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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35화 (135/224)

00135 허구 =========================

이선준이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나는 편하니까 좋다. 한 달이 넘게 지나면서 점차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이었다.

미친 것 같은 섹스를 빼면 나와 이선준의 관계는 지나칠 정도로 건조했다. 대화도 없고, 그저 단답식으로 끝나는 개인과 개인의 시간일 뿐이었다. 거기서 이제 성행위가 없어지니 내가 하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대체 왜 오는거야?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 같이 있어야 할 이유도 잘 모르겠다. 이선준은 그저, 나를 보면서 응, 아니 수준의 짧은 대답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멸시나 적의 같은 건 없다.

그래서 행복한 건 아니다. 그냥 이상할 뿐이다. 뭔가 갑작스레 변해버렸는데, 도대체 왜 저렇게 변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짜증난다.

이제 와서 착해졌다고 내가 넘어갈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우리가 다시 애정이라는 걸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그런 건 이제 없다. 그리고 그러려고 한다면 내가 밀어버릴거다.

그러려면 내가 애원할 때 했어야 한다.

내가 울면서 용서를 구할 때 했어야 한다.

제발 사랑해달라고 구걸하던 때 그랬어야 한다.

나를 이미 사람만도 못한 물건 취급을 하면서 기어코 내 적의를 뽑아내놓고, 이제와서 되돌리려는 건 얕고 비열한 수작이다. 그래야만 하는 당위가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다.

이선준은 아직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선준은 자신의 의도와 마음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선준은 거실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뭔가 하고 있다. 나는 이번 달 일이 끝나서 아무래도 좋다. 쉴 일만 남았는데, 이선준이 저렇게 빤히 버티고 서 있으니 아무래도 거북하다. 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문을 나서자 이선준이 나를 부른다.

“어디 가냐?”

“그냥 카페 가려고.”

“나도 같이 가.”

“……네가 없는 데로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이선준은 내 말에도 듣지도 않고 노트북을 정리해 가방에 넣는다. 나는 그 막무가내식 행동을 멍하니 쳐다본다.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건 잘 알겠는데, 대체 왜 그러는데?”

“뭐긴 뭐야?”

이선준은 그렇게 말한 뒤 나를 가리킨다.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지.”

반박불가의 완벽한 아전인수식 논리다. 저런 이기적인 발화를 논파할 수 있는 논리라는 건 세상에 없다.

“또라이….”

나는 그 말밖에 할 수 없다. 다시 집에 눌러앉는 것도 좀 그렇기에, 결국 밖으로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주차장으로 간다.

“차 탈까?”

“아니, 걸어갈 건데.”

어차피 먼 곳으로 갈 생각도 아니었기에 나는 걷는다. 바람도 불고, 날이 좀 쌀쌀해졌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다. 볕도 꽤 따뜻하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겨울이다.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어쩐지 내 이름을 떠올리게 되고, 눈이 내리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행복해졌다.

하지만 나는 이제 설원이 아니고, 그렇기에 나는 겨울이 되면 내가 잃어버린, 내가 버리고 온 것들을 필연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작년 겨울은 내게 더욱 혹독했고 추웠으며, 외로운 시간이었다.

내가 잃어버렸고, 버렸던 것들은 이제 다시 내게 돌아왔다. 하지만 내가 원하던 방식은 아니었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현실이 시궁창이면 추억하면서 슬퍼할 것도 없다. 그러니 겨울이 곧 온다는 말이 의미하는 건 하나밖에 없다.

그냥, 겨울이 온다.

그뿐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한, 그저 불행한 채 그대로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 뭔가 바뀌려 하고 있다. 나는 내 옆에서 걷는 이선준을 쳐다본다. 이선준은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럴 일도 적었지만, 이선준은 내 앞에서 걷거나 뒤에서 걸었다. 그러기 싫다는 태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내 옆에서 걷고 있다. 내가 조금 앞서 걸어나가면 나를 따라오고, 내가 조금 뒤처지려 하면 자신도 걸음을 늦춘다.

“야.”

“왜?”

“너…. 지금 나랑 장난쳐?”

내가 화를 내자 이선준은 어깨를 으쓱한다.

“내가 뭐라도 했어?”

옆에서 걷는 게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이미 볼장 다 본 사이인 건 맞다. 하나부터 열까지, 안 해본 게 없다. 물론 나는 원해서 한 게 아니라 이선준이 원하는 걸 그냥 입술 깨물고 받아들였을 뿐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

그러니까, 옆에서 걷는 그 정도로 내가 화를 낼 필요도 이유도 없다. 우리는 밀고 당기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화를 내려고 해도, 결국 내가 민감한 게 된다. 그냥 그러고 싶을 수도 있는거다. 누구에게나 한 때의 변덕이 있는 것처럼.

그냥 내가 상대를 안 하면 그만이다. 이제 와서 사랑과 용서와 화해? 역겨운 짓 하지 마.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시키고, 각자 계산한다.

사실, 할 게 없다. 진짜로 이번 달에 할 일은 전부 끝나버려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이선준은 노트북을 펴고 자기 할 일을 한다.

이런 구도가 되니까. 오히려 내가 이선준이 일 하러 왔는데 내가 놀러온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오히려 노트북을 펼친 이후로는 나한테 눈길 하나 안 주고 저 할 일만 한다.

나는 일을 당겨 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그렇게 해야 할 만큼 업무량이 빡빡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냥 멍때리고 있다. 커피나 쪽쪽 빨면서.

차라리 나오지 말고 집에나 있을걸, 괜히 나왔다가 더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내가 테이블에 엎드려서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자 이선준이 웃는다.

“할 일 없냐?”

“어.”

“그럼 문장이나 좀 봐줘.”

“통합신인상 당선까지 되신 위대한 신인작가가 저 같은 어용잡지 기사나 싣는 미천한 이에게 뭐하러 그런 것까지 요구하십니까?”

내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비아냥거려도 이선준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할 거 없잖아.”

그래, 진짜로 할 거 없다. 이선준이 내 옆자리로 노트북을 들고 온다. 결국, 녀석이 쓰고 있는 소설을 본다. 원래 이선준은 애초에 완성되기 전까지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의견을 구한 적이 없었다. 하긴, 그 동안 변했을 수도 있다. 나는 이선준의 소설을 보며 문득 생각이 나서 중얼거린다.

“당선작 보면서도 생각한 건데, 문장 많이 바뀌었네.”

“너 그거 봤냐?”

“당연히 봤지.”

평범한 대화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가 묘하다. 당연히라니, 당연히 봐야 한다는 건 이상한 말이다.

그런 게 당연할 정도로 나는 너를 생각한다. 이런 뜻으로 받아들일 요지가 농후하다. 물론 그 때의 감정에서는 그게 당연한 거였다. 지금은 다르다. 이선준도 그렇게 받아들였는지 말이 없다. 나는 어쩐지 신경이 쓰여서 결국 덧붙인다.

“착각하지 말고, 그냥 봤다고.”

“누가 뭐래?”

아무 말도 하지 말 걸, 손해 본 기분이다. 아니, 진짜로 손해 봤다. 앓느니 죽지, 나는 워드 프로그램의 스크롤을 천천히 내리며 읽어간다.

“이런 그런 것 같다보다 그랬다로 바꾸는게 좋을 것 같은데, 일부러 혼란 줄 필요는 없잖아.”

“티 나냐?”

“조금, 애매모호한 감정을 묘사한다고 해서 애매모호하게 쓸 필요는 없잖아. 그럴수록 적확하게 묘사해야지. 결국 보는 사람도 애매하게 될 뿐이잖아. 예전에는 잘 하더니 왜 그래?”

“그냥, 소설에 대한 접근 방식이 좀 바뀌어서…. 그랬지 뭐.”

“그래, 구닥다리 리얼리즘 버리니까 바로 성공했잖아. 뭐든 대세를 타야 돼. 확실히 좋긴 좋네…. 다른 사람 소설인 줄 알겠어 그냥 보면….”

나는 완성되지 않은 소설을 보고 내 생각을 말한다. 나는 말을 잘 정리해서 말하지는 않지만, 핵심을 말하고 부연설명을 해가는 건 나름 잘 한다. 한참을 떠들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다.

어쩐지, 작가 지망생이 현직 작가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의식을 느끼는 순간 혀가 굳는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본다. 기분 나빴을까? 등단도 못 한 주제에 조언을 하고 자빠졌다니, 속으로 비웃을 게 분명하다. 자괴감과 함께 나에 대한 짜증이 솟아오른다. 오랜만에 소설 얘기 하니까 너무 흥분했다. 나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떠들었다.

이선준을 쳐다본다.

그 표정에 비웃음과 비아냥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그저 홀린 듯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에

-쪽

이선준이 내 입술에 잠깐 입을 맞추고 떨어진다. 그리고 자신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다.

얼마든지 했다. 키스도 했고, 입맞춤도 몇 번이나 했다. 섹스를 하면서, 펠라치오도 했고 지금까지의 몇 달 동안 안 해본 게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성행위를 동반했을 때의 경우다.

이렇게 갑자기, 이런 식으로 입맞춤을 한 기억은 없다.

“너, 너…. 뭐야?“

이제 와서 이런 것으로 당황하는 건 웃기다.

하지만 이건 좀 다르다. 이건 성욕과는 다른 지점을 시사한다.

웨딩촬영을 했을 때, 이선준이 내게 입맞춤했던 그 때와 같다. 마치 홀린 것처럼, 자석에 이끌리듯 한 그 때와 같다.

“어, 아…. 아니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이선준은 얼버무린다. 이제 이런 것으로 화를 내기에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그까짓’ 뽀뽀 한 번에 화를 내고 생색을 낼만한 사이는 아니다. 나도 이것에 화를 내는 게 웃기다는 걸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짜증나게 하지 마.”

이선준은 고개를 끄덕인다.

“어…. 그래, 미안.”

사과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되려 내가 놀란다. 진짜 이상하다. 이선준의 태도는 이상하다. 어쩐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가만 보고 있으면 소설을 쓰는 것보다 멍하니 있을 때가 더욱 많다. 요즘 들어 이상해서 이따금 관찰해봤다.

멍하니 있거나,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생각하는 듯 가만히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묻고 싶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알고 싶다.

하지만 입을 열기가 무섭다.

무엇인가 되돌리려고 할까봐 무섭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나란히 걷는다. 그냥 평범하게 걷는 것 같은데, 지나치게 거리가 가깝다.

우리는 연인이 아니고, 그런 관계가 되길 원하지도 않는다. 이선준의 손끝이 내 팔에 스칠 때마다 나는 기분이 이상해진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거리감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님을 말하고 있다. 내가 앞서 걸어가려 하자 이선준이 갑자기 내 손을 잡는다. 나는 너무 놀라서 몸이 경직된다.

“뭐, 뭐야….”

“싫어?”

이선준이 묻는다. 굳은 표정이지만 화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말한다.

“소름 끼쳐.”

“아…. 그래.”

이선준은 잡았던 손을 놓는다. 나는 안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너…. 진짜….”

사람 미치게 하려고 이러는거야? 이미 다 늦었는데, 네 손으로 다 부숴버려 놓고 이제 와서 달달한 연애라도 하자는 거야? 순서가 틀리잖아.

잠부터 자놓고 손 잡고 뽀뽀 하는 연애라고? 짐승처럼 밤바다 나를 강간했으면서 이제 와서 연애라고?

미친놈이 돌았나?

“정신 나간 새끼.”

나는 그렇게 말한 뒤 빠르게 걸어간다. 이선준은 따라오지 않는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온몸이 덜덜 떨린다. 죽여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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