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0 허구 =========================
시간은 지나고, 9월이 되었다. 이선준은 약혼식을 했다. 당연히 내가 찾아가고 그러지는 않았다. 이선준은 올래? 라며 물었지만 나는 쌍욕을 퍼부어 줬다.
기분이 조금 엿 같았을 뿐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선준은 여전히 이따금 찾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말밖에 없다. 욕을 하고, 비난을 하고 매도를 해도 이선준은 꼼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나도 안다. 별 의미 없는 반항에 불과하다. 나는 침대 위에서 결국 이선준에게 항복한다. 아프고 아파서, 제발 용서해 달라고 빈다. 오히려 이선준은 그런 걸 즐긴다. 처음부터 신경질적이고, 화 내고 욕하다가. 결국 섹스를 빙자한 폭력 앞에 굴복해서 애원하는 나를 보며 흥분한다.
처음에는 살살 하라고 욕을 하다가, 나중에는 기운이 빠져서 헥헥거리기만 하다가. 내가 결국 울고,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제발 그만 해달라고 애원하면 그 때에야 사정한다. 이선준은 그런 내 모습을 즐긴다. 내가 완전한 항복의 의사를 표시할 때, 이선준도 나를 놔준다.
마치 정형화된 패턴처럼, 우리는 이미 그런 관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관계는 묘하게 안정되어 있다. 나도, 이선준도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나는 욕을 하고 신경질을 내며 내 억눌린 마음을 풀어내고, 이선준은 그런 말을 전부 받아낸다.
그리고 이선준은 나를 거꾸러뜨린 채 내게 들었던 매도를 되돌려준다. 몸으로, 언어로 나를 강간한다. 그 때 나를 굴복시키며 쾌감을 얻기 위해, 평소에 내가 하는 모든 욕과 매도를 참아낸다. 아무것도 안 할 때에 나는 신경질적으로 굴고, 이선준은 대충 뭉개버리듯 말을 받아넘긴다.
나는 이선준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저 섹스하기만을 원하는 귀찮은 자식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 아예 허락하고 체념해 버렸더니 마음이 아파질 일이 없다. 결국 나는 이선준이 나를 다시 사랑해주길 바라는 욕심 때문에 불행과 괴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 이선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내게 싫증내고 떠나가버리면 될 그런 관계다. 그래서 우리는 질척하지 않다. 섹스를 마친 뒤, 우리는 소파에 앉아있다.
“야, 배고파.”
이선준이 말한다.
“알아서 처먹어. 요즘 편의점 도시락 좋던데 그거 사먹던가.”
내가 대답한다. 섹스 이외에 내가 이선준에게 헌신해야 할 건 없다. 이선준도 그걸 요구했으니 내게 그런 걸 강요하지 않는다. 이선준은 잠시 고민하더니 핸드폰을 꺼낸다.
“시켜먹어야지.”
“나는 짬뽕.”
“……너 미쳤냐?”
내 말에 이선준이 인상을 찌푸린다.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하며 빈정거린다.
“그럼 복도에서 처먹던가. 내 집에서 먹을거잖아.”
“…….”
“결정해.”
“아까 제발 그만 좀 해주세요. 잘못했어요. 말 잘 들을게요 이러면서 울던 사람은 어디의 누구냐?”
이선준이 약 이십 분 전의 나를 들먹이며 말한다. 솔직히 아직도 누가 내 거기를 꾸욱 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이 남아있다. 나는 인상을 쓰며 말한다.
“하, 사람을 심신미약 상태가 될 때까지 학대해놓고 그 때 한 말이 유효할거라고 생각하냐? 내가 착해서 봐주는거지 너 옛날에 철창 들어갔어. 고마운 줄 알아 이 색마 새끼야.”
“지금 또 할까 그럼?”
“……오늘은 끝이야. 더 하려고 하면 물어뜯어서 죽여버릴거야…. 아, 아! 진짜 아프다고 이 미친놈아!”
이선준이 나를 다시 깔아뭉개려고 해서 나는 몸부림치며 빠져나온다. 나는 주방 쪽으로 도망치고 이선준이 피식 웃는다. 결국 이선준은 짬뽕과 짜장면, 탕수육을 시킨다.
이상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점점 이상해졌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없어져버리고, 이상한 의무 같은 것만 남아버린 탓이다.
우리는 섹스를 한다. 만나면 꼭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런다. 내가 심하게 아프면 입으로 해결하든 뭐든, 꼭 성애와 관련된 행동을 한다.
뭐라고 해야 할까.
사이가 엄청 나쁜 친구처럼 되어버렸다.
서로를 매도하고 미워하지만, 정기적으로 만나서 성애를 하는 섹스 파트너다. 아무런 애정도 사랑도 생기지 않는다. 우리 둘 다 그런 걸 기대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쩐지, 우리는 평범하지는 않지만 대화를 한다. 이상한 관계다. 너무 이상해서 가끔은 우리 둘 다 이미 심각하게 돌아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게 맞겠지. 세상에 이런 정신나간 관계 같은 게 어디있어?
우리는 서로 배달 음식을 먹고, 포장해서 현관에 내놓는다. 내가 그릇을 내놓고 들어오는데 이선준이 베란다에 있다.
“야, 집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베란다잖아 뭐 어때.”
“냄새 나는거 짜증나!”
“너 그런데 그런 거 치고는 왜 재떨이까지 사놨냐?”
이선준이 베란다에 놓여 있는 재떨이를 가리키며 말한다.
“너가 자꾸 창밖으로 버리니까 그런거 아냐! 남들한테 민폐라고!”
“그럼 피워도 된다는 거잖아.”
“아니, 이…. 진짜 또라이냐 너?”
“아 좀 참아 내가 평생 있냐?”
실랑이 하는 것도 지친다. 진짜 막무가내에 제멋대로다.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
“가만 보면 마누라 행세를 하려고 해.”
“…….”
나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져서 말을 잊는다. 상대를 말아야지 하고 나는 TV로 시선을 돌린다.
“뭐야, 화났어?”
“그거 다 피우고 꺼져.”
“에이 화났네, 내가 마누라니 어쩌니 해서 화난거냐?”
“야, 꺼지라고 씨팔새끼야. 말 섞어주니까 내가 니 친구로 보이냐? 섹스 했고 밥 처먹었으면 가.”
내가 독살스럽게 쏘아붙이자 이선준은 여전히 웃으며 담배를 비벼 끄고 내 앞을 지나간다.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
나는 가만히 앉아서 이선준이 나갈 때까지 꼼짝 않고 있는다. 문이 닫히고 도어락 잠기는 소리가 들릴 때에서야 나는 숨을 내쉰다. 내가 잠깐 착각을 했다. 이런 건 아무리 좋게 봐줘도 친구는 아니다. 그저 악연에 지나지 않는다.
“하아…. 염병할.”
둘 중 하나가 사고든 병이든 죽어버려야 이 엿 같은 관계가 끝날거다. 자살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선준이 어디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짧은 시간이었다. 두 달 조금 지나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완전하게 변해버렸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저 의무처럼 만나고 성애라고 부르기 어려운 그 짐승 같은 일들을 한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해버린다. 애정이라는 것은 이미 고갈되어서 말라 없어져 버렸다.
이선준의 여유 넘치는 표정이 싫다. 내가 아무리 욕을 하고 발악하고 매도해도 결국은 자기가 승자라는 걸 안다는 듯한 그 표정이 싫다.
9월이다. 날씨가 조금 쌀쌀해지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박헌영과 완벽하게 절교해버렸고, 이선준과은 내 몸을 요구하는 주제에 약혼까지 한 인간쓰레기가 되었으며, 나는 그런 인간 쓰레기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대주는 쓰레기만도 못한 사람이 되었다.
하하,
나는 대체 왜 사는거지?
기분이라도 전환할 겸 바깥으로 나간다. 청바지에 후드티 차림으로, 산책하기 좋은 날씨다. 이선준하고는 데이트나 외출 같은 걸 전혀 하지 않는다.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혼자 있는게 편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깥으로 나온다.
바깥으로 나와서 무작정 걷는다. 그런데 갑자기
“야.”
하고,
누가 나를 부른다. 다른 누군가일지도 모르지만, 아주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이건 나를 부르는거다.
“저요?”
어떤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를 내면서 내게 다가온다. 베이지색 가디건에 웨이브 넣은 연갈색 머리, 선글라스, 큰 키에 핸드백을 들고 있다. 브랜드 네임 정도는 이제 알기에, 저 여자가 들고 있는 핸드백이 상당한 고가의 명품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 너.”
“저 알아요?”
“그럼 알지.”
그 여자가 나를 바라본다. 힐까지 신은 탓에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저런 시선 알고 있다. 깔보고, 무시하는 시선이다.
“너, 선준이 그거지.”
“……그게 뭔데요?”
대충 감이 온다. 이 실루엣, 이 얼굴, 어디서 본 적이 있다.
“하, 진짜…. 짜증나네. 너 선준이랑 몰래 만나는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이선준의 약혼녀다. 아…. 상황이 귀찮게 된 것 같다. 뭐야 이 년은 대체 왜 내 집 앞에서 잠복을 하고 있는거야? 그 여자는 잡아먹을 듯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음, 잠깐 여기로 와봐요. 조용한 데에서 얘기해요 우리.”
나는 오피스텔 건물을 걸어서 대로변 쪽이 아니라 뒤편의 공원 쪽으로 나간다. 주차장이 아니라 바깥이다. 그 여자는 내가 제멋대로 걸어가자 뭐라고 중얼거리며 따라온다.
“야, 너 뭔데 그렇게 당당하냐?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예전부터 감은 잡고 있었는데 증거가 없어서 벼르고 있었거든?”
“너 뭔데 반말이냐?”
아직 낮이지만 이 근방에는 사람도 없고 으슥한 곳이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그 여자를 벽과 나 사이에 둔다. 그리고, 외출 시에 항상 휴대하는 전기죽창을 꺼내든다. 나는 인상을 쓰며 그 여자를 노려본다.
“너, 너 그거….”
“너 뭐야, 어? 뭔데 날 스토킹해?”
-파지지직!
굉음과 함께 푸른 스파크가 튄다. 그 여자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뒷걸음질친다. 나는 그 여자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내가 이런 문제에 엄청 민감한 사람이거든? 네가 뭘 바라고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는지는 모르겠는데, 사람을 대뜸 찾아와서 반말 지껄이면 내가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할 줄 알았어?”
“너, 너너너미친년! 너 경찰에 신고할거야!”
사람은 폭력 앞에 무력하다. 내가 그랬고 이 여자가 그런 것처럼. 그 여자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표정이다. 나는 인상을 쓰면서 그 여자를 노려본다.
“신고해. 나는 너 스토킹으로 고발할거니까 어디 해 볼래?”
“뭐? 내가 뭘 널 스토킹을 해!”
“집 근처에서 내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따라 오는게 스토킹이지 그럼 다른 게 스토킹이냐? 너 진짜 정당방위가 뭔지 보여줘?”
내가 스턴건을 들자 그 여자는 벽에 착 달라붙는다. 이 여자는 구두, 나는 운동화가, 도주전에서도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 여자는 이를 악문 채 부들부들 떨다가 입을 연다.
“얘, 얘기, 말로 해…. 이 정신나간 년아!”
“내가 할 말은 하나밖에 없어.”
여러가지 의미로, 나는 강해졌다.
“이선준 뭘 하건, 걔한테 따져! 왜 나한테 지랄이야?”
기분 잡친다.
“나도 그 새끼 만나기 싫어. 네가 알아서 가져가 줬으면 좋겠다고. 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그런데 그게 사실이야. 나는 진심으로….”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를 쳐다보며 말한다.
“그 새끼 싫어하니까.”
나는 스턴건을 집어넣고 벙쪄있는 그 여자를 뒤로한 채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돌아온다. 결국 다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