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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20화 (120/224)

00120 감내하는 법 =========================

주말에, 대전에 내려갔다. 그래도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집에 간다. 부모님도 혼자 살고 있는 내 걱정을 많이 하는 탓이다. 무엇보다 엄마가 화를 냈다.

[훈이휴가나오는대안볼거야]

바쁘다고 해도 엄마는 막무가내였다. 전화를 해서 마구 화내고 윽박을 질렀다. 그래도 누나가 되어서 동생 걱정도 안 되냐고. 누나가 되어서 동생 군생활 하는것도 좀 알려주고 그래야지! 라고 소리치는데…. 모순인 듯 모순이 아닌 비난이었다. 이미 몇 번 휴가 나왔을 때에도 바쁘다는 걸 핑계로 안 찾아갔다.

도저히 더 이상 싫다고 할 수 없었다. 자꾸 그러면 엄마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결국 가는 수밖에 없었다.

“원이 너 왜 점점 얼굴이 반쪽이 되냐? 너 맨날 밥도 안 처먹고 다니는 거 아냐?”

“아니야 잘 먹고 다녀.”

나는 집에서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으며 말한다. 시간은 점심, 집에 돌아오자마자 밥을 먹는다. 아버지도 함께 식사 중이다. 설훈은 말없이 조용히 밥을 먹는다. 온가족 넷이 모였다.

“군생활은 어떠냐.”

빡빡머리인 설훈은 살이 좀 빠져서 몸이 다부져졌다. 일 년 넘게 못 봤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거다. 설훈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나도 설훈을 되도록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냥 평범해. 아무 일도 없고.”

설훈은 담백하게 말한다. 우리는 밥을 먹고 거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집 안이기에 평범한 옷차림이다. 츄리닝에 반팔티다.

“너는 여자애가 그렇게 앉으면 어떡해?”

“뭐 어때 바지잖아.”

내가 책상다리 하고 앉은 걸 보고 엄마가 타박을 한다. 여자애라니, 여자는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쳐, 그래도 애는 아니잖아.

“너는 너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너 치마 입고도 그러지.”

“안 그러거든?”

치마 입고 이렇게 앉으면 미친년이지, 다소곳하게 앉는단 말이야. 누구한테 속옷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도 아닌데.

“뭐 필요한 건 없냐.”

엄마랑 내가 한창 실랑이 중에 아버지가 문득 그런 말을 꺼낸다. 설훈이 왔건 말건 나한테만 관심을 보인다. 하긴, 설훈은 남자고, 나는 쥐면 부러질 것 같은 여자다. 내 쪽을 계속 걱정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설훈이 조금 서운해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다. 설훈은 죄인처럼 내 시선을 피하고만 있다.

“아부지. 필요한건 내가 살 수 있어.”

“그러냐.“

“너는 아부지 말고 좀 아빠라고좀 불러봐. 이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래?”

“시, 싫거든? 징그러워!”

애초에 아버지 아버지 하다보니까 아빠라는 말이 잘 안 나온다. 엄마는 엄마라고 그냥 부르는데, 습관이라는 건 정말 이상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원래 굳어있던 표정이 더 굳는다.

설마 삐친건가. 나는 결국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며 안 굴러가는 혀를 억지로 굴린다.

“아, 아빠아….”

“흠, 흠. 용돈 받아라.”

아버지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서 지갑을 뒤진다.

“아, 아 정말 왜이래?”

“아빠….”

이번에는 설훈이 아빠라고 불러댄다. 하지만 드물게 웃고 있던 아버지의 표정이 확 굳어버린다.

“너는 징그럽다.”

“아, 너무해!”

아버지도, 엄마도 자꾸 나를 열 몇 살 정도 애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스물여섯인데, 부모님의 시선은 꼭 물가에 어린애 내놓은 것 같은 표정이다. 아빠는 꼭 내가 대여섯 살 먹은 딸인 것처럼 볼 때마다 못 견뎌한다.

하긴, 아버지 성격에 딸래미 껴안고 부비부비하는 건 자신의 남성관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표정이다. 엄마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쉰다.

“어휴, 이런 애가 무슨 일을 한다고….”

“잘 하고 있어. 어렵지도 않은데 뭐.”

“변태 같은 놈들 없던?”

“괜찮아, 나 피카츄 들고다녀.”

“피카? 피카 뭐? 그 쥐새끼 말하는거냐?”

“응, 스턴건.”

내가 가방을 뒤져 피카츄(THE 전기죽창)를 보여주자 엄마와 아빠, 설훈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내가 이런 흉기를 들고 다닌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죄다 이거면 한방이야.”

내가 씨익 웃자 다들 웃는다.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사실 지금 내 문제는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변태들보다 더 큰 문제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구.

“그나저나 원이 너 얘 데리고 가서 옷좀 사라. 살 빠져서 입던 옷이 다 안맞아.”

엄마가 갑자기 설훈을 가리키며 말한다. 나는 그 말에 움찔한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설훈이 먼저 말한다.

“아 됐어, 무슨 옷이야. 입던거 입으면 돼.”

설훈은 덩치도 크고 키도 크다. 그런데 입대 후 살이 빠지면서 내가 그냥 봐도 옷이 엄청 크다. 바지는 질질 흘러내린다. 설훈은 나와 있는게 껄끄러울거다. 그리고 내가 껄끄러워한다는 것도 생각하고 있을거다.

일 년이 넘게 지났다.

내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설훈에 대한 감정은 옅어졌다. 그럴 수 있지 정도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없던 일처럼 넘어갈 수는 있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안 보면서 살 수는 없다. 그저, 그저 한 때의 잘못이었던 것처럼 넘어가자. 이건 용서가 아니야. 용서가 아니라 그냥….

산다는 게 그런 거니까.

“괜찮아. 옷 사줄게, 가자.”

내 말에 설훈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당황과 경악, 놀람이 가득한 표정이다. 용서한다고 하지도 않았고 괜찮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함으로 인해서 설훈에게 다가간다.

먼저 손을 내밀었다

“누나가 괜찮다잖아. 가서 빨리 벗겨먹어.”

“어, 엄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 정신나간 아줌마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는거야?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엄청 오해의 소지가 큰 말이라고!

설훈이 외출복을 입으러 가고, 나도 옷을 갈아입는다. 청반바지에 흰색 블라우스에 클러치백. 그리고 선글라스다. 화장은 안 했다.

설훈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쭈뼜거리며 나온다.

“가자.”

“어, 어….”

“올 때 메로나 사와라.”

“아, 아버지 그런 말은 또 어떻게 알아?”

나와 설훈은 아버지의 기습에 잠깐 벙찐다.

인근의 아울렛 매장으로 향하면서, 나는 운전 중이다. 시내로 가면 길이 복잡해서 외곽도로를 이용한다.

“차 좋네….”

설훈은 차를 보며 말한다.

“좋은 냄새 나는데.”

방향제도 있고, 내가 타고 다녀서 향수나 화장품, 샴푸 냄새가 묻은 모양이다. 나도 남자일 때에는 여자 화장품 냄새를 꽤 좋아했다. 여자 몸에서 나는 냄새는 거의 대부분 샴푸나 린스냄새다. 향수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 그렇다는 말이지.

“웬 꽃이야?”

설훈은 차 뒷자석에 있는 꽃다발을 보며 말한다. 이미 말라가고 있는 꽃다발이다. 선물을 못 해서 그냥 차 바닥에 내버려뒀다.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다. 버리긴 버려야 하는데….

나는 설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역으로 묻는다.

“무슨 옷 살거야?”

내가 묻자 설훈은 잠시 고민에 빠진다.

“그냥 청바지랑 티셔츠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가발도 사줄까?”

“무, 무슨 가발이야!”

설훈이 발끈하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웃긴다. 이렇게 덩치 큰 놈이 조수석에 앉아있는 모습이라니. 차가 그리 좁은 건 아니지만 어쩐지 구겨져 있는 것 같다. 설훈의 손은 내 작은 손보다 두 배는 더 크다. 그냥 보면 어린애가 어른을 태우고 옷을 사러 가는 모습이다.

어쩐지 이상하네.

진짜 이상하네.

그렇게 기분나쁘다는 생각이 안 든다. 오히려, 앓아왔던 뭔가가 사라진 것 같다.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었던 상처가…. 사실은 별 것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울렛에 도착해서 우리는 매장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빡빡머리 설훈을 쳐다보고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우리는 손을 잡지도 않았고, 그리 가까이 서 있지도 않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정말 많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선들 이제 익숙하다.

“이거 어때?”

맨투맨 티셔츠를 가리키자 설훈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그냥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사는 타입이었지. 나는 팔짱을 낀 채 말한다.

“야, 이리 좀 와봐.”

나는 옷걸이에 걸린 티셔츠를 설훈의 몸에 몇 번 대본다. 내 키가 좀 딸려서 살짝 발꿈치를 들어야 한다. 나는 우물쭈물하고 있는 설훈을 보며 눈을 부라린다.

“야, 너가 좀 숙이지?”

“어, 어….”

설훈이 몸을 살짝 숙이고 이것저것 대본다.

“마음에 드는 거 없어?”

“아 나는 이거랑…. 이거.”

설훈이 회색과 파란색 티셔츠를 고른다. 가격도 별로 안 비싸서, 둘 다 사버렸다.

“군대 있을 때 입을 옷 같은 거 사놔야 좋아. 전역할때까지 입어야 될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우리는 아울렛을 돌아다닌다. 나도 쇼핑하면서 나돌아다니는 건 여전히 싫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사버린다. 두 시간 세 시간 돌아다니면서 찾아보고 가격 비교해보는 건 못 할 짓이다.

변한 건 변하는 거고, 안 변하는 건 안 변한다. 이건 아마 죽을 때까지 안 변할거야. 나는 단화를 신고 있는 탓에 설훈을 올려다봐야 한다.

모자도 사고, 청바지도 샀다. 꽤 지출이 크기는 했지만 이 정도야 사줄 수 있다. 내가 미래를 위해서 적금을 넣는 것도 아니고, 모아둔 돈은 꽤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미래를 생각하며 적금 넣는 행위를 상당히 껄끄럽게 여긴다. 마치 나한테 그 돈을 써야 할 상황이 올거라고 막연히 생각한다는 게 웃긴 탓이다. 나한테 꼭 밝은 미래가 있는 것 같아서 깨작깨작 돈 모으는 것 같잖아.

그래서 쓰지 못한 돈은 남고, 돈이 계속 쌓여간다.

애초에 나 과소비 안 한다구.

옷을 사고, 설원이 짐을 들고 우리는 매장 바깥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씩 먹는다.

“할만해?”

내 말에 설훈은 고개를 끄덕인다.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죄인 같은 표정이다. 왜 그랬냐고 묻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없는 동안, 내가 만나러 오지 않았던 그 일 년 동안. 힘들어 했겠지.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거고, 후회도 많이 했을거다. 내가 비난하고 화내지 않아도 설훈은 스스로에게 실망했을거다.

내가 내 잘못을 계속 후회하는 것처럼 설훈도 마찬가지일거다. 그래서 내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하고, 안절부절 못 하고 있을거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불쌍하고 멍청한 자식.

누구나 실수를 한다. 누구나 잘못을 하고, 누구나 후회를 한다. 나는 그 후회를 고백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나는 괴로워하고 있다. 설훈도 마찬가지로, 내게 사과하고 사죄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내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한 채 죄인이 된다.

너는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너무 불쌍해. 내가 너무 싫은데, 내가 너무 가여워.

그런 탓에 너도 너무 가엾다. 그래, 나처럼 후회하는 사람은 나만 있으면 되는 걸지도 몰라. 설훈을 용서하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지 몰라. 아니, 그런 일이 없더라도. 나는 누군가를 한 번쯤은, 이렇게 용서하고 싶어.

“나한테 사과해.”

내 뜬금없는 말에도 설훈은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설훈을 노려보고 있다. 이건 화내는 게 아니다.

사과할 기회를 주는거다.

============================ 작품 후기 ============================

설원이는 넘나 착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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