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7 고독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기에 나는 일을 한다. 취재를 가고, 기사를 쓴다. 우울하다고 해서 사는 걸 놔버리지 않는다.
나는 내 삶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게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아무도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 그런 건 그냥 어리광에 불과하다. 예전에는 슬프고 힘들면 방구석에 처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남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 같은 것들은 어떻게든 꼭꼭 붙들고 가서 해냈다. 그 발암이라는 조별과제도, 남들에게 피해 주기 싫어서 펑크 내는 일은 하지 않았다. 물론,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건 하기 싫다고 안한 적 많지만….
고로,
일한다.
일하고 일하고 일해서. 조금이나마 잊으려고 노력한다. 이선준도 나름대로 바쁜 몸인 듯,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주말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내게 찾아온다. 하지만, 이선준은 그걸 내 핸드폰에 깔아뒀다. 위치 추적 어플인가. 그걸로 내 위치를 확인한다.
꼭 목줄에 묶인 개가 된 기분이다. 어디를 가도 이선준이 나를 확인한다. 나를 지켜본다. 어떤 눈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감시하고 있는 그런 기분이다.
[핸드폰 전원 꺼놓지 마라.]
이선준이 보낸 카톡 내용은 담백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하다.
집에 와서 기사를 쓰고, 원고를 보낸다. 담백한 일상이다. 별로 변한 건 없다. 사실 아주 작은 변화다. 나는 여전히 내 시간을 갖고 있다. 이선준은 나를 철창에 가두고, 문을 잠그지는 않았다. 다만 심리적인 문제일 뿐이다.
정기 상담에서, 불안 증세가 너무 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말에 거짓말을 했다. 어떤 말이든 들어버릴 것 같아서 그랬다.
잘못됐다고 하겠지. 그러면 안 된다고 하겠지. 만나지 말라고 하겠지. 무슨 대답을 들을지 뻔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선택은 할 수 없다. 그저 이대로 천천히 망가져버려서, 이선준이 내게 싫증이 날 때까지 이럴 수밖에 없다.
내가 등신같다는 것도, 내가 머저리 병신이라는 것도 전부 알고 있다.
나는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한 적 단 한번도 없었어. 그냥 나는 나의 방식대로 머저리처럼 살아갈 뿐이다. 그냥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저 관성처럼 살아갈 뿐이야.
상담을 받지 않게 되었다. 내 고질적인 단점, 애정결핍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내 애정결핍은 내게 사랑을 주는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이선준은 내게 애정이 없다. 내 문제가 드러날래야 드러날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건 아무 문제가 안 된다.
박헌영을 만나러 나왔다. 시간 괜찮으면 커피나 한 잔 하자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박헌영과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은 이제 없다. 그럼에도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사실 그렇다.
모든 건 마음의 문제다. 내가 박헌영에게 기대고픈 마음이 있기에, 나는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거다.
박헌영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 많이 기다렸냐.”
“아니 그냥. 방금 왔어.”
박헌영 몫으로 시켜둔 커피를 밀어 건넨다. 나는 웃으려고 노력한다.
“안색 조졌네. 무슨 일 있어? 왜 웃기 싫은데 어거지로 웃는 표정이야?”
눈치는 더럽게 빠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말할 생각이 없다. 말하는 순간 내가 걸레 취급을 받는 건 둘째치고, 박헌영이 이선준과 싸우려고 할 게 분명하다. 둘은 그냥 이대로 마주치지 않고 사는 게 좋다.
둘은 그냥 멀어져 있는 채 그대로였으면 한다. 그 때는 멀어지는 것으로 끝났지만, 지금 다시 만난다면 분명히 싸울 게 분명하다.
“그냥 뭐, 항상 있는 그런거지.”
“아…. 그거?”
아직 예정일은 아니지만, 생리하는 척 대충 넘긴다. 박헌영은 걱정된다는 듯 내 안색을 살피며 묻는다.
“많이 안좋냐?”
“응, 요즘 좀 심해졌어.”
“스트레스 많이 받으면 심해진다며.”
“나야 없는 스트레스도 만들어서 받는 사람인데 뭐.”
내 말에 박헌영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실제로 좀 아프다. 병원에 갔더니 질벽에 상처가 났단다. 너무 격하게 한 탓이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는 건 정말 최악의 경험이었다. 일부러 여의사가 있는 곳을 찾아서 가기는 했는데. 내 거기에 개구기 같은 걸 집어넣었을 때에는 소름이 끼쳤다.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정말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
의사는 질염이라고 했다. 당분간은 성관계를 갖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다.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글쎄. 이선준이 내 그 말을 귓등으로라도 들으려나.
질염이 심해지면 불임까지 발생할 수 있으니 꼭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여 들었다. 내가 너무 어리게 생긴 탓에 의사는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다. 나라도 나라잃은 표정으로 멍청히 앉아있는 환자를 보면 불쌍하게 여길 것이다.
“밥은 먹었어?”
내가 묻자 박헌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밥을 방금 전에 먹은 참이다.
“하는 일은 잘 돼?”
“어 뭐 그냥…. 이 이상 갈까 싶을 정도지. 웹연재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잘 팔려.”
“하긴, 너는 예전부터 잘 했으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박헌영은 약간 기가 질린 표정이 된다.
“……너 상태 많이 안 좋구나?”
“어? 왜?”
“네가 너무 친절하게 말하니까 놀랐어.”
박헌영이 놀란 듯 말한다. 서로 시비나 걸고 장난이나 치던 사이였다. 막 만나서도 그런 관계로 돌아간 참이었다. 하지만 다시 만나자마자 내가 조곤조곤하게 말하니까 오히려 당황한다.
“뭐, 내가 맨날 틱틱거려야 되는거냐 그럼?”
“아니 뭐…. 그렇다는 얘기지.”
사실, 나는 뭔가 결심하고 이 자리에 나왔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적당적당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번에 어딜 갔는지, 뭘 먹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박헌영은 글을 쓰면서 어떤 댓글이 제일 상처였는지에 대해 말했다. 박헌영은 놀랍게도,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된 댓글을 캡쳐해서 보관하고 있었다.
“뭐야…. 너 변태야? 이런 걸 왜 모아놔?”
“잠 올 때 보면 좋아. 전투의지가 솟아오르지”
멘탈에 상처입을 것 같은 댓글 캡처본을 보면서, 나는 박헌영의 묘하게 강한 멘탈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새삼 느낀다. 뭐야, 왜 인물 가치관이랑 작가 가치관을 동일시하는거야? 지능이 낮은건가? 하지만 새삼 그런 생각도 든다.
세상에는 누구나 있으니, 이런 생각 하는 사람도 있을법하다. 힘들겠네….
“댓글 안 보면 되는거 아냐?”
“너 같으면 안 보겠냐?”
하긴…. 욕일 게 뻔해도 보게 될 것 같다. 뭐든지 일단 피드백이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거니까. 아예 댓글이 안 달리는 것보다는 일단 뭐든 의견이 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도 알고 있다.
박헌영은 모든 상처 같은 것들은 안으로 우겨넣는다. 사실 괜찮은 게 아니다.
괜찮은 척을 할 뿐이다. 박헌영은 안에서부터 곪아가는 타입이다. 분노나 화를 어지간하면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멘탈이 강한 것 같지만…. 사실 그 모든 것들을 숨긴다. 박헌영은 자신의 약한 모습, 화내는 모습을 보이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그리고…. 조금이지만 보인다. 박헌영은 지금 상당히 밝아 보인다. 일부러 즐거운 얘기를 하려 하고, 일부러 웃긴 얘기들을 한다.
그게 이상하다. 마치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 같은, 내 기분을 좋게 하려는 것 같은 그런 태도다. 나는 나도 모르게 홀린 듯 말한다.
“너…. 뭔가 알아?”
내 말에 웃던 박헌영의 표정이 그대로 경직된다. 그 반응 하나 때문에 알게 된다. 알게 되었구나, 어떻게든 알게 되어버렸던 거구나. 잠깐의 침묵과 경직, 그것 때문에 알아버린다. 박헌영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연락이…. 와서.”
“이선준한테?”
“어.”
“뭐라는데?”
손끝이 차가워진다. 날씨는 한여름인데, 바깥은 따가운 햇살이 세상을 구워버릴 듯 끓고 있는데. 내가 느끼는 건 전혀 다르다.
춥다.
손발이 시리다.
“너 만나지 말라던데.”
“…….”
왜곡된 집착, 분노, 미움 때문이다. 이선준은 박헌영에게 통보했을 것이다.
박헌영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일을 겪었을지 대충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를 즐겁게 해주려고 했다. 내가 마음아파하는 것 같은 모습들을 언뜻 보면서, 나를 그래도 기쁘게 하려고 했다.
어째서
왜?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까지 하는거야? 내가 대체 어떤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에, 너는 네 감정을 죽여가면서까지 그렇게 행동해?
손발이 덜덜 떨린다.
너를 다시 한 번 밀어내야만 하는 이 순간에, 왜 이런 마음을 또 내게 보여주는거야?
“무슨 일…. 있었구나.”
박헌영은 모든 걸 알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막연히 추측할 뿐인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이선준에게, 박헌영이 과거 쓰던 혐오스러운 말처럼…. 그 육변기니 뭐니 하는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 작품 후기 ============================
여러분 나를 믿어라
어제 팬아트를 받고.... 나는 너무나 반성하였다.... 너무나 죄책감을 느꼈다....
설원은 행복해진다
언젠가는....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