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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28화 (128/224)

00128 고독 =========================

하지만, 더 이상 박헌영을 만날 수 없어. 결국 또 다른 기만의 시간들을 보내게 될 뿐이다. 박헌영은 많이 참았다. 올곧게 참았다. 나를 다시 받아들이려고 했다. 내가 준 상처가 다 낫지 않았고, 그저 묻어둔 채 넘어가려고 했다.

너도 나를 미워할거야.

너도 나를 증오할거야.

결국 나를 혐오할거야.

하지만 이선준에게서 제멋대로 떠나서 이선준에게 상처를 준 것처럼, 박헌영에게 또 그런 짓을 하는 건 안된다. 무슨 일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결정해야 한다. 설명해야 한다.

“나…. 이선준이랑 어떤 약속 같은 걸 했어.”

“…….”

“미안해…. 미안해 정말. 나는…. 나 따위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밖에 없었어.”

박헌영은 굳은 표정으로 내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 대체, 그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고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해?

이선준을 버리고 박헌영에게 가면, 이선준을 다시 한 번 배신하는 게 된다.

이선준의 말대로 박헌영을 만나지 않으면, 박헌영을 배신하는 게 된다.

그냥 다시 떠나버리면, 둘 다 상처입히게 된다.

박헌영과 몰래 만난다면, 관계를 유지한다면, 결국 박헌영과 이선준을 둘 다 기만하는 게 된다.

대체 뭘 선택해야 해?

대체 어떻게 해야 더 나아질 수 있는데?

왜 내가 하는 모든 선택은 배신과 기만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나는 박헌영에게 사죄하듯 고개를 숙이고 말한다.

“나는…. 더러운 년이야.”

애를 끊듯 눈물을 찍어누르며, 고개를 숙인 채 말한다. 울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에서 나는 눈물을 참아내지 못한다. 예전부터 많이 생각해왔다.

울어야만 하는 순간이 너무 많다.

“나는…. 몸이나 대주는 역겨운 년이야….”

박헌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를 학대한다. 자괴하고, 자조하고, 나를 비참하게 짓이겨 버려서. 차라리 박헌영이 나를 먼저 혐오하게 만든다. 나를 혐오하고 저주해 줘. 더 이상 아무것도 희생하지 말고, 아무것도 참지 말고, 아무것도 우겨넣지 말고 그냥. 순수하게 나를 미워해 줘.

너에게 미움받는 편이, 너의 배려를 받으며 괴로워하는 것보다 훨씬 나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감동 같은 거 해봐야 아무 소용 없어. 나는 동정받을 가치 같은 건 없어.

“나를 정당화하기는 싫어…. 나는 최악이야. 이기적이고, 나만 생각하고, 아무도 배려하지 않았어…. 나를…. 나를 미워해. 나를 욕해. 저주해 줘 차라리.”

“….”

“더 이상 나를…. 배려하고 동정하지 말아줘…. 우리 만나지 말자…. 더 이상 마주치지 말자….”

결국 절교 선언을 해버린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박헌영을 본다. 화가 난 표정. 박헌영이 화난 모습이다. 세상에서 제일 보기 힘든 표정이다. 나는 이 말만큼은 하기 싫었다. 하지만 해야겠다. 할 수밖에 없다. 나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 하면서 천천히 말한다.

“네 배려가 나한테 너무 과분해…. 나를 미워해 줘…. 부탁이야…. 아무것도 보답해 줄 수 없는데 그런 마음 받아버리면…. 나는 더 괴로워져.”

차라리, 어차피 그런 상황이 오게 될거라면 지금이었으면 좋겠어.

나를 미워해 줘.

나를 욕해.

네 사랑은 나에게 너무 과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런 내 자신이 너무 싫어져.

“눈물 닦아.”

박헌영이 휴지를 건넨다. 나는 받은 휴지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다. 박헌영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씨발년아.”

“……미안해.”

박헌영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 말을 묵묵히 듣는다. 그래, 그렇게 나를 미워해 나를 욕하고 짓밟아버려.

“이거면 되는거냐?”

“….”

아…. 너는 마지막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드네. 그래, 이것마저도 배려구나. 두 번째의 헤어짐 앞에서도 너는 나를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하는구나. 하지만 박헌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욕했다.

“하나만 부탁하자. 네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야.”

“응.”

“죽지는 마라.”

“…….”

확언을 줄 수 없는 부탁을 박헌영이 한다. 박헌영이 나를 보며 말한다.

“그거 알아?”

“어?”

“TS바이러스 발작 일으킨 사람은 노화가 엄청 느린가봐.”

“…….”

“아깝잖아. 이렇게 예쁜데 죽어버리면….”

박헌영은 바이러스에 대해서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말은 사실일거다. 박헌영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그리고 내 앞에 내려놓는다.

“그냥 예전에 쓴 소설이야.”

“이게…. 뭐야?”

스프링 제본이 된 인쇄 A4용지다. 박헌영은 내게 그걸 준다.

“그냥 나는 가끔…. 어떤 상황이 있으면 그걸 소설로 써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차분해지거든. 시간날 때마다 썼는데…. 좀 분량이 많아졌어. 누구 주려고 쓴 것도 아니고…. 그냥 생각해보는거야. 그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을 느껴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거든.”

“응.”

“너한테만 특별히 알려주는거야. 그리고 이런 식으로 쓴 소설중에…. 누구한테 주는 것도 처음이야.”

“나…. 주는거야?”

“그래, 원본도 지워버렸어. 그리고 뭐…. 다 쓰지도 못했어. 하고 싶으면 네가 완성해봐도 되는거고.”

박헌영은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뒤,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는다. 나는 얌전히 그 손길을 받는다. 마지막이구나, 진짜로 마지막이야. 이제 박헌영은 내 삶에서 영원히 퇴장한다. 도망친 저번과는 달라.

이건 완벽한 단절이자 이별이다. 다음 같은 건 이제 없다.

“그럼…. 간다.”

박헌영은 끝까지 결국 웃지는 못한 채 카페를 나간다. 나는 그 스프링 제본이 된 그 책을 본다. 제목이 있다. 그걸 보는 순간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으, 으윽…. 으으으! 흑!”

『그래도 설원입니다』

그 제목이 박헌영이 지나쳐온 모든 고뇌와 슬픔을 너무나 절박하게 말해준다.

“아, 아으…. 으으…. 으흑!”

나는 내 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내 몸을 쥐어뜯는다.

박헌영이 고뇌와 분노, 슬픔을 해결해온 방법은 소설을 쓰는 거였다. 나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박헌영의 방식은 달랐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소설을 쓴다. 마치 배설하듯.

너무나 박헌영적인 방식이다. 이렇게나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나는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박헌영을 다시 만날 일은 없다. 이선준이 만나지 말라고 해서가 아니다.

『그래도 설원입니다』의 화자는 나다. 어찌보면 남의 의지와 생각을 가져간다는 걸 보면 오만하지만, 박헌영은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이해하고 싶어했다. 이렇게나 많이 써야 할 정도였다. 나는 호기심과, 죄책감과, 부채감과, 슬픔 때문에 책을 펼친다.

‘세상은 우리에게 꿈을 강요한다.’

그 문장을 처음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박헌영이 나를 이해하려고 했던 노력을 읽는다. 내가 변하기 전의 그 날부터 시작된 소설은 쭉 내용이 이어진다. 재미있고 없고를 떠나서, 슬프다.

박헌영은 이 정도로 노력해야만 했다. 물론, 박헌영이 모르는 일 같은 건 써 있지 않다. 그저 추측으로, 어렴풋이 그 빈 공간들을 채워가고 있을 뿐이다. 박헌영과 만난 나에 대해서, 내 생각에 대해서 쓰여있다.

나는 그 소설을 계속 읽어내려간다. 읽는 내내 눈물을 멈출 수 없다.

============================ 작품 후기 ============================

이건 소설적 장치일 뿐, 이 소설 전체가 사실 박헌영이 쓴 소설이었다! 이런 건 아님.

박헌영도 이선준처럼 설원에게 분노하고 증오했지만, 설원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만큼이나 노력했다는 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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