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3 허구 =========================
“군대에서…?”
“네….”
“어, 어떤…. 어떤 미친 새끼가?”
“선임이요….”
“남자…. 말하는거야?”
“네….”
한정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굳건하고, 차가운 금속 같았던 한정운은 몸을 떨고 있다.
그런가. 단순히 마음에 관련된 고민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어. 그런 것도 있겠지만, 더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구나.
오늘 한정운은 어쩐지 감상적이고, 어쩐지 슬퍼 보였다. 우울해하는 게 너무 눈에 보였다. 하지만, 나는 한정운이, 그 한정운이, 감정이 거의 메말라 있는 한정운이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은 항상 이성적인 사고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실에 영향을 받으면서, 괴로워하지 않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 또한 이 녀석을 어떤 방식이든 정의하고 판단한 행동이었다.
“그, 그…. 분대장인데…. 하, 근무를 같이 나갔어요…. 거기서….”
한정운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손으로 감싼다. 그 뒤로는 아무 말도 없다.
그저 흐느끼는 소리만 들린다.
그래, 너도 사람이야. 너도 사람이라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당연히 힘들 수 있고, 당연히 남들보다 훨씬 힘들었을 텐데. 나는 내가 한정운의 그런 모습에 놀라서 오히려 미안하다.
“신고는…. 안 한거야?”
“……너무 수치스러웠어요.”
요즘 군대는 그런 게 없어진 줄 알았다. 그런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게이들은 군대에 안 갈 수 있다고 하지만, 군대에 간 게이가 없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어렵다.
게이든 레즈비언이든 이성애자든 뭐든, 그들이 나쁜 게 아니다.
나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한정운은 너무나 지독하게 그런 사람에게 걸려 버렸다. 불의에 저항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정운은 할 말 다 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 녀석도 그런 권위와 폭력 앞에 굴복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한정운의 손을 잡는다. 차가워져 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어떤 말이든 위로가 될 수 없다. 나는 그저 그 손을 내 작은 양손으로 붙잡고 그냥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다. 한정운의 어깨가 들썩이자 나도 같이 울적해진다. 불쌍한 놈, 진짜 불쌍한 놈.
“그, 그, 그러게 병신아… 군대는 왜 가서…. 이 멍청아 진짜…. 흑! 내가 너 메일 보냈을때….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이 병신 천치 머저리….”
나도 어쩐지 서러워져서 운다.
“누, 누나는 왜 울어요…. 바보같이….”
“흑! 나, 나 바보인거 이제 알았냐!”
우리는 둘 다 운다. 한정운이 너무 등신같고 바보 같고 가엾고 불쌍해서 운다.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 중에 쓰레기가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 쓰레기들은 항상, 자신이 아니라 남에게 상처를 준다.
한정운도, 나도 진정하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서로 울고 있으니 술집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쳐다보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공감능력이…. 아주 뛰어나시네요.”
한정운은 눈이 벌개진 채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그것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거다. 나는 한정운에게 조심스럽게 말한다.
“……아직도 계속 그래?”
“아뇨, 그 때 그런 이후로는 신경도 안 쓰더라고요.”
전역했으면 모르겠는데, 계속 부대에 있다. 군내성범죄는 중대한 문제다. 영창 수준이 아니라 육군 교도소에 수감될 수도 있다. 한정운은 다만, 그것을 증언하고, 전부 밝혀버린 뒤 피해자의 신상을 전혀 보호하지 않는 그 군대의 야만성을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군대는 고발자를 절대로 보호하지 않는다. 보호한다고,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항상 그들을 들춰내고 보복에 노출되게 만든다. 한정운은 보복당하지는 않겠지만, 전출을 가더라도 행정관에게 그런 사항이 인계될 것이다.
전역할 때까지 꼬리표를 달고 살 것이다. 그래서 말하지 못한 것이다.
“말해야죠.”
한정운은 그렇게 말한 뒤 술을 단숨에 들이킨다.
“전역할 때까지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어요.”
한정운은 결심했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다. 슬픔, 고통, 분노,
한정운이 많은 것들을 쏟아낸다. 처음 보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된다. 너도 그저 한 명의 평범한 사람이구나. 누구나 그런 것처럼.
TS바이러스에 걸렸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무언가가 되어버리는 건 아니야. 우리는 여전히 사람이고, 여전히 인간이고, 여전히 평범하다. 우리는 장애가 있는게 아니야.
비록 어떤 질병적인 뭔가가 내 정신을 개조해버려서 내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된거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도 내 마음이야.
패배자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고생하고 괴로워했던 모든 마음이 사실 그런 거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미쳐서 산산조각이 나버릴 수밖에 없다. 진짜로 죽어버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해답도 찾을 수 없다.
한정운이 말해준다.
“누나도….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봐요.”
한정운이 잔뜩 울어서 빨개진 눈으로 날 바라본다.
“누나가 한 것처럼, 저도 같이 울어줄 테니까.”
한정운은 이번에는 내 차례라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 그런 것까지 말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냈는데.
나도 말해줘야겠지. 내가 지금 어떤 구렁텅이에 발을 들이기로 선택했고, 지금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나는 박헌영을 만난 것부터 이야기한다. 하나부터 끝까지. 이선준과 어떻게 만났고, 무슨 대화를 했으며,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고 내가 무슨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까지 말한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한정운은 나를 보며 한숨을 쉰다.
“바보에요?”
“울어준다며!”
“바보한테 줄 눈물은 없어요.”
그래도, 딱히 할 말은 없다. 내가 바보인 건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한정운은 한숨을 쉰다.
“가르치려고 들 생각은 없어요. 누나도 그렇게 안 했으니까.”
나는 한정운에게 어떻게 하라고, 그게 최선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그런 조언을 하는 건, 마치 안다는 듯 얘기하는 건 나쁜 일이다. 내가 그랬기에 한정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한정운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까는 차가웠는데, 어느 새 따뜻해져 있다.
아직도, 내게 이런 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아직도, 내가 슬프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다.
완전히 다 떠나간 게 아니었다. 메말라서 갈라져버린 땅에, 누군가가 한 방울 물을 떨어뜨린 것 같다. 한 방울이지만, 어차피 금방 말라붙어서 없어져버릴 그 단 한 방울의 온기다.
하지만 그래도, 그만큼은 확실히 젖는다. 한 방울만큼은 확실히 젖는다. 나는 손을 덜덜 떨며 말한다.
“야아…. 나 너무 힘들어…. 흑, 지, 진짜…. 진짜 힘들어서 미치겠어. 죽어버리고 싶어…. 으으으으….”
다시 내가 운다.
“으윽! 끅… 흐으…. 흐윽!”
한정운도 눈가가 붉게 충혈된다.
술집을 나와서 우리는 마주보고 선다. 울 만큼 울었다. 속이 시원해지지는 않았지만 감정을 다 쏟아내 버린 탓에 어쩐지 홀가분해졌다. 한정운이 나를 보며 말한다.
“저 누나 집에서 자고 가면 안돼요?”
“응 안돼.”
내가 웃으며 거절한다. 물론, 한정운이 나와 그걸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는 뜻인 것 정도는 안다.
“내가 등신 같은 건 알지만, 나…. 그래도 약속은 지키기로 했어.”
아무것도 하지 않을거고, 오해할만한 상황을 만들지도 않을거다. 그리고, 솔직히 나도 그런 불안감이 든다.
한정운과 집에 가서, 이 녀석이 나를 끌어안아 버리면 나는 무너져 버릴거다. 사랑받는다는 그 기분에 취해서 무슨 짓이든 해버릴지 모른다. 명백한 지뢰를 밟아버리는 위험한 짓은 하기 싫다. 나는 지금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기 싫다. 이선준과의 약속만큼은 철저하게 지킬거다.
내가 떳떳해야 이선준을 매도할 수 있다. 죄책감이 들만한 일을 해버리면 내 자신이 그걸 못 견딘다. 나는 한정운을 보며 말한다.
“너는 잘 할 수 있을거야. 뭐든지.”
“……그렇겠죠?”
한정운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이 적당한 무게감이 어쩐지 나를 안심하게 만든다.
“힘들면 저한테 와요.”
“아….”
“제가 말했잖아요. 기억나세요?”
무슨 말을 말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어깨의 옷을 통해 한정운의 손이 가진 온기가 전해진다. 온기라는 건 정말 중요하다. 그걸 느끼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들뜬다.
“저는 언제나 누나 편이에요.”
“아…. 으, 그, 그래. 고, 고마워….”
“울지 말고요.”
“너…. 나 울리려고 그런 말 한 거 다 알거든?”
내가 뭐라고
내가 뭐기에
이렇게 만신창이 걸레짝이 되어버린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하는거야?
한정운은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끝끝내 울음을 참아내고 인사를 했다. 택시를 타고 한정운이 멀어진다. 생각해 보면 한정운은 언제나 내 편이었다. 박헌영과 이선준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내 편이었다.
이선준은 미쳤다. 박헌영은 떠나보냈다.
한정운은 아직 내 편이다.
[전역하면 기대하세요] – 한정운
[꿈이 크시네] – 나
우리는 메신저로 대화와 인사를 나눈다.
그래, 내 마음이 병리적 화학 반응으로 만들어진거라 해도 상관은 없어. 그냥 내가 받아들이면 되는거야. 더 이상 비관하는 것도, 비참해지는 것도 지쳤어. 그냥 하루를 숨 쉬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니까.
애초에, 이제는 너무 처참하게 짓밟혀져서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잘 안 든다. 박헌영을 좋아하고 한정운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건 감사에 따른 감정이다.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것만큼은 명백하다.
물론, 나는 사랑해야만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옛날의 생각은 이미 버렸다. 누군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해진다.
세상에 진짜는 별로 없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가짜라 해도 거기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어느 누구나 그렇듯, 영원불멸한 관계나 마음 같은 건 애초에 없다.
나는 길을 걸어 오피스텔로 돌아간다. 애초에 집 근처의 술집이었기에 그리 먼 길을 걸어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내가 불을 켜고 나갔던가?
집으로 걸어 들어가자.
소파에 이선준이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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