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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22화 (122/224)

00122 감내하는 법 =========================

무서워, 이선준이 무서워. 나를 어떤 말로 더 찢어버릴지 무서워, 나는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데….

아니, 말보다 무서운 게 있다. 나를 비난하는 말보다 더 무섭다.

“다 울었냐?”

이선준이 돌아와 테이블에 앉는다. 담배 냄새가 언뜻 풍겨온다. 이선준은 다시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본다. 남을 쳐다보는 눈빛, 타인을 쳐다보는 눈빛.

애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분노만 엿보이는 눈빛이다.

나를 매도하는 말보다 그 시선이 더 무섭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만 숙이고 있다. 힘겹게 입을 열어서 결국 한 마디 해낸다.

“우, 울어서 미안…. 미안해…. 요….”

나도 모르게 존댓말을 해버린다.

“너 내가 무섭냐?”

이선준이 침묵하고 있다가 내게 말한다. 나는 이선준의 시선을 보고 바로 눈을 피한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전부 다 내팽개치고 뭐가 어떻게 되건 나몰라라 하고 도망간 네가 더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냐?”

“…….”

“그리고는 뭔가 해결했다는 것처럼, 뭔가 결정했다는 것처럼 행동한 너 자신이 혐오스럽지 않아?”

“…….”

“너는 그냥 도망친거야. 너는 아무것도 해결 못 했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았어. 전부 책임지고 죽었으면 모르겠는데,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잖아. 죽은 척 하는건 재미있었냐? 널 죽었다고 생각한 내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어?”

“…….”

“네가 나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는 단 한 순간이라도 생각했어?”

“새, 생각했어…. 생각했어…. 정말이야…. 정말이에요…. 항상…. 항상 생각했어….”

“웃기지 마, 그랬다면 너는 내게 단 한 번이라도 얘기를 했어야 해. 살아있다. 미안하다든 뭐든 좋으니까. 네가 나를 생각했다면 너는 내게 그걸 말했어야 돼.”

“…….”

“너는 그냥 고통받는 자기 자신을 연민하는거야. 너는 너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네 감상에 젖는거야.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게 네 방식이지. 나를 생각했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너는 그게 아니야…. 너는. 너는 그냥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 취하는거야. 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이선준은 씹어뱉듯 말한다.

“너는 행동하지 않아. 도망치는 거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해. 혼자 생각에 빠져서 우울해하는 거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도망치는 것도 행동이라고 말할거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선준의 정당한 분노에, 나는 할 말이 없다. 감히 미안하다고 할 수도 없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다. 이선준의 말이 맞아.

하지만, 하지만 나도 괴로워했어. 나는 괴로워하는 걸 즐기는 게 아니야. 진짜로 힘들고 아팠어 그것만큼은 사실인데.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선준의 말을 부정할 권리가 내게는 없다. 나는 내 멋대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했다. 누군가의 말 같은 건 듣지 않았다.

“내가…. 내가 죽으면…. 지금이라도 죽으면 돼?”

나는 힘겹게 그 말을 꺼낸다. 이선준의 눈을 마주할 수 없다. 이선준은 경멸스럽다는 듯 한 마디 뱉는다.

“너 미쳤어? 지금 시위하냐?”

“아, 아니. 아니야…. 아니에요….”

“개소리 지껄이지 마. 내가 이 말 한다고 네가 죽으면 내 기분이 좋아질거라고 생각해? 엿같아질 뿐이라는 생각은 못 해?”

이선준의 독설은 내가 상상해왔던 것 그 이상이다. 견디기 힘들다. 뭔가 울컥 치솟는다.

“그럼…. 그럼 어떡해? 나는 뭘 해야 해? 무슨…. 무슨 말을 해야 해?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잖아….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죽는 것밖에 없잖아…. 사는 게 죄책감의 연속이었어. 죽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어. 내가 살아서 문제라며…. 그러면 죽는 것밖에 없잖아. 살아있어서 문제면 내가 죽어버리면 되잖아….”

나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울음을 참는다. 눈물이 뚝 떨어져도 나는 흐느끼지는 않는다. 이선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너…. 저능아구나?”

마치 정신병자를 쳐다보듯, 이선준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나는 잔뜩 기가 죽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다. 한 대 맞을 것 같다.

“왜, 왜…. 내가 뭘 해야 하는데 그럼….”

하지만 이선준은 몸을 가까이 하고, 테이블에 양팔을 올린 뒤 깍지를 낀다. 명백한 비웃음이다.

“사과할 생각은 없어?”

아.

아, 그렇다.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내 사과는 접촉사고에 대한 것뿐이었다. 울어서 그런 것뿐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한 뒤에 말한다.

“바, 받아주지 않을 거잖아…. 엄청 화났잖아…. 나는 사과할 자격도 없고…. 어떻게 사과를 해…. 내가 어떻게 용서해달라고 말해….”

“이런 썅, 야!”

이선준은 결국 화가 나서 내게 소리친다. 카페 안의 사람들이 전부 쳐다봐도, 이선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노려본다. 나는 너무 놀라서 이선준을 쳐다본다.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너, 왜 또 네 멋대로 판단하는데?”

“어, 그….”

“사과할 자격이 어쩌니 뭐니 속으로 또 생각하고, 사과를 해야 되는데 안 하잖아. 어? 또 네 생각이 최우선이냐 왜? 용서를 하고 말고, 사과를 받고 말고는 내 선택이고, 내 생각이잖아. 아니야? 내 생각인데 왜 네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냐고. 미안하다, 잘못했다. 용서해줘. 이 말 하는게 그렇게 어려워? 그건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니야. 하고 싶으면 해. 빌고 싶으면 빌어. 나는 너처럼 그딴 자격이니 뭐니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 아니니까. 응? 잘못했으면 용서를 빌어. 사과를 해. 그러면 돼. 상대방이 받아주니 마니 자격이 있니 없니는 네가 생각할 게 아니라고.”

이선준의 폭력적인 말에 나는 이성을 잃을 것 같다. 맞아, 나는 내 생각이 최우선이었어. 설훈을 용서한 것도. 이선준에게 사과하는 것도 전부 내가 판단하고 있었어.

어쩌면 이건, 너무나 폭력적인 방식이고, 너무나 못된 방식이지만….

나한테 사과할 기회를 주는 게 아닐까. 내가 너무 등신같아서, 내가 너무 바보같아서 그런 게 아닐까….

아니, 그런 잡생각은 그만하자. 내가 해야 될 건 하나밖에 없다.

“미, 미안해….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내가…. 내가 너무 나쁘고 이기적이었어요….”

이를 악문다. 울지 않을거야 울지 않을거야. 울지 않고 끝까지 말할거야. 나는 이선준에게 고개를 숙인다.

“용서해 주세요….”

이선준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본다. 내 사과를 받아줄지 어떨지는 전부 이선준의 몫이다.

-우우웅

그 때, 핸드폰이 울린다. 내 핸드폰이다. 가족들에게서 온 전화인가 싶어서 끄려고 하는데…. 이선준이 말한다.

“받아봐.”

“어?”

“받아보라고. 괜찮으니까.”

나는 어쩐지 명령하는 것 같은 그 말에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낸다. 그리고 나는 놀란다. 지금 절대로 전화가 오면 안 되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헌영]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거야? 전화를 받아도 문제고, 받지 않아도 문제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선준은 나를 본다.

“누구 전환데 안 받냐?”

“…….”

“누군데?”

“말해줘야 할…. 이유 없잖아. 왜, 왜 물어보는 거야 그건….”

“박헌영이냐?”

“!”

나는 너무 놀라서 핸드폰을 놓친다. 이선준은 피식 웃는다.

“그냥 해본 말인데, 진짠가보네.”

“어, 어…. 오해야. 오해야….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몰라, 하지만 오해야 진짜로 오해야….”

내가 말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말이다.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겠지만 오해라니. 어째서 이 상황에 전화를 해야만 했던거야? 물론 몰랐겠지. 아무것도 몰랐을거야.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지독한 타이밍인거야….

“무슨 상관이야. 네가 박헌영을 만나든 말든.”

이선준은 피식 웃는다. 너무나 차가운 웃음이다.

“하지만, 네가 나를…. 진짜로 만나기 싫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네.”

“아니야. 아니야. 진짜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믿어줘…. 진짜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단 말이야…. 왜 몰라? 왜 몰라주는데?”

서럽다. 나를 망가뜨리는 이선준의 말이 너무 싫다.

“나는 너만 생각했어. 너만 좋아했어…. 너만 보고싶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왜, 왜 나를 물어뜯으려고만 해? 나 아파. 아프다고, 여전히 아파…. 제발, 제발…. 알잖아. 알잖아…. 내가 너 진짜 엄청 좋아하는 거 알잖아….”

“몰라.”

“으으…. 윽…. 거짓말. 거짓말 하지 마.”

알고 있잖아. 그러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고, 이렇게 괴로워하면서도 이 자리에 앉아있어야만 할 이유 같은 건 없잖아. 이선준은 나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선준은 일 년 동안, 배신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 일 년 동안 달라졌다.

따뜻한 면은 없어져 버렸다.

“확실하게 말해.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거 지쳤어. 짜증나.”

이선준은 숨을 들이쉬더니 나를 보며 말한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

내 사랑이 전혀 필요없다는 표정으로, 이선준은 그렇게 말한다. 나는 입술을 깨문다. 마치 패배를 인정하듯 비참한 심정이다. 그래, 이제는 인정해야만 해. 돌아갈 수 있는 길 같은 건 없어. 좋아한다느니. 제일 소중하다느니 하는 말보다 확실한 말로 인정해야만 해.

나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한다.

“너를…. 너를 엄청 사랑해.”

이선준은 그제야 웃는다.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웃는다.

“나는 이제 너 사랑하지 않아.”

하지만 두려울 정도로 섬뜩하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 작품 후기 ============================

나락으로 떨어진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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