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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19화 (119/224)

00119 감내하는 법 =========================

박헌영이 잠깐 커피나 한 잔 하자고 했지만 나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집에 돌아왔다.

소파에 멍청히 앉아서 생각한다.

나는 바보야. 또 큰 실수를 할 뻔 했잖아. 그래도 다행이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진짜 웃긴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약속을 믿고 좋아서 이선준하고 다시 만나도 돼! 하면서 두근거렸던 내가 멍청이다.

이건 만화가 아니다. 소꿉친구와 했던 과거의 약속을 떠올렸다고 해서 그대로 굴러가는 세상이 아니다. 삶은 변화하고 움직인다. 내가 없이 1년동안 살아왔던 이선준의 인생에 끼어들고, 다시 분탕질을 칠 자격은 내게 없다.

나는 그저, 도망쳤으니까 도망친대로 그대로 사라지면 된다. 이선준의 인생에서 퇴장한 채 재등장하지 않으면 된다. 그게 내 역할이다. 다시 끼어들어갈 자격 같은 건 아무도 내게 주지 않았다.

마음대로 버려놓고, 마음대로 주워간다고? 미친놈, 미친년 이기적인 자식.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기뻐했던 내 자신이 수치스럽다. 다시 어떤 방식으로 상처를 주게 될지 알지도 못하면서, 아물어가는 상처를 헤집고 들어가려 했다.

그래, 다행이다. 너무 다행이야.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는데, 나는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마신다. 안주도 없이 테이블에 앉아 술을 들이킨다. 나는 소주 두 병을 들고 거실로 나와, TV를 켠다.

[오, 오, 오 진짜같아! 진짜같아!]

“헤헤…. 헤헤….”

별로 웃기지도 않은 TV를 보며 웃는다. 술을 마신다. 속이 화끈해지는 동시에 몸이 들뜨는 기분이다. 소주 두 병을 다 마시는 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나는 소파에 늘어지듯 눕는다.

나는 뭘까. 왜 버리고 떠나왔을까. 이렇게 보고 싶을 거면서, 이렇게 애가 탈 거면서. 이렇게나 후회할 거면서.

차라리 그 때 연애하자고 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어야 했다고

계속 후회할 거면서.

“흑….”

운다.

이제 아무래도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버린 이선준을 생각하면서 운다. 내가 닿아서는 안 된다고 확실하게 생각해버려서 운다.

사귀는 게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면서, 계속 생각한다.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정말 사귀는걸까. 사귀는 사이인 걸까. 손 잡았을까? 뽀뽀도 했을까? 키스도 했을까? 섹스도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비참하고 역겹다. 나는 저열하다. 나는 처녀라는 것이 하찮은 거라고 생각한다. 남성의 프레임에서 비롯한 처녀라는 말 자체를 혐오한다. 정말정말 혐오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 순결하길 바라는 사고방식이 싫다. 그런 건 남성우월주의적이고, 폭력적이다.

하지만 항상, 생각과 감성은 너무나 다른 말을 쏟아낸다.

계속 그런 생각이 든다. 모순적이게도, 너무나 모순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처녀를 가져가놓고, 다른 여자를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거야? 나는 처음이었는데, 너에게는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였다고 해도, 그래도 나에게는….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거였는데. 순결이 소중한게 아니라, 그걸 결심하는 게 내게 아주 중요한 지점이었는데.

평범한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어려운 결정이었는데. 단순히 처녀와 순결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부숴버려야 했을 만큼 힘겨운 결정이었는데.

그래서 너하고 한 거였는데.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는거야? 그렇게나 쉽게? 이렇게 변한 뒤에 누구의 손길도 원하지 않았어. 강제로 만져졌던 걸 빼면 나는 순결했어. 네가 처음으로 가져놓고, 가져가 놓고. 그렇게나 짐승처럼 가져가놓고.

왜 다른 여자를 만나는거야? 왜 다른 여자랑 끌어안는거야?

머리로 했던 모든 생각들을 감정으로 부정한다. 그냥 싫다. 마주할 자신이 없다. 이성적 논리가 어떻고 저쩌고를 떠난 얘기다.

“흐, 흐흐…. 흐흐흐….”

나는 비참하다. 비루하다. 역겹다. 내가 버려놓고 상대방이 나를 잊지 않았기를 원한다. 나는 여전히 미쳤다.

얼마 전에 박헌영과 섹스하려고 했던 주제에, 잘도 이선준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나는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암캐다. 나라는 인간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 아무렇게나 몸을 굴리고 싶어하는 주제에, 이선준이 다른 여자와 포옹 한 번 했다고 이선준을 미워하려고 한다.

그래, 안 돼. 당연히 안 되는거야.

나처럼 역겨운 년이 어떻게 감히 이선준을 만나려고 해?

나는 역겨운 모순덩어리야. 아직도 그래. 나는 논리적 사고라고는 요만큼도 할 수 없는 짐승이야.

가랑이를 벌리고, 발정난 암캐처럼 멍멍 짖어대는 게 내가 할 일이야.

나는 여전히 나를 용서할 수 없어.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누군가한테 용서를 구걸해?

나는 평생 나를 용서할 수 없어. 나는 나쁜 놈이야. 지독하게 못난 년이야.

“으…. 으으윽….”

소파에 누운 채 운다.

“아니라고 해 줘…. 아니라고….”

그래도 여전히, 나는 이선준이 그 여자와 사귀는 게 아니길 바란다. 제발 나를 잊지 않았다고 해줘, 아직 나를 원한다고 해줘. 내가 조금이라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다고 해줘. 나를 위해 마음에 자리를 준비해 뒀다고 해줘.

하지만 물을 수 없다. 물을 생각도 없다.

나는 그저 이 고요한 오피스텔 안에서 혼자 비명을 지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점점 더 병들어간다.

박헌영을 부를까. 안아달라고 할까. 그렇게 해줄지도 모른다. 나를 안아줄지도 모른다. 박헌영이라면 그렇게 해줄거다.

하지만 싫다. 내가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아마 눈치채고 있을거다. 지금 부르는 건 박헌영을 기만하고 엿 먹이는거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냥 혼자 삭여야 한다.

우울하다. 그냥 잠깐동안 꿈을 꿨어.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달콤한 꿈을 꾼거야.

이선준과 다시 사이좋게 잘 지낼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그런 꿈. 꿈이니까 절대로 이뤄질 일 없겠지.

아,

달콤했다.

그런 달콤한 상상을 하는 동안은, 아주 행복했어. 아주 잠깐은 정말 행복했으니까, 그걸로 된거야. 그걸로 충분한거야.

하지만 나도 알아. 꿈꾸고 있던 행복이 사라져 버리면….

그만큼 더 슬퍼지고 우울해진다는 거 너무 잘 알아.

문득, 궁금해진다.

이선준의 시상식, 이선준의 단편소설이 당선된 신인상. 이선준은 무슨 소설을 썼을까.

나는 흐느적하게 일어나 노트북 앞으로 간다. 문학상 홈페이지에 1회 당선자, 이선준의 단편소설이 올라와 있다. 급하게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혹시나, 그 단편에 나의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들어가 있었으면 해서.

그런 데에서 구차하게 마음의 흔적을 찾으려고 한다. 졸렬하고 치사하다. 이선준의 단편소설 제목은

『그런』

묘한 제목이다.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고, 아무것도 시사하지 않는 제목이다. ‘그런’ 이라는 단어는 무슨 뜻일까. 생각해본다.

『그런』 이란 뭔가를 떠올리는 말이다. 『그런』이란 뭔가를 상상하는, 추억하는 말이다. 『그런』이란 과거를 정의하고, 판단하는 말이다. 『그런』이란, 어쩐지 안타까운 것 같은 말이다. 『그런』이란 어쩐지 이미 떠나가버린 뭔가를 상념하는 것 같은 말이다.

그런 『그런』의 의미들 중에, 너는 뭘 상상하며 썼던 걸까. 첫문장을 천천히 읽어본다.

‘별 하나 없는 어둑지근한 밤거리를 걸어갈 때에도, 나는 취해 있었다.’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나는 대개 취했으며, 늘상 취했으며, 하릴없이 취했으며, 오롯이 취했다.’

취한 남자가 주정을 부리는 소설이다. 이선준이 지금껏 써왔던 소설과는 많이 다르다. 이건 모더니즘과 닿아있다. 하지만 주정뱅이의 주절거림과, 노상방뇨를 하며 떠올리는 이야기들은 리얼리즘과도 묘하게 닿아있다.

이런 문장 안 쓰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스타일이 바뀌었나보다.

‘취하지 않을 까닭이 없는 세상이다.’

분노와 절망, 불운, 비탄이 느껴지는 내용이다. 큰 맥락 없이 죽 이어지던 단편을 읽으며, 이선준이 느낀 감정들을 어느 정도 알게 된다.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이선준의 문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파괴적이고, 모순적이고, 자학적이다. 문장을 재료로 쓰던 이선준이, 문장을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너무 놀란다.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유월에, 눈이 오기를 바란다.’

나는 그 문장을 보고 얼어버린다. 그 문장 하나뿐이다. 맥락과 문단 속에 녹아들어가 있지만. 눈이 오기를 바란다는 그 말 하나가 아프게 내 가슴을 찌른다.

유월의 시상식, 유월의 눈, 유월에 눈이 오기를 바라는 사람. 유월에 설원이 오기를 바랐다는 뜻인걸까.

유월에, 나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였을까.

나는 손끝이 떨린다. 이선준을 만날 수 있을까. 나를 용서해준다는 의미인걸까?

하지만, 나는 계속 읽어내려가다가 다른 문장을 발견한다.

‘눈이 혐오스럽다. 사분 내려앉기 무섭게 더러워져 질척거리는 눈을 증오한다.’

나는 더 보지 못하고 노트북을 닫아버린다. 그저 오해였을까. 그저 쓴 문장이었을까. 눈을 보고 싶다는 것은 단 한 문장, 눈을 증오한다는 것은 한 문단이었다. 그래서 더 볼 수 없었다.

나를 증오하는구나.

나를 미워하는구나.

그래, 그렇겠지. 그럴거야.

나를 보고 싶어하는 동시에 나를 증오한다. 더 볼 수 없다. 나는 액자의 사진을 본다. 이선준과 나의 사진이, 박제된 동물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박제해 고정해 놓은 액자. 순간을 납치해 묶어놓은 사진이…. 어느 때보다 슬퍼 보인다.

나는 저 사진을 찍을 때에도 울었다. 너무 당황해서, 너무 놀라서, 감당할 수 없는 오해가 서럽고 부담스러워서 울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저 때의 눈물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이지만 결국 슬퍼서 운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슬퍼서 운다.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 작품 후기 ============================

왜 쓰면 쓸수록.... 나는 지옥같은 기분만 들면서 왜 자꾸 설원을 지옥으로 내몰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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