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6 고독 =========================
하지만 견뎌야 해. 그렇게 길지 않을거야. 한 달이나 두 달, 길면 반 년 정도만 참으면 될거야. 그러면…. 그 때까지 내가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보살펴주면 예전처럼 나를 상냥하게 대해줄거야.
그러면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돼. 이건 이선준을 위해서가 아니야. 나를 위해서야, 내가 그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과거의 잘못을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여야만 해. 내가 벌인 일이니까. 내가 버렸으니까.
이선준이 설거지를 마치고 소파에 앉는다. 내게서 먼 곳에 앉아있다.
“저기….”
결국, 나도 궁금한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이선준이 나를 본다.
“왜?”
“나…. 그, 거기 갔었다고 했잖아…. 시상식.”
“어.”
“그 사람…. 누구야?”
그 여자가 누군지에 대해서, 알고 싶다. 이선준은 내 두루뭉술한 질문을 바로 알아듣고 웃는다.
“아아, 협력업체 사장 딸.”
협력업체 사장 딸이라. 그건 무슨 의미인걸까. 이선준은 전혀 애정이 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애정은 없다. 하지만 포옹하는 사이다. 차라리 이름을 말했다면 모르겠는데, 관계를 말했다면 모르겠는데.
그게 무서운 추측을 하게 만든다. 이선준은 내 표정을 보고 웃는다.
“결혼할거야 아마. 요즘 별로 안 좋아서, 뭉쳐서 살아남자 뭐 그런거지.”
남의 일처럼, 이선준이 그렇게 말한다.
“어…. 언제?”
“글쎄, 내년 쯤일 것 같은데.”
“거짓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린다. 이선준은 내가 노려보며 말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결혼하는 순간 이후가 아니라. 양쪽에서 결혼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결혼한거나 마찬가지가 되니까…. 애초에 그쪽에서 아쉬운거라 걔도 못 들러붙어서 안달인거고. 나는 별 생각 없어.”
“안 한다는…. 소리야?”
“할 필요가 있다는 소리지.”
“거짓말, 거짓말 하지 마. 나, 나 일부러 상처주려고 그런 말 하는 거잖아 지금.”
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가 떨린다. 이선준은 화를 내지도 않고, 재미있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너네…. 너네 부모님 그런 분 아니잖아. 마, 막 마음도 없는 결혼 시키실 분…. 아니잖아.”
거짓말이라고 해. 거짓말이라고 해줘. 거짓말이잖아. 맞잖아. 일부러 날 할퀴려고, 날 부수려고 그렇게 말하는 거 다 알아.
“너 재미있다.”
“어?”
“너 진짜 귀여운 거 알아?”
이선준이 웃는다.
“귀여워 진짜. 네가 보기에는 세상이 달달하지? 설탕물처럼, 응?”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하지만 이선준은 계속 말한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알고 있다. 거짓말이 아닐거다. 진지한 표정으로, 이선준은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한다.
“솔직히 우리 부모님도 너 꽤 좋아했어. 결혼한다고 해도 말리지는 않았을거고…. 뭣보다 좀 착각을 하셔서, 너 때문에 내가 운동 그만 뒀다고 생각하더라고.”
이선준은 묘하게 한숨을 쉰다.
“그런데, 너 없어졌다니까. 흠….”
이선준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웃는다.
“뭐, 나름대로 많이 안타까워 하셨지.”
이선준은 TV광고를 보며 웃는다. 보험광고다. 웃을 이유도, 필요도 없는 장면에서 이선준이 웃는다. 이선준은 지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야…. 그런데 일 주일 지나니까 웬 여자 사진을 가져오더라고. 하하, 하하하…. 재미있지. 웃기지 않냐? 원아 응? 설원.”
“…….”
“원래 그래, 자본주의라는 건 그 모양이야. 위로 갈수록 사람이 지저분해져. 염치도 없어지고, 잊고 싶은 건 빨리 잊어. 아니, 잊은 척을 한다고 봐야지. 아주 멋들어지게 포장을 한단 말이야. 어쩔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그런 말…. 알지?”
“무슨…. 말?”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잖아. 현실적으로 어떻다. 뭐가 어떻더라. 현실적으로 보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개 좆 까는 니미 씨발 엿 같은 그런 말.”
이선준이 거칠게 욕을 내뱉는다. 나도 그 말 정말 싫어한다. 하지만 거친 욕을 하는 이선준이 더 싫다.
“너 슬픈 건 알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너도 이제 사람들도 좀 만나고 그래야지 않겠니? 얘 괜찮은 애라는데, 거기 있지. 네가 삼촌 삼촌 하면서 따라다니던 그 아저씨, 어, 너도 어렸을 때 봤을텐데, 딸이야. 음, 현실적으로 말이야…. 결혼은 빨리 하는게 좋지 않겠니? 하하, 하하하!”
이선준은 그 말을 끝마친 뒤 한바탕 웃어제낀다. 이선준의 광기가 두렵다. 박헌영과 연락을 끊고, 이선준도 혼자 남아버렸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그 누구도…. 이선준을 진심으로 위로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그냥 얼굴만 보면서 적당적당히 넘겼는데…. 결혼 하기로 했어.”
“어?”
“너 괴롭혀 주려고.”
“어, 어…. 어째서….”
“내가 유부남 되면, 너 더 비참해지잖아. 헛된 기대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결혼하기로 했어.”
“……너는…. 미쳤어.”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니, 내가 어떤 희망을 품는게 싫어서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겠다니.
이선준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 내가 이선준의 분노가 가라앉고, 서로를 용서하게 되는 순간이 오는 걸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 그런 바람이 헛된 거라고 말하기 위해서. 결혼까지 한다. 이선준은 완전하게 미쳐버렸다.
“왜 그렇게까지 나에게 복수해야만 하는거야? 왜 자신의 인생을 그런 식으로 망가뜨리면서까지 나를 괴롭혀야만 해?”
“야…. 너 진짜 귀엽다 귀엽다 해주니까…. 좀 생각을 해. 내 인생이 왜 망가져?”
“무, 무슨 소리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결혼하면….“
“대신 사업이 잘 풀리겠지. 협력업체랑 관계 공고히 하고, 중간 유통비용 줄이고, 서로 해먹기도 좋고. 이게 망가지는 거로 보이냐?”
“응, 망가지는 거로 보여.”
“너 누가 머리 뚜껑 열고 사카린 부어놨나보네…. 그럼 내가 너랑 무슨 영화같이…. 결혼식날 도망쳐서 혼인신고만 한 다음에 애기 분유값 마련하려고 막노동 뛰면 그건 아름다운 인생이냐?”
“그런게…. 아니잖아….”
“하나를 희생하고 열 개를 얻는거랑, 열 개를 희생하고 하나를 얻는거랑…. 굳이 계산할 필요 없지?”
“왜…. 그런 말 해? 그런 말이나 행동…. 엄청 싫어했잖아.”
이선준이 믿는 건 그런 자본의 논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선준은 그걸 옹호하고, 그것이 절대적이라 말하고 있다. 궤변론자. 항상 궤변만 늘어놓는다. 말로 나를 홀리고 엎어치고 메친다.
“어, 나 이제 괜히 그런 신념들 자기화해서 내 살 깎아먹는 짓 하기 싫어. 그리고 그 여자랑 결혼해도 너 계속 만나면 되는데 뭐가 문제야? 아메리칸 스타일로 살자고.”
“기만하지 마 제발…. 그런 거…. 그런 거 싫어…. 대체 왜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이려고 해?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지도 않을거잖아.... 그렇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나를 괴롭혀야 하는거야? 네가 뭘 해도 괜찮아. 무슨 심한 말 해도 돼 그런데 왜…. 거짓말까지 하는데….”
나는 결국 눈물이 난다.
“그냥 봐라 자꾸 혼자서 나한테 프레임질하지 말고.”
이선준은 핸드폰을 뒤지더니 누군가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여준다. 얼굴은 처음 보지만… 누군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프로필 사진은 그냥 자기 얼굴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문구다.
[선주니랑 약혼식 7/14 ♥]
아.
사실이었구나.
나는 울지도 못한 채 멍하니 그 화면을 쳐다본다. 이선준은 핸드폰을 소파에 툭 집어던진다.
“전화통화라도 시켜줄까?”
“아니….”
“네가 싫어해도, 나는 너 안 놔준다고 했어.”
“내가 도망가버리면 어쩔거야? 다 내팽개쳐버리고…. 도망가면.”
이선준은 자신의 모순된 집착을 그대로 말로 꺼내버린다. 내가 그 말에 응해야 할 의무 같은 건 없다. 그런 집착에 내가 그대로 따라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이선준은 나를 잘 안다.
“네가 알지는 모르겠는데….”
“…….”
“너는 아주 상냥해.”
이선준은 칭찬을 비난처럼 한다.
“책임감도 강하고, 뭐든지 항상 비난하기보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생각도 깊고, 물론, 그래서 생기는 문제들도 있지만 뭐…. 총체적으로.”
“…….”
이 말들은 칭찬으로 끝나는걸까.
“네 성격, 의외로 괜찮아. 천천히 뜯어보면…. 심각해서 문제지만, 조금 더 가벼워진다면 충분히 사랑스러운 지점이지.”
예전에 박헌영이 했던 말을, 이선준이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조금 더 상세하게 말한다. 내가 상냥하다고? 내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잘 모르겠어. 나는 그냥 이기적이야. 하지만 왜 갑자기 칭찬을 하는걸까. 어떤 심한 말을 하려고…. 나에 대해서 좋게 말하는 걸까.
“그러니까. 너는 너 스스로도 못 견딜 만큼 상냥하고, 남을 이해하려고 하는 구석이 있어서. 내가 아무리 이런 개새끼짓을 해도 나를 못 내버려 둔다고. 너는 내가 이렇게 된 게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결과적으로 말하면, 너는 도망 못 가. 한 번 이미 도망갔는데, 두 번 도망가면 너 아마…. 그 때야말로 못 견디고 자살할걸. 아니면 죽는 것보다 못한 자괴감 속에서 살겠지. 그게 설원이니까.”
최악의 말이다. 내가 혐오해버려서 떠나면 어쩌려고 대체 이런 말을 하는거야? 내가 너무 실망해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어버려서 도망가버리면 어쩔거야? 내 목에 개줄이라도 매달고 끌고 다닐거야? 아니면 나를 죽여서라도 소유하려고 할거야?
내가 내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이선준이 자신의 파괴된 면을 적나라하게 까발릴수록 내가 더 슬퍼하고, 버릴 수 없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다. 나는 너 때문에 망가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렸다.
어린애처럼 떼를 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네가 만든 이 나라는 놈을 책임지라고, 억지에 어울려야만 한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나도 알아. 내 성격에 대해서 이선준이 말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나는 너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이미 도망쳤다가 한 번 잡혀버렸으니까. 다시 도망갈 수는 없어.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어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도망가.
모성본능이라고 해도 좋아. 책임감이라고 해도 좋아.
나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망가져버렸는데, 그걸 내버려둘수는 없어. 나는 엄청나게 이기적이고, 내 스스로 생각하고 남은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지만….
너 같은 사람 지나치지 못해. 버리고 도망치지 못해.
박헌영…. 그런 거였구나. 너는 내 그런 지점을 좋아한 거였구나. 이제 내 발을 묶어버린 내 이런 거지같고 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이런 성격을 사랑했던 거구나.
============================ 작품 후기 ============================
다들 싸우지 말고 구르는 설원을 보자고
그리고 나는 애초에 이걸 내맘대로 쓰는거라서 M사 연재하다가 방향성이 바뀐건 전혀 아님
애초에 상품성과 수익성을 노린다면 설원을 안쓰지....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