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1 허구 =========================
메일이 왔다. 한정운에게서다. 휴가 나왔는데 한 번 만나는게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음, 잠깐 고민을 했는데. 만나기로 했다. 이선준의 구속에 걸리느니, 차라리 뻔뻔하게 말하는게 낫겠다 싶어서 먼저 말했다.
[한정운 휴가 나온대서 만날거야.]-나
[싫어]-이선준
[꺼져]-나
[싫다고 했다]-이선준
[안된다고는 안 하는 거 보니까 네 요구가 말도 안 된다는 건 아나보네 나는 네 애완동물 아니야]-나
[너는 그 개새끼가 너 살기로 했던 거 나한테 말만 해줬어도 이딴 일이 안 벌어졌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냐?]-이선준
[의리 있는 녀석이라서 더 믿음이 가는데?] –나
[그리고 네가 그 따위가 된 건 너랑 내 잘못이지 걔 잘못 아니야]-나
[그리고 씹새끼야 너 네 약혼녀 나한테 찾아온 건 알아?]-나
[나한테 엿 같은 걸로 피해 주지 마]-나
[너 하나만으로도 열받고 짜증나고 벅차]-나
이선준은 약혼녀 얘기가 나오자 차마 답장을 못 보내고 있다. 결국 답장 하나만 덩그러니 날아온다.
[약속 지켜라]-이선준
[ㅇ]-나
우리 관계는 쿨하지 않다. 지저분하고 애증이 뒤엉켜서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더 이상 서로에게 구차하게 들러붙고 애원하지는 않는다. 이선준은 내 어떤 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만큼은 확실하고, 나도 그걸 인정한다. 그리고 나도 그 약속을 배반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절벽으로 미끄러지다가 어느 순간 돌부리에 걸려버린 차 같은, 그런 것이다. 여전히 위태롭다. 하지만 일단은 멈춰있다.
아주 잠깐의 경직된 상태다. 언젠가 막장으로 치닫고 산산조각이 나버릴거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그 때가 언제일지는 나도 모른다.
일단, 그게 지금은 아니다. 나는 한정운에게 내 전화번호를 메일로 전송한다.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네요.”
한정운은 집에 들렀다가. 약속한 장소로 나왔다. 아직 볕이 따뜻해서 두꺼운 외투를 입을 만한 계절은 아니다. 나는 검은 스타킹에 검은색 구두, 고동색 원피스에 가디건을 걸치고 있다. 여름 내 볕에 그슬렸는지 한정운은 얼굴이 좀 탓다. 모자를 쓰고 청바지에 셔츠 차림이다. 군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썩 잘 생겼다.
“누나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요.”
“티 나냐?”
내가 웃으며 말하자 한정운도 엷게 웃는다. 진짜로 반쪽이 된건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차를 탄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글쎄요…. 흠. 어지간한 건 어제 다 먹어서.”
어제 다 먹었다니, 하루 종일 먹기만 한거냐? 한정운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게 묻는다.
“커리 좋아하세요?”
“커리?”
“네, 저는 좋아하는데. 향신료가 좀 강해요. 안 맞는 사람들은 안 좋아할걸요.”
“음, 나 뭐든 잘 먹긴 해.”
“그럼 가죠.”
한정운이 네비게이션을 찍어주는 대로 운전을 했다. 도착한 곳은 인도음식을 파는 전문 식당이었다. 커리라, 듣기는 했지만 먹어본 기억은 없다. 우리는 테이블에 앉았다.
“뭐 시키실 거에요?”
“……뭐가 이렇게 많냐?”
직원들은 전부 외국 사람인 듯 가무잡잡하다. 그렇게 비싼 곳은 아니지만, 뭐랄까, 전문적인 느낌이 확 온다. 나는 결국 모든 주문을 한정운에게 맡긴다.
안남쌀로 만든 볶음밥, 작은 그릇에 담긴 커리, 그리고 난이 나온다.
“이렇게 먹으면 돼요.”
난을 찢어서 커리를 얹어 먹는 건 어쩐지 재미있어 보인다. 나는 한 번 먹어보고, 커리의 강한 향에 놀란다. 약간 느끼한 것 같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맛이다.
“괜찮네.”
“다행이네요.”
“카레랑 전혀 상관없는 음식인 것 같아.”
“그건 일본에서 개량한 거니까요.”
음 그런가. 우리는 평범하게 식사를 한다. 한정운은 의외로 군대에 대한 분노를 터뜨린다.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너 살짝 소시오패스 아니야? 정상적으로 군 생활 가능해?”
“엄청 심하게 말하시네요.”
“맞잖아.”
“……하아. 저도 못 할 줄 알았어요.”
한정운은 볶음밥에 커리를 얹어 먹으며 말한다.
“그런데, 그 말 정말 싫어하고 폭력적인 발화라고 생각하긴 하거든요?”
“응.”
“하니까 되더라고요….”
어쩐지 패배감에 젖은 목소리로 한정운이 말한다. 하면 된다. 진짜 짜증나고 엿 같은 말이다. 군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조리한 상황들을 퉁 치는 엿 같은 말이지만….
글쎄, 진짜로 하면 된다. 힘들어서 문제지. 나는 한정운의 말이 웃겨서 낄낄 웃는다. 어쩐지 입가의 근육이 아프다. 너무 오랜만에 웃어서 그런 건가?
이런저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한다. 평범하게 즐겁다. 한정운은 내가 보낸 편지 때문에 부대에서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엄청나게 받았고, 여전히 받고 있다고 했다. 내가 웃자 한정운은 정색하면서 이게 웃기냐고 나를 질타했다. 그래서 사과했다.
“너, 너무 많아….”
“좀 그렇긴 하죠.”
적어 보이지만 의외로 많아서, 남겨버렸지만 한정운은 계속 먹는다. 저게 다 들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먹는다. 나는 어쩐지 한정운이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잘 먹네.
“……상당히 거슬리는 시선인데요.”
“잘 먹으니까 보기 좋아서.”
내가 웃으면서 보자 한정운은 한숨을 푹 쉰다.
“저를 이성으로 보지 않는 그런 시선…. 불쾌합니다. 남동생 취급 하는 편지 보내서 저를 진짜 동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애초에 군인은 이성이 아니라 다른 종족이잖아.”
“……환멸했어요. 누나가 그런 저급 농담을 지껄이는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
한정운이 인상을 팍 쓰지만 나는 그저 웃을 뿐이다.
“나 원래 엄청 저질이야. 알잖아?”
지금은 저질이라는 말에게 실례가 될 정도로 저질이지. 나쁜 기억들 밖에 없으니 뭘 생각해도 기분이 나빠진다. 한정운은 모를거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한정운의 대답이 나에 대한 환멸과 멸시는 아닐 것이다. 한정운은 이선준과도, 박헌영과도 다른 어떤 사람이다. 핀트가 약간 어긋나 있다고 해야 하나. 녀석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중얼거린다.
“저질이라니…. 흐음, 상당히 음탕한 발언을 하시네요.”
“뭐? 으, 으, 음탕?”
“당황하시는 건 여전히 귀엽네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게 아닌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뜻으로 한 건 아니잖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음탕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왜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거야? 내가 어쩔 줄 몰라하자 한정운은 티슈로 입을 닦으며 일어난다.
“다 먹었으니까 가죠.”
“으, 아. 그래….”
내가 뭔가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런 말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된 건 아니다. 여전히 부끄럽다. 이선준 앞에서만 폭발하느라 마구 쏘아대는 것뿐이다.
차를 타자마자 한정운이 한 말은 생각지도 못했던 거였다.
“어디 한적한 데에서 드라이브 하고 싶어요.”
“너 왜 사람이 갑자기 감상적이냐.”
“죽을 때가 됐나보죠.”
“무서운 소리 하지 마.”
그래도 나는 그 말대로, 한적한 도심을 빠져나와 드라이브를 한다. 평온한 국도를 천천히 달린다. 추월할 놈들은 추월한다. 한정운은 흘러가는 풍경들을 보며 말이 없다. 무슨 생각에라도 잠겨 있는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차를 몰다가, 먼저 말을 꺼낸다.
“고민이라도 있어?”
내가 묻자 한정운은 짧게 대답한다.
“그냥요. 그냥….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네요.”
“그래.”
선택한 군생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들어하면 안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겪었듯, 어느 새 지나가 버린다. 기억도 안 나는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다. 나는 평범하게 말한다.
“언젠가 다 지나갈거야.”
뭐든지 언젠가는 지나가 버린다. 이 말은 한정운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지나간다. 모든 순간들이 흩어져서 사라진다. 지금의 이 고민도, 고통도, 언젠가 이선준과 멀어지게 되면 과거의 일로 기억에 남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오게 될거야. 한정운은 내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말한다.
“네. 그렇겠죠. 하지만…. 안다고 해서 견뎌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 말도 맞다. 언젠가 지나간다고 해서, 결과를 안다고 해서 과정을 묵묵히 견뎌내야만 하는 건 아니다. 힘든 건 힘들다고, 서러운 건 서럽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정운은 창밖을 보며, 마치 체념하듯 말한다.
“요즘 들어서…. 부쩍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 말이 주는 의미를, 나는 알고 있다. 너무 놀라서, 나는 잠깐 멍해졌다.
“내가 이해한 뜻이 맞는거지?”
“네.”
한정운은 창밖을 보며 조용히, 하지만 진한 슬픔이 묻어나오는 듯 중얼거린다.
“여자로…. 돌아가고 싶어요.”
한정운도, 나도 말이 없다. 많이 힘든가보다. 아니, 단순히 군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항상 고민하고 괴로워했을 테니까. 돌아가고 싶다 생각할 수도 있다. 내 경우에는 내 사라진 남성성을 위해 그리 열심히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냥 내 경우에 불과하다. 다른 발병자들은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정운처럼 발병이 오래된 사람이라도,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차를 달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갓길에 차를 세운다.
죽어야만 끝나는 내 슬픔이, 혹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아주 멍청한 생각을 한다. 차를 세운 나를 한정운이 보고 있다. 나는 눈을 마주보며 천천히 말한다.
“돌아가고 싶어?”
“…….”
내 말에 한정운은 대답이 없다. 내가 한정운 앞에서 죽으면, 한정운은 다시 여자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의 얼굴로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성별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잠시 침묵한 한정운이 입을 연다.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살기 싫으세요?”
“응….”
“여전히…. 죽고 싶어요?”
“응….”
죽어야만 할 이유, 그런 게 조금이라도 더 생긴다면 나는 미련 없이 죽음을 택할 것 같다. 한정운은 피식 웃는다.
“저는 남의 목숨 짊어지고 살기는 싫어요. 그냥 이대로 사는 게 편해요.”
“그래.”
“죽지 마세요.”
“응. 일단은.”
누군가 내 죽음을 필요로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냥…. 죽기 위한 핑계가 필요했던 거야.”
삶에 별 미련이 없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걸 알면서도 무심코 해버렸다. 해가 짧아져서 드라이브를 다시 하자 곧 날이 졌다.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생각을 조용히 이어나가고 있을 뿐이다.
침묵을 깨고 한정운이 입을 연다.
“그거 알아요?”
“응?”
“최근에 연구결과가 나왔대요. TS바이러스에 대해서. 뭐…. 심리적, 귀납적 결과지만 말이에요.”
“뭔데?”
“누나는 우리가 왜 이런 외모로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호감형, 미형, 미남, 미녀로 바뀌잖아요.”
“글쎄…. 별로 생각 안 해본 것 같아.”
아주 예전에, 박헌영은 초월적 우주의지가 어떠니 그랬지만,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그냥 그러네, 예쁘니까 좋네, 예쁘니까 좆같네. 딱 그런 생각들만 했다.
“최근에 러시아에서 백인 남성이 TS바이러스에 걸렸는데. 백인 남성이 되었어요.”
“…무슨 소리야? 그건 TS가 아니잖아.”
인종이 변하는 경우는 있다. 백인에서 흑인, 황인에서 백인 그런 경우는 꽤 보고되었다. 그래서 세포 단위의 신체 재구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맞아요. 연기에 휩싸여서 외모와 골격이 변했으니까요. 하지만…. 남자에서 남자로 변했어요.”
“그럼 축복받은거네. 미남으로 재탄생했잖아? 돈도 안 쓰고.”
쳇, 차라리 나도 그랬다면 별 불만 없이 잘 살았을 텐데. 거지 같은 일들도 안 겪고. 얼마나 좋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한정운이 충격적인 말을 던진다.
“그 사람, 게이였어요.”
어,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갑자기 휘청해서 핸들을 놓칠 뻔했다. 가까스로 핸들을 부여잡고, 나는 차의 속도를 늦춘다. 늦춰서 차를 다시 한 번 갓길에 세운다.
“그, 그게 무슨…. 무슨 소리야?”
한정운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정운은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천천히 말한다.
“TS바이러스는 성별이 바뀌는 바이러스가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기본 조건이 성별 전환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형의 모습으로 바뀌는 거에요.”
한정운은 그렇게 말한 뒤 차창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 작품 후기 ============================
5/3~5/5 까지 템플스테이를 가는 관계로 설원은 잠시 연재가 안 될 것이다. 예약 아이템도 없고....
거기서 글 많이 써올게 인터넷 되면 올릴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