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5 고독 =========================
부모님에게는 그냥 급한 회사일이 생겨서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집에 짐을 두고 왔지만, 지갑이나 신분증 같은 중요한 건 애초에 가지고 있기에 별 생각이 없었다.
차 수리는 보험처리를 하지 않았다. 이선준이 전부 알아서 해결해준다고 말했다. 귀찮은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인걸까.
나는 집에 돌아와서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이선준은 내 연락처를 받아갔다. 내가 사는 집에 들어와서, 내가 정말 여기 사는지까지 확인했다. 무섭지만, 나를 믿지 않는 것이 이해가 간다.
일단은 돌아갔지만, 나중에 연락하기로 했다.
내가 원했던 것처럼, 우리 둘은 다시 이어졌다. 얼굴을 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 마주했다.
하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다. 행복할리가 없다. 이선준이 그렇게나 변해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몸을 더 움츠린다. 마치 알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아버린다. 안쪽으로 파고들고 싶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이대로 감싸여서 어딘가에 버려지고 싶다. 그 버려진 곳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싶다.
“흑….”
내 잘못이다. 누구를 탓할수도 없다. 이선준에게 왜 그렇게 변해버렸냐고 욕해도 소용이 없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참지 못해서 내가 망가져버린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자괴하고, 절망하고, 힘들어했을 것이다. 그래서 죽으려고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살아있었다.
너무나 멀쩡하게, 너무나 온전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예쁘게 옷을 차려입고, 운전대까지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도망치려 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아, 살아있었구나,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당장 내 머리채를 잡고 전봇대에 찍어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다. 이선준은 그래도 차라리 언어로, 말로 그 분노를 풀어냈다. 이선준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 나와 다시 만나는 것을 택했다.
나는 그걸 거부할 권리가 없다. 내가 이선준을 사랑한 만큼, 기만한 만큼 나는 책임져야만 한다. 나도 알아, 이미 도망쳐버렸는데, 또 도망쳐버리면 안돼.
깊은 밤이다. 창밖에는 건물과 지나다니는 차들이 보인다. 나는 홀린 듯 일어나 커튼을 친다. 어두운데도 더 어두워진다.
이렇게나 어두운데, 더 어두워질수도 있다.
지금까지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이렇게나 더 아파질 수도 있었다. 그런 걸 모르고 있었다. 커튼을 친 건 밖이 보기 싫어서가 아니다. 너무 쳐다보게 되어서 그런 것이다.
나도 모르게 창밖으로 나가게 될 것 같아서다.
이선준의 마음을 안다고 생각했다. 슬퍼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선준이 지적한 것처럼 나만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로 이선준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내 기준 안에서, 이선준이 옳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여전히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나는 정의하고 있다.
-지이이잉
전화가 온다. 박헌영이다. 최악의 상황을 더욱 최악으로 만들었던 박헌영의 전화. 그 이후로 처음 오는 전화다. 하지만 박헌영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도화선과 기폭제는 그저 타들어갈 뿐이다. 그 둘은 계기만 마련해줄 뿐이다. 진짜 문제는 화약이다.
화약을 준비했던 건 나다. 박헌영은 잘못이 없다.
“여보세요.”
[어, 야…. 어제 바빴냐?]
“어, 그냥 좀…. 왜?”
내 말에 박헌영의 대답이 늦어진다. 나를 사랑스럽게 대해줬다. 이선준을 배신한 것처럼, 박헌영 또한 배신했는데.
너는 왜 나를 상냥하게 대했어? 너도 마찬가지로 얼마든 내게 폭력적으로 대할 수 있었잖아. 너는 왜 나를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입맞춰주고, 또 내가 슬퍼하니까 아무것도 안 했어? 너는 내게 그냥 미련이 남았다고 했잖아.
[힘들면 나중에 전화하고.]
박헌영이 그렇게 말한다. 힘들면 나중에…. 그 말은 배려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배려다. 하지만 배려라는 건 원래 그렇다.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배려다. 내 목소리가 좋지 못한 걸 느끼고, 곤란하면 나중에 해도 된다는.
아주 간단한 배려다.
“아, 아냐…. 해도…. 해도 되는…. 으, 아. 미, 미안. 나, 나중에에….”
울음이 솟아나와서 전화를 끊어버린다.
박헌영은 여전하다. 이선준은 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헌영이 착하고, 이선준이 나쁜 건 아니다. 그저 사람이 변화하는 지점이 있을 뿐이다. 내가 이선준이 변화하는 지점을 건드렸다.
이선준은 그저 나를 엄청, 엄청 사랑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 반동 때문에, 배신당하고 버려졌다는 반동 때문에 그렇게 되어버렸다.
박헌영보다. 이선준이 나를 더 사랑했다.
내가 박헌영보다 이선준을 사랑했던 것처럼.
좋아하는 만큼 싫어진다. 사랑하는 만큼 증오하게 된다.
물론, 박헌영의 마음이 가볍다고 정의하지도 않을거다. 그냥 이건 평소처럼 내 오만이자 추측이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한다. 이선준이 나를 훨씬 더 사랑해서 이렇게나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려고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그 과거를 곱씹으면서 지금을 견뎌낼 수 있다.
내 불행은 조금씩 바닷속으로 가라앉아가는 조용한 익사체의 불행이었다. 그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수압에 짓눌려 찌그러질 때까지. 그저 계속, 조용하게 고통받는 불행이었다.
하지만 이제 달라졌다.
나는 갑자기 건져내져서, 폭풍우가 치는 밤바다의 배 위에 내던져졌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배 위에서, 나는 기우뚱거리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나는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결국 세상은 나를 죽이려고 하는걸까. 내가 죽어야만 이런 일들이 멈추는 걸까. 그리고, 그리고 왜 결국 내가 한 모든 일과 행동이 부메랑처럼 돌아와버려서 그 어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걸까.
거실은 어둡다.
어두운 줄 알았는데, 이미 충분히 어두운 거라고 생각했는데.
더 어두워진다.
그리고 더, 더 어두워질 구석이 남아있을거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이선준을 만났다. 수리한 차를 가져왔다. 금액 문제에 대해서 이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를 바라보는 이선준의 표정은 무생물을 보는 것 같다. 애완동물도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지는 않을거다.
나를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표정이다. 시선만 느껴도 학대당하는 기분이다.
각자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집으로 와서, 이선준은 나와 섹스했다. 그저 고통밖에 없는, 내게는 불행을 더 가중시킬 뿐인 그런 행위를 한다. 이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선준은 나를 망가뜨리려는 기세로 나를 밀어댄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아프다고, 제발 살살 해 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선준은 그럴수록 더 가학적으로 나를 괴롭힌다.
차라리 죽여줘, 칼로 쑤시거나, 나를 들어서 창밖으로 던져버리거나. 내 목을 졸라서 죽여줘. 그러면 그냥 한 번에 끝나잖아.
하지만 그럴리가 없다. 이선준은 나를 오래, 내가 천천히, 내가 완전히 망가져버릴 때까지 괴롭힐 생각이다. 이선준은 행동으로 나를 거칠게 몰아붙이고, 말로 나에게 수치심을 준다.
걸레 같은 년이라거나, 몸의 어디가 얼마나 조인다는 둥,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지독한 말로 나를 상처준다. 나는 아파서 울고, 수치심 때문에 운다. 내가 울면 이선준은 내게 키스한다. 마치 상이라도 주는 것처럼, 내가 울면서 괴로워하는 게 유일하게 보고 싶은 것인 양 행동한다.
그저 상처입힐뿐인 정사가 끝난 후, 나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서 얇을 이불을 끌어 몸을 덮는다.
“…….”
이선준이 샤워하는 소리가 들린다. 밑이 아프다. 분노라는 건 생각보다 오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선준과 다시 만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저, 잠깐 저러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분이 다 풀리면 나를 떠나가거나, 나를 사랑해 주거나. 둘 중 하나가 될거다.
그러면 나도 누군가를 만나거나, 이선준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지. 그러면 나도 이 질척하고 끈적한,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과 책임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멍해져서 침실의 창문을 쳐다본다. 나는 불행한걸까. 내 삶이 이런 모양인걸까. 아니면 내가 이래서 내 삶이 이 모양인걸까.
TS바이러스 환자는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고 했지. 죽는 사람이 대다수라고.
그 중에서도 특히 민감하고 예민한 나는, 그래도 일 년 넘게 살아있다. 어째서 그랬던 걸까. 사실 나는 남들보다 더 잘 견디는 사람이었던 걸까?
“씻어.”
이선준이 알몸으로 몸을 닦으며 샤워실에서 나온다. 나는 조심스럽게 속옷을 입고 몸을 살짝 가린 채 침대에서 내려온다.
“볼 거 다 봤는데 뭐하냐?”
“아, 그, 그냥….”
내가 몸을 가린다는 행위 자체가 웃긴지 이선준이 비웃는다. 내가 눈도 못 마주치고 이선준이 시선을 돌리길 기다리고 있자. 내게 다가온다.
“한 번 더 할까? 너 귀엽다 지금.”
“아, 아…. 나…. 조, 조금 아파서….”
내가 무섭다는 듯 올려다보자 이선준은 피식 웃으며 거실로 나간다. 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샤워실로 들어간다.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으며 거울을 본다. 목덜미와 가슴, 배에 키스마크가 선명하다. 검붉게 멍이 들어있다. 온몸에 이런 자국들을, 마치 자기 거라고 도장이라도 찍듯 남겨놨다.
내 그곳을 핥으려고 했을 때에는 정말로 비명을 질렀다. 그런 건 진짜로 힘들다. 무섭고 더럽다. 내가 정말 발악하듯 싫어하니까 하지는 않았지만,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선준은 나를 비웃었다.
‘넣는 건 되는데 빠는 건 안되냐? 너도 웃기네.’
억지로 나를 상처입힐 말만 골라서 한다.
이선준의 나에 대한 소유욕은 정상이 아니다. 나를 어딘가에 가둬두고 싶어하는 것 같다. 불안한걸까, 내가 어딘가로 다시 사라져 버릴까봐.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이선준은 소파에 앉아있다. 사실 제대로 걷기도 힘들다. 나는 아주 천천히 걸어가 소파에 앉는다.
-슥
하고, 이선준이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명백한 거리감을 주려고 한다. 섹스할 때 이외에는 내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무언의 표시다.
나를 전혀 애정할 생각이 없다. 다가갈까, 억지로 다가갈까. 역시, 밀어내겠지. 그리고 그 밀어냄을 당했을 때 나는 견딜 수 없을거다.
“배…. 안 고파?”
내가 말하자 이선준은 TV를 보면서 지나가듯 말한다.
“좀 배고픈 것 같기도 하고….”
“밥 먹자 그럼.”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한다. 이 침묵의 시간이 너무 싫고 무섭다. 함께 앉아있는 게 무섭고 가슴이 아프다. 아래쪽이 너무 아프다. 아직도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든다.
냉장고를 열고, 재료를 꺼내 요리를 한다. 얼마 걸리지 않아서 찌개를 끓여낸다.
“밥 먹어.”
내가 말하자 이선준이 TV를 틀어놓은 채 테이블에 온다. 함께 밥을 먹는다. 박헌영과 먹었을 때처럼 대화나, 장난 같은 건 없다. 그저 밥을 먹을 뿐이다. 수저 움직이는 소리만 조용하게 울린다. 이선준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맛이 어떤지도 말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먹는다.
다 먹고 나서, 이선준은 그릇을 치워 싱크대에 올려놓는다. 나도 정리를 하고, 설거지 거리들을 싱크대에 몰아놓는다.
이선준이 고무장갑을 낀다.
“아, 아, 아냐….. 내가, 내가 할게….”
“됐어. 내가 해.”
이선준이 나를 밀어낸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이선준에게 다가간다.
“아니야 내 집인데 내가….”
“야, 내가 한다고.”
이선준이 나를 노려본다. 어쩐지 그 시선이 너무 고압적이라서 나는 물러선다. 소파에 가서 앉는다.
저 행동은 나를 생각해서 하는게 아니다.
밥도 여자가, 설거지도 여자가 하는 건 가부장제다. 가부장제의 여성, 즉 아내는 그런 걸 받아들인다. 내가 그런 위치를 점하는 걸 싫어하는 것, 그저 그것뿐이다. 밥을 네가 했으니 설거지는 내가 한다. 정리도 내가 한다.
그러니까 너와 나는 그런 감정을, 그런 관습을 공유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너무 잔인하다. 저건 너무나 철저하게….
나를 섹스용 도구로만 여기는 행동이다.
============================ 작품 후기 ============================
비축분이 거의 없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