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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18화 (118/224)

00118 감내하는 법 =========================

일도 하고, 보성으로 취재도 가면서 시간을 보냈다. 6월이 되었다.

박헌영과 카톡을 하고, 가끔 만나 밥을 먹으면서 이따금 물었다. 이선준과 박헌영은 내가 떠난 그 날 이후로 멀어졌다. 크게 싸우거나, 말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껄끄러워서, 점점 멀어졌던 모양이다. 서로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없는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조금 그랬던 모양이다. 그저 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감각하는 게 두려웠던 모양이다.

[셀카좀 보내줘]-박헌영

[뭐에 쓰려고?]-나

[너 애초에 뭐에 쓰려고라니? 대답이 하드코어하지 않냐?]-박헌영

[너가 이상한 데에 사용할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내 대답에서 하드코어를 도출해내는 너가 더 변태 아니야?]-나

[대체 셀카를 무슨 용도로 사용하는데!]-박헌영

[박헌영의 방식대로.]-나

[나는 여전히 쓰레기인거냐. 너 그리고 아직도 덴마 보냐?]-박헌영

집에서 머리띠 하고 앉아서 쪼그려 앉아서 과일을 깎아먹고 있다. 처음에는 과일 깎는 것도 그렇게나 어려웠는데, 이제는 TV보면서도 충분히 해낸다. 박헌영이 치근대는 통에 셀카를 찍어서 보내준다. 아무렇게나 대충 찍어도 예쁘게 나온다.

전송을 마친 뒤 답장을 보낸다.

[언론 및 인터넷에 게시되는 순간 죽여버린다.]-나

[…그보다 순순히 보내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박헌영

그야, 거절하는 건 상처를 주니까. 이 자식, 설마 내 셀카를 보면서 자위를 한다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그래도 별 상관 없지만, 키스랑 주물주물도 다 한 사이인데 그 정도쯤이야. 박헌영 나쁜새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난다.

내가 애정공세에 약하다는 거 분명히 알고 있었어. 일 년 동안 칼을 갈았던거야. 나는 분위기에 상당히 약하다.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꼼짝을 못 한다. 꼭 얼어버린 것처럼. 홀린 듯 멍하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것보다 애정에 약하다는 걸 보여줘 버렸다. 마지막으로 박헌영이 내게 고백했을 때, 놀라고 감동받아서 울어버린 걸 기억하고 있을거다. 입맞춤 세례에 진짜 해체되듯 넋을 놓아버린 건 진짜….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갑자기 후회된다. 세수도 안 하고 머리띠도 안 한 상태로 아무렇게나 찍어서 보내다니.

[너 완전 폐인이네]-박헌영

[그래도 예쁘잖아]-나

박헌영은 읽고서도 아무 말이 없다. 묘하게 웃음이 입가에 걸린다. 사무 용도 이외에 카톡을 한 일이 있기는 했나. 확실히 박헌영을 다시 만나고 나서 삶에 어쩐지 기운이 생긴다.

[야, 그거 아냐.]-박헌영

[뭐?]-나

[통합신인상 당선자 정해졌대.]-박헌영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멍해진다. 일단 나는…. 먼저 연락이 안 왔으니까 떨어진거다. 하지만 붙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으니까. 큰 실망감은 들지 않는다. 나는 예전만큼 소설에 절박하지 않다.

[후배가 연락해주더라. 선준이 형이 당선됐다고]-박헌영

“아….”

어쩐지, 이렇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너무 놀라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한다. 뭐랄까…. 이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손이 막 떨린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멍하니 쳐다본다. 이건 무슨 일인걸까.

알아, 우연이 아니야. 그만큼 노력해왔으니까 당선이 되는 건 운이 아니라 실력의 문제인거야. 실력의 문제야. 이선준이 그만큼 소설을 잘 쓰는 것뿐이야. 그래서 당선될 게 당선된 것밖에 없어.

하지만, 하지만 나는 자꾸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아무 생각도 안 든다.

꼭 얄궃은 운명이, 무슨 운명인가가 내게 어떤 기회를 허락해준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나한테 어떤 걸 허락해준걸지도 모른다고. 다시 만나도 된다고 허락해준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운명 같은 건 세상에 없다.

그저 결과가 있을 뿐이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상당히 대담하게 출범한 문학상이라 그런지, 시상식도 아트홀에서 진행된다. 이미 문학 관련 인사들이 즐비하게 대기하고 있다. 박헌영이 알려주지 않았어도 인터넷 뉴스로 보도된 탓에 소식을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젊은 훈남 작가 등장이니, 소설계의 미남 신인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열받는다. 주목할 사람들은 주목하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지금 이 상은 업계의 화두다. 애초에 소설가로 데뷔한 사람 얼굴 팔아서 어쩔거야?

-탕!

“으아, 늦었어.”

나는 아트홀에 차를 주차하고, 선글라스를 낀다. 날이 조금 더운 것도 있지만, 나는 최대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도록 화장도 엄청 진하게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까지도 막 준비하는 통에 늦어버렸고, 꽃다발도 사느라 더 늦어졌다. 시상식 이미 진행중일거다.

아트홀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기자들도 많다. 혹시나 사진이라도 찍힐까 조심조심하며 홀 안으로 들어간다. 몇몇 아는 얼굴들이 보여서 슬쩍 피한다. 인맥들이 엄청 겹치는 탓에 누군가 날 알아볼것만 같다.

그런 건 싫다. 갑자기 사라졌던 설원이 시상식장에 떡 하고 나타났다니. 죄 지은 건 없지만, 싫은 건 싫은거다. 시상식장은 척 봐도 사람이 바글바글 몰려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들고 홀 안으로 들어간다. 빼곡하지는 않지만 업계 관계자들과 이선준의 지인들이 모여있다.

학교 생활은 꽤 잘 했고, 운동했던 전력 탓에 아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아트홀을 빌려도 자리가 널널했을 텐데, 사람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총학생회장 권유도 많이 받았으니까. 새삼 이선준이 나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이미 시상이 끝난건지 이선준의 옆에는 사람들이 꽃다발을 마구 전해주고 있다. 그…. 뭐랄까.

묘하네.

후배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가족들이 꽃다발을 전해준다. 이선준의 어머니와 아버지. 나도 알고 있는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그 뒤로 얼굴 한 번, 연락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그냥 마음의 어떤 짐처럼 남아있었다.

“야, 왔네.”

“히, 히익!”

누군가 뒤에서 나를 건드려서 나도 모르게 바람 새는 소리를 내버렸다. 뒤를 보자 박헌영이 웃고 있다. 뭐야, 어떻게 바로 알아보는거야 이 자식!

“전해주지 그러냐.”

박헌영도 꽃다발을 들고 있다. 그래, 이 참에 다시 연락하고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다. 내가 아니라 박헌영 얘기다. 이선준은 주변 사람들과 인사하고 악수하느라 바쁘다. 내 쪽을 볼 여유 같은 건 없을거고, 본다 해도 못 알아볼거다.

“잠깐…. 그냥 좀 있다가…. 지금 사람 너무 많잖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다. 전해줄거다. 전해주고, 사과하고, 다시 이야기를 해볼거다. 엄청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박헌영은 나를 찾아냈다. 이번에는 내가 이선준을 찾아낼 때다. 차이든, 욕을 먹든, 거절당하든 받아들일거다.

나를 매도하고 손가락질해도 받아들일 셈이다.

박헌영이 먼저 다가간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꽃다발을 건넨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분위기는 전해진다. 이선준과 박헌영 둘 다 어색한 표정으로 악수를 하고, 꽃다발을 건네고 받는다.

몇 번의 이야기가 오간다. 박헌영은 내가 왔다고 얘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일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이선준도, 박헌영도 안색이 밝아진다. 사실 화해라는 건 그렇다.

화해를 거절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물며 저 둘인데, 그럴 수 있다. 둘이 멋쩍게 웃는 건….  오랜만에 재회한 게이 커플 같다. 지저분하네. 게이가 지저분하다는 게 아니라. 저 둘의 그 꽁냥꽁냥한 분위기가 지저분하다.

박헌영은 나를 위해서 용기를 낸거다. 자기도 껄끄러울텐데, 나를 위해서 용기를 냈다. 사실 화해시키고 싶지 않을텐데, 박헌영은 나를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 어째서 너는 아직도 그렇게 착한거냐. 그러니까 인기가 없지. 착한 남자 별로야 이 자식아.

서혜인도 이선준에게 꽃다발을 건넨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정말 많다. 구석진 곳에 있는 거 아니었으면 정말…. 고된 일 치를 뻔했다. 서혜인과 이선준은 오랜만인 듯 서로 인사한다.

그러니까

나도 기운을 좀 내보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일어서서 시상대 쪽으로 걸어간다.

-툭

그런데, 누가 내 어깨를 치고 앞으로 간다. 엄청 다급하고, 빠른 걸음이다. 들고 있는 꽃다발이 엄청 흔들거린다.

“선주운! 축하해! 조금 늦었지!”

시상대에 올라가며 누군가 소리친다. 정장에 힐, 훤칠한 키를 가진 여성이다. 뒷태만 봐도…. 꽤 멋진 사람이라는 게 느껴진다. 나는 심장이 미친 듯 뛴다. 저건…. 누굴까? 나는 뭐가 걱정인지도 모르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이선준은 그 여자를 보자마자 한아름 안고 있던 꽃다발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여자와 포옹한다. 아는 누나일까, 누굴까. 잘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이선준과 그 여자의 포옹은, 애정이 넘친다. 너무나 넘쳐서…. 누가 들어갈 틈 같은 건 안 보인다. 멀리 서혜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녀석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어디론가 나가버린다.

그래,

그걸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멋대로 떠나갔다가 멋대로 돌아갔을 때, 또 다시 이선준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박헌영과 내 눈이 마주친다. 박헌영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있다.

나는 결국, 걸음을 돌려 시상식장을 나온다. 가슴이 아프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트홀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간다.

저 여자가 이선준의 여자친구든 뭐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또 지독하게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했다.

이선준의 지금 삶이 어떤 모습일지, 내가 끼어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나름대로 행복할 것이다. 일 년이나 지났으니 나름의 안정을 찾았을 것이다. 이선준에게 내 이름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걸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이선준과 지나가듯 한 과거의 약속에 얽매여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되는지 모른다고 제멋대로 착각하고 망상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쓰레기다. 여전히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른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 여자 덕분에, 내가 하고 있는 아주 큰 실수를 깨달아 버렸다. 아무것도 저지르지 않았다. 정말 사귀는 사이일까? 연인일까? 언뜻 봤을 때에는…. 엄청 스타일도 좋고 예뻐 보였다. 확실히 나 같이 키도 작고 가슴도 별로인 여자보다는, 저런 스타일이 더 좋을거다.

나는 차에 타서 운전대에 머리를 박는다. 뭐니뭐니 해도 결국 드는 생각은 하나밖에 없다.

가슴이 아파.

============================ 작품 후기 ============================

설원은 귀신같이 로맨스로 장르변경을!!

그리고.... 독자들은 비명을 지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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