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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36화 (136/224)

00136 허구 =========================

오피스텔에 거의 도착했을 때, 이선준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린다.

“……아.”

“왜?”

이선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막 중형 BMW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야, 너 들어가라.”

“왜…. 뭔데?”

-덜컥

차 문이 열리고, 저번에 한 번 봤던 사람이 내린다. 뭐야…. 지겹지도 않나?

“야, 야!”

이선준의 약혼녀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저번의 일 때문인지 청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있다. 그 여자는 나를 향해 마구 달려오며 외친다.

“이 도둑고양이 같은 년아!”

큰일났다. 죽창 안 챙겨왔는데. 그리고 왜 또 나한테 지랄이야 저건?

그 여자가 나한테 달려들기 무섭게 이선준이 내 앞을 막아선다.

“……추잡하게 왜 이래?”

“뭐, 뭐? 추잡? 추잡하다고? 너…. 너 미쳤어?”

“그럼 추잡하지, 내가 말 했잖아 여기 오지 말라고.”

이선준은 나에게 말할 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정색하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너무 화가 난다.

너무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이선준을 노려보며 말한다.

“야…. 내가 저런 거랑 엮이는 거 싫다고 했지.”

“…뭐? 저런 거?”

“알아서 해결해 제발, 너 하나만으로도 엿 같다고 말했잖아!”

“저, 저 미친 년이 뭐가 잘났다고!”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건, 뭘로 싸우건 듣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저기에 끼고 싶지도 않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피해 입는 것도 싫다.

집에 들어와서 멍하니 있는다.

약혼녀도 있고, 곧 결혼할 사이다. 그런데 이선준은 내게 집착한다. 약혼녀도 그 사실을 알아버린 이상, 결혼이 파토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선준은 그 여자보다 내 편을 든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내게 집착한다.

어떤 방식으로 뒤틀려 버렸든, 이선준은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 집착의 다른 이름은 당연하게도 사랑이다. 나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냥 그 방식이 미치도록 혐오스러울 뿐이다.

이선준이 나를 사랑하는 방식은 역겹다. 그런 건 그저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든 나를 소유하기만 하면 된다는 태도다. 나를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주제에 여전히 사랑한다. 원래 사람은 진심을 잘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결국 그에 맞춰 어울린 것이다. 네 역겨운 사랑의 방식에 결국 동조해 주겠다면서, 책임이니 뭐니 운운하며 결국 처참하게 망가져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걸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는 서로 계속 망가져가고 있다. 더 이상 이딴 문제를 신경쓰고 싶지 않다

정신을 다른 곳에 쏟을 때에는 일이 최고다. 기사나 써야지…. 하면서

노트북이 있는 작업용 방으로 들어간다. 집에는 인테리어 소품 같은 건 없지만, 자료조사를 위한 책 같은 건 책장에 꽂혀 있다. 필요한 책이 없다. 다른 데 뒀나 싶어서 책상의 서랍을 뒤져본다.

제일 위쪽 칸을 열자, 액자가 보인다. 이선준과 찍은 사진이다. 액자는 박헌영을 만난 이후에 서랍에 넣어놓았다. 그냥, 그게 있으면 볼 때마다 배신감을 느낄지 모르니까 그랬던 거였다. 나중에 내 집에 왔을 때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으면 상처받을 게 뻔하니까 그랬다.

그런데, 액자가 뒤집혀 있다. 뒷면이 되어 있다.

나는 서랍을 열면 사진이 바로 보이도록, 사진 쪽이 위가 되도록 넣어놓았다.

가끔씩 서랍을 열어보며 사진을 봤기에 잘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뒤집혀 있다는 건 결국 하나밖에 없다.

이선준이 서랍을 뒤졌다. 그리고 액자를 보고 뒤집어 놓았다. 나는 갑자기 흩어진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져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 아래편 서랍을 연다. 거기에는 박헌영이 준 『그래도 설원입니다』가 있다. 책을 어떻게 놨는지까지는 기억을 못 한다.

하지만, 이선준이 이걸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든다.

문체가 확실한 탓에, 아마 박헌영이 쓴 거라는 걸 몇 줄 보고 바로 알았을 것이다. 아, 그래. 그런 거였나….

-삑삑삑삑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거실로 나가자 이선준이 들어온다.

“갔어.”

주어는 없지만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듣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들고 있는 책, 박헌영이 준 그 책을 들며 말한다.

“이거 봤어?”

책제가 보이지 않도록 했지만, 이선준은 스프링 제본이 된 것만 보고도 표정이 굳는다.

“어.”

그리고 담백하게 대답한다. 본 건 그럴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선준이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갑자기 섹스를 하지 않는다. 내게 폭력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정말로 돌변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바뀌어 버렸다.

한정운을 만났던 날, 이선준은 내가 없는 집에 와서 내 책상 서랍을 뒤졌다. 기분이 나쁘기는 하지만 이선준은 더 미친 짓도 많이 했다. 그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다. 하지만 이걸 읽고, 무슨 심경인가의 변화를 느껴서 갑자기 모든 폭력적 행위를 멈춘 게 중요하다.

“너…. 미쳤어?”

“뭐가?”

“너 나한테 미안해?”

“…….”

이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기가 차서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설원입니다』를 보면서 이선준이 뭘 느꼈을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추측을 해볼 수만 있을 뿐이다.

같은 배신을 당하고 나를 용서하고 이해하려 노력한 박헌영과,

같은 배신을 당하고 나를 짓누르고 억지로 가지려고 했던 자신과의 간극을 느끼면서

내게 미안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선준은 은연중에 박헌영을 무시해왔다. 소설적으로, 도덕적으로 저열하다고 깔아뭉개왔다. 어린아이를 강간하는 소설을 쓴 박헌영을 반사회적 범죄자로 낙인 찍으면서.

장난이지만 은연중에 본심을 넣어가며, 박헌영을 매도해왔다.

그런 박헌영은 나를 이해했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온 자신은 나를 처참하게 짓밟고 조각내버렸다.

과거의 이선준은 박헌영을 질투하고 있었다. 내게 농담을 하고 집적거리는 박헌영을 보며, 질투하고 혐오했다. 하지만 결국 이선준은 나를 먼저 가졌다. 하지만 박헌영은 그래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 소설은 설원의 관점에서, 박헌영의 언어로 쓰여 있다. 내가 이선준을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써 있고, 설원이 박헌영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도 써 있다.

자신이 왜 사랑받지 못했는지, 사랑하는 사람이 왜 다른 남자를 선택해야 했는지에 대해서, 박헌영은 고민하고 결론을 내리고 받아들였다.

이선준이 도덕적 문제를 항상 거론하던 그 박헌영은, 나의 배신을 이해하려고 그렇게나 노력했다.

이선준은 자신이 지켜온 도덕성이 허구였고, 그저 아집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다가 박헌영이 한 노력의 결과물을 봤을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모든 폭력과 나쁜 짓들을 거짓말처럼 멈춰버렸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제정신이라는 게 번쩍 돌아왔다던가. 하지만 그래봐야 아무 소용 없다.

이선준이 원했던 대로, 이미 전부 망가져 버렸다. 나는 이를 갈며 소리친다.

“이미 다 늦었는데 이제 와서 사람인 척 하지 마 이 미친새끼야!”

“…….”

“더럽고 혐오스러운 새끼…. 개새끼가 될거면 끝까지 개새끼처럼 살아! 이제 와서 뭐! 뭐 어쩔건데! 네 약혼자 버리고 내 편 들면 내가 너 사랑할 것 같아? 그런 미친 짓거리들을 해놓고 이제 와서 안 하면 내가 고맙다고 눈물이라도 줄줄 흘리면서 너한테 매달릴 줄 알았어? 네가 말했지 나보고 저능아냐고, 네가 저능아야 이 더럽고 치사하고 졸렬한 악마 같은 새끼야!”

“…...”

이선준은 계속 말이 없다. 나는 계속 쏟아낸다.

“왜, 박헌영이 나를 용서하고, 이해하려고 한 게 눈에 보이니까 그제야 네가 한 짓이 심한 일이었던 것 같아? 네가 얼마나 미친놈이었는지 이제야 알겠어? 내 그런 행동 이해할 수 있는 게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지? 미쳐버려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이제야 네가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짓거릴 나한테 했는지 실감이 나? 내가 몇 번이나 비명을 지르고! 애원하고! 빌었잖아! 그 때는 눈길 한 번 안 주고 단 한 번도 배려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어떻게…. 설마 너…. 네가 나한테 하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경찰에 신고라도 했다면 정말 이선준은 철창 신세를 져야 했을 것이다. 이건 내 참을성이 대단하다고 시위하는 게 아니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씨발년이고 썅년이고 죽일 년인거 알아! 안다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너한테 날 그렇게 대할 권리가 있었던 건 아니야! 설마 몰랐어? 내가 등신 같은 년이고, 호구 정신병자라서 지금까지 다 받아준 거라고! 너도 말했잖아. 네가 아무리 쓰레기짓을 해도 내가 너 못 버리는 거 안다고, 그래서 나는 참을 거라고 말했잖아 응? 기억 나지?”

“기억나.”

이선준은 변명하지도, 해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인정하고 있다.

“쓰레기처럼 굴었으면 일관성이라도 있어봐. 이제 와서 미안하네 뭐네 해봐야 열받고 짜증나고 토할 것 같기만 하니까! 하던대로 해 병신아! 신나서 까부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다시 쌓으려고 그딴 짓거리 하는데? 역겨워 미친 새끼야!”

“…….”

“으으…. 으으으! 으아악! 악! 악!”

전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나도, 너도, 이 세상 전부가 무너져서 아무것도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무언가가 되어버리고 싶다.

부술 거면, 다시 쌓을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그게 당연한거잖아. 왜 절망의 끝을 맛보게 해놓고, 제멋대로 개과천선하고 나를 다시 제대로 사랑하려고 하는건데?

나는 이미 너 따위 너무 싫고 혐오스럽고 구역질 나는데. 왜 이제 다 꺼져버린 잿더미 속에서 불씨 하나를 찾으려고 하는데? 하던대로 해. 차라리 너를 혐오하면서 증오할 수라도 있잖아. 내 잘못이 아니라 네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

“이 따위로 변할 거면 애초에 다시 만났을 때 날 받아들였어야지!”

그러면 이런 힘든 일 없어도 되잖아.

그냥 서로 끌어안고, 키스하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면 되는 거였잖아. 이제 와서 자기가 병신이었던 걸 깨닫고 죄책감 느껴 봐야 아무것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잖아.

이미 전부 가루가 되어서,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렸어. 내가 그토록 애타게 바라고, 지켜왔던 마음 같은 건 이제 없어. 그냥 네가 싫고 밉고 열받고 추악하게만 느껴져.

이선준이 분노 때문에 치를 떠는 나에게 말한다.

“……박헌영한테 가라.”

“너 그냥 죽어.”

“왜?”

“죽어버리라고!”

“…….”

“너는 아직도 내가 물건으로 보이지? 네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개새끼야?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 그래 내가!”

이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이선준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한 채 내 말을 듣고만 있다.

“네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내가 걔한테 어떻게 가는데! 나는 내가 더러워! 더럽고 역겨워! 네가 내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쑤셨잖아! 내가 이래놓고 박헌영한테 이제 나는 너밖에 없어라고 하면서 안기라고? 연애라도 하라고? 너 미쳤어? 제정신이야? 아, 아니지. 하하, 우리 둘 다 옛날에 미쳤지? 그래. 야 이선준.”

“…왜.”

“엿 같은 개소리 집어치워.”

나는 이선준을 보며 말한다.

“끝까지 책임져. 나를 창녀 취급하고, 창녀처럼 만들었으면 끝까지 책임져. 이제와서 어디 다른 데에 떠넘기지 마. 착각하지 마, 나를 데려가란 얘기 아니니까.”

“그럼…. 무슨 소린데?”

“쓰레기처럼 굴 거면 끝까지 쓰레기처럼 굴라고!”

이제와서 사랑이니 뭐니 운운하면서 끈적거려 봐야 결국 더 불행해질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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