말할 뿐이다. 우리는 서로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면서,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오늘이 아니면 이런 날은 없는 것처럼.
행복하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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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갤러가 팬아트를 그려준 관계로 연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