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6 설원이 아니에요. =========================
“가, 갑자기 왜 이….!”
박헌영이 다시 내게 다가와 입술을 맞춘 뒤 떨어진다. 이건…. 뽀뽀라고 해야 할 정도의 스킨십이다.
“야, 너 취한 것 같은!….”
내가 입을 열기 무섭게 박헌영이 입술을 다시 맞춘다. 녀석이 나를 보며 웃는다. 즐겁다는 듯 웃고 있다.
“너 지금부터 말 할 때마다 뽀뽀할거야.”
“야 그게…. 으, 너 진!….”
연거푸 두 번이나 당했다.
정말로 내가 입을 열 때마다 입술을 맞춰온다. 뭐야 얘 진짜 미친거야?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뛴다. 짧은 순간에 연거푸 몇 번이나 입을 맞춰온다. 키스도 아니고 그냥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정도지만 날 혼란스럽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박헌영을 노려본다.
“뭐야, 진짜 아무 말도 안 하네.”
“너가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웁!”
“말하지 말라고 한 게 아니라. 말하면 뽀뽀한다고 한거잖아.”
나는 뒤로 슬슬 물러난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얘 뭐야, 진짜 왜이래. 이렇게 저돌적으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는 입을 가린 채 박헌영을 노려본다.
“이 무드도 없는 망나니 새끼야.”
그렇게 말하자 박헌영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뭐야 진짜 왜 이래! 하면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걸 바란 건 아닌데. 분위기도 좀 잡고 그래야 하는거 아냐? 짐승도 아닌데 어떻게 그래?
“무드야 만들면 되는거지.”
“…….”
싫어, 싫다고. 박헌영은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한다.
“손 내려.”
나는 고개를 젓는다. 말하면 뽀뽀한다고 제멋대로 우겨대서 그대로 말 안 하고 있는 나도 웃기다. 박헌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압적이지 않은 어조로 말한다.
“손 내려.”
“…….”
박헌영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는 어쩐지 그 말을 듣자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전혀 맥락이 없지만, 용서받은 것 같은 어떤 감정의 격류가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린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 기분이 나쁘다.
한 번,
박헌영이 내게 입술을 겹친다. 그리고 떨어진다. 나는 박헌영을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다시 한 번,
나는 입술을 깨물고 박헌영을 쳐다본다.
또 한 번,
나는 더 이상 박헌영을 노려보지 않는다. 그저 바라본다.
한 번 더,
나는 다물고 있던 입술을 살짝 연다. 늦어버렸다.
한 번, 다시 또 한 번,
눈가가 뜨거워진다.
그리고 한 번,
이제 나는 그저 젖은 눈으로 박헌영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이딴 식으로 무드를 만드는 놈이 있을 줄이야. 최악이다. 진짜 최악이다.
하지만 마음의 어떤 부분이 녹아내린 것 같은 느낌이다. 그건 너무 강한 감정이라서, 나는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린다. 최악의 방식이지만, 너무 뜨겁게 내 안의 어떤 부분을 자극한다.
사랑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나를 녹여내는 것 같다. 나 이런 거 엄청 약하단 말이야. 연거푸 몇 번이나 입맞춤한 거 하나 때문에 나는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다.
“너 진짜…. 이거 반칙이야….”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붉어진 눈시울로 박헌영을 쳐다본다. 박헌영은 재미있다는 듯 나를 내려다본다. 우리는 소파 위에서 어설프게 몸을 겹치고 있다.
“무드가 필요하다며?”
“이러는 거 어딧어 진짜….”
나는 얼굴을 가린 채 울듯이 중얼거린다. 박헌영이 그런 내 팔을 걷어낸다. 이미 눈물 나버렸다.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나를 사랑해줬으면, 나를 좋아해줬으면, 나를 소중하게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밀어내면서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다. 혼자인 시간이 너무 길어서, 너무 외로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아무라도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타이밍에 박헌영을 만난 건 정말 최악이다. 이 녀석이 자주 하는 말마따나….
함락당할 수밖에 없잖아.
나는 다 낡아서 부스러질 것 같은 성이라고.
박헌영이 내게 입술을 다시 겹쳐온다. 몸이 뜨겁다. 녀석의 혀가 내 입 속으로 들어온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그런 진한 입맞춤을 받아낸다.
“하아아….”
들뜬 숨을 뱉어낸다. 박헌영의 눈빛을 마주하는게 두렵다. 나는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 박헌영이 나를 엄청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걸 봐버리면, 나는 이성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나아진 줄 알았다.
아니야. 더 심해졌어.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나아지지는 않았어.
박헌영 같은 변태자식이 나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 시선이 마주친 것도 아닌데,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버리는 것만으로도…. 젖어버렸어.
엄청나게. 진짜 엄청나게 젖었어. 나 왜이래, 진짜…. 나 완전히 야한 여자같아.
“야아…. 소파는 싫어….”
나는 시선을 외면한 채 그렇게 말할 뿐이다. 박헌영은 나를 일으켜서 안방으로 데려간다. 심장이 미쳤다. 엄청나게 빠르고, 엄청 크게 뛴다. 결심은 했는데, 막상 닥치니까 엄청 떨린다. 이래도 되는거야? 정말 이래도 되는거야?
친구랑 이래도 문제 없는거야?
박헌영은 나를 눕히고 내 위에 몸을 겹친다. 입맞춤을 거칠게 한다. 나는 떠올릴 수밖에 없다.
“으음…. 읍. 하아…. 흐….”
그 날의 기억이 불현듯 눈앞에 박힌다.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몸이 움츠러든다. 그건 내게 쾌락이나 쾌감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아픈 기억이다. 박헌영은 내가 움찔거린 것을 느꼈는지 나를 바라본다.
“왜…. 어디 안 좋아?”
“아, 아니…. 아냐….”
하지만 한 번 몸이 굳어버리자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 날 무섭게 내리치던 벼락과, 하염없는 빗소리. 그리고 서로를 죽일 듯 화내며 몸을 섞었던 그 날의 기억이 똑똑히 떠오른다. 그건 비명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올린다. 그 때와 비슷한 감촉이 느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박헌영은 내 상태가 좀 이상한 걸 깨달았는지 내게 입맞춤하다가 입술을 뗀다. 서로의 타액이 범벅이 되어서 실처럼 엮여서, 천천히 떨어진다.
“너…. 울어?”
“아, 아니야…. 괜찮아. 해도 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몸이 안 따라준다. 제멋대로 눈물이 막 나온다. 박헌영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내가 뭘 떠올리는지, 뭘 생각하는지 어렴풋이 눈치챈 표정이다.
아…. 이러려던 게 아닌데, 이러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박헌영의 목을 끌어안는다.
“아, 아냐….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질거야….”
“내가 안 괜찮아.”
박헌영이 나를 밀어내 침대에 눕힌다. 나를 눕혀놓고, 박헌영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말이 없다.
“노력하지 마. 괜찮으니까.”
“어?”
“굳이 나랑 하려고 노력 안 해도 된다고.”
그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잖아. 그냥 이건,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건데…. 하지만 입 밖으로 그 말이 안 나온다.
또 상처를 줘버린거야? 상처를 주기 싫어서 밀어내지 않은건데…. 결국엔 그래서 또 상처를 준거야?
“아니 나는…. 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야…. 믿어줘…. 진짜. 진짜야…. 일부러 하려고 한 거 아니야…. 정말이야….”
결국 나는 울어버린다. 나는 숨을 죽이고 몸을 웅크린 채 운다. 나는 아무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이상한 기억을 겹치면서 또 실수를 해버린다.
“야, 야…. 아니야. 왜 그래. 울지 마.”
“미안…. 미안…. 윽….”
박헌영이 내 옆에 누워서 나를 끌어안는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괜찮아. 화 안 났어. 화 안 났다니까….”
“내가 잘못…. 흐윽! 잘못 했…. 흑! 잘못했어어어…. 미워하지 마. 진짜. 진짜 잘못했으니까….”
더 이상 미움받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잘못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실수를 쌓고 싶지 않다. 나는 망가져버렸어. 아직 고쳐지지 않았어.
그저 괜찮아 보였던 것뿐이야. 마음을 보여줄 사람이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멀쩡해 보였던 거야. 마음을 보여주는 순간, 나는 내 마음이 이렇게나 망가져 버렸다는 사실을 보여줘 버린다. 그러는 동시에 나도 내 마음이 여전히 망가져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도 안 나아졌다.
이제는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사랑을 갈구하게 되어버렸다. 그걸 조금이라도 느껴버리면 무너져버린다.
박헌영이 나를 미워할까봐 두렵다. 나는 박헌영의 품에 안겨서 서럽게 운다. 박헌영은 침착하게, 끈질기게 내 등을 쓸어주고 머리를 쓸어준다. 술에 취하고, 그 손길에 취해서 나는 어린애처럼 계속 운다.
한참을 울고 나서, 나는 등을 돌린 채 누웠다. 조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 나 미쳤나.
어린애처럼 매달려서 울다니. 마음이 가라앉자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야…. 나 완전 젖었었어.”
나는 그 말을 툭 던지듯 내뱉는다. 박헌영은 내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 안심이 되는지 말한다.
“왜 갑자기 우리나라 문법에 없는 대과거를 사용하면서 말하냐.”
“지금은 아닌데, 아까 엄청…. 젖었다구.”
“그게 왜?”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한숨을 푹 쉰 뒤 말한다.
“너랑 일부러 하려고 노력한 거 아냐…. 진짜 아니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진심이다. 믿어줬으면 좋겠다.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해도 괜찮다. 하지만 박헌영은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해도 돼. 지금.”
“너 안 좋은 기억 떠올리게 하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나 또 운다고 멍청아 진짜….”
내가 우는 소리를 내자 박헌영이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침대에 같이 누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박헌영을 쳐다볼수가 없다. 쪽팔려서 죽어버릴 것 같다.
“헌영아….”
이렇게 불러보는 거 처음이다. 박헌영은 잠깐 놀란건지 침묵하다가 대답한다.
“왜?”
“나…. 아직도…. 음. 아. 아직도 있잖아….”
“응, 말해.”
“나한테.… 나한테 여전히……. 사랑받을 만한 그런 지점이 있어?”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묻는다.
“아니.”
하지만 박헌영은 칼같이 대답한다.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몸이 굳어버린다. 당연한 결과다. 나는 박헌영을 배신했다. 농락했다. 그런 내 내면에 사랑받을 만한 지점이 뭐가 있었든 환멸해버렸을 것이다.
박헌영이 그저, 내 육체만을 탐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서운해하거나 속상해하지 않는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취급이 그렇다. 박헌영이 갑자기 뒤에서 나를 끌어안는다.
내 몸이 박헌영의 품 속으로 들어간다. 따뜻하다. 박헌영이 내 귀에 속삭인다.
“너는 이기적이고, 신경질적이고, 불안정한 녀석이야. 너한테 사랑할 만한 지점…. 몰라, 이제 잘 모르겠어.”
그래. 서운하지 않아.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해. 너가 나를 욕망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그래도 너는 나를 욕망하는 거니까. 내 몸이라도 그건 나니까. 박헌영이 내 귀에 다시 속삭인다.
“그냥…. 미련이…. 너무 많이 남아서….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더라.”
미련이라.
그래, 욕망보다는 더 솔직한, 어떤 마음의 잔재 같은 게 있구나. 절망적인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아직 내가 필요하다는 거잖아. 내 자리가 조금은 남아있다는 거잖아. 그래, 박헌영이 나를 원한다면 얼마든 줄 수 있어. 그게 내가 부숴버린 관계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어쩔 수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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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2부도 쓰다보니 지옥이 되어버림
헬임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