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5 설원이 아니에요. =========================
“야…. 괜찮아?”
“어…. 아. 괜찮아. 가끔 이래.”
눈가가 살짝 발개진 것 같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 애초에 눈화장도 안 했으니까. 이런 지점을 걱정하는 걸 보면 나도 많이 익숙해진 모양이다.
“가끔 이런다고?”
아, 불쌍한 척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자주 있는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박헌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음…. 괜찮아. 진짜로.”
내가 웃으며 말하자 박헌영은 더욱 표정이 심각해진다. 한동안 말이 없다. 결국 박헌영이 꺼낸 말은 그거였다.
“오랜만에 밥이나 해줄까?”
“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라서 나는 얼빠진 소리로 대답한다.
어쩐지 끌려나와 버려서, 박헌영과 나는 예정에도 없었던 장을 봤다. 녀석이나 나나 정해진 스케줄이 없는 몸들이라서 시간은 여유가 넘쳤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내 집에서 요리를 하기로 결정이 났다. 각자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에 탄다.
“너 이렇게 코앞에 살았냐….”
태원과 서울의 경계지점에 내가 산다는 걸 알자 박헌영이 얼빠진 표정이 된다. 사실 근처에 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일 것이다.
”오, 넓네.”
“쓸데없이 넓지.”
오피스텔로 들어오자마자 박헌영이 가장 먼저 한 말이다. 우리는 장 본 봉투를 꺼내놓고 식탁에 부려놓는다. 메뉴는 간단하다. 오일파스타. 간단하지만 맛있게 만들기 정말 힘든 메뉴다. 박헌영은 앞치마를 하고 요리할 준비를 한다.
“뭐 도와줄 거 없어? 나도 이제 요리 좀 해.”
“가만히 있어. 너는 내일 아침을 맡기지.”
“……너 여기서 자고 간다는 선택지는 언제 고른거야?”
“널 만난 순간부터.”
“웩.”
어쩐지 느끼해졌잖아 이 자식. 뜬금없이 와인도 사고…. 진짜 이거 뭐야. 오랜만에 전 여자친구 만나서 밥 먹고 자연스럽게 섹스하는 분위기로 끌고 갈 것 같은 느낌이다. 어째서 일 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 된거야? 그래도…. 평범한 변태에서 행동력 넘치는 변태가 된 것 같은데?
섹스라니….
아무려면 어때. 할 수도 있는거지. 다른 남자의 모든 접근을 거부해왔다. 하지만 박헌영이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다. 녀석은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마음이 우정이건, 애정의 흔적을 뒤따라온 것이건 상관없다. 박헌영이 하고 싶어 한다면, 해도 될거다. 저항하거나 밀어낼 생각은 없다. 창밖을 바라본다. 어느 새 밤이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이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그렇게나 보고 싶어했던 친구 중 한 명을 만났고, 집에서 그 녀석이 요리를 하고 있고, 오늘 밤 그 녀석과 섹스를 해야 하는건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삶이란 럭비공처럼 항상 어디로 튈 지 모른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헌영은 파스타 면을 삶고 있다. 나는 거실의 소파로 가 TV를 켠다. 한물간 예능을 틀어놓는 게 내 일과다. 보고 또 봤던 걸 보지도 않으면서 틀어놓는다.
곧, 맛있는 냄새가 집 안에 퍼진다. 이 집에서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있었나? 엄마랑 아빠가 왔을 때 한 번, 그 정도다.
“야, 먹어.”
박헌영의 담백한 초대와 함께 나는 테이블에 앉는다. 예쁘게 말아놓은 파스타가 그릇에 담겨 있다.
“그럴듯한데?”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다. 들어는 봤냐.”
“나도 한 양식 하거든 자식아.”
하지만 나는, 한 입 먹은 다음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 이거 뭐야?”
“파스타.”
박헌영은 깍지낀 손에 턱을 괸 채 나를 보며 웃는다. 멋있는 척 하지 마!
“처음 먹어 보는 맛인데….”
“네가 지금까지 먹은 알리오올리오는 가짜다.”
무슨 선언 같은 소리를 하며 박헌영이 와인을 딴다. 준비된 와인잔에 녀석이 술을 따른다. 그러고보니 와인잔, 세트로 사놓고 항상 하나만 썼지. 박헌영이 잔을 내밀며 말한다.
“위할 것도 없지만 위하여.”
“건승을 기원합니다. 변태작가님.”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잔이 부딪힌다. 적포도주는 꽤 괜찮은 맛이다. 이 녀석 맛에는 좀 까다롭다. 그래서 이런 맛있는 술도 알고 있을거다. 파스타는 정말 맛있었다. 박헌영은 정말 입신의 경지에 오른 요리솜씨를 가지고 있다.
파스타를 다 먹고 난 후에는 박헌영이 오믈렛을 만들어서, 그걸 안주삼아 와인을 넘겼다.
“너 요리 연습만 주구장창 했냐?”
내 질문에 박헌영이 피식 웃는다.
“내 글은 공유하지 않는 너 같은 놈들을 위해 연습했지.”
“비난이야 구애야? 확실히 해 이자식아.”
자신이 그렇게 잘 쓰는 소설은 안 봐주니까 요리연습을 했다는 말이다. 우리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뭘 하며 살았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너 그런데 분위기가 확 바뀌었는데?”
“머리 한 게 좀 큰 것 같아.”
인상이 확 바뀌어 버린 건 나도 느낀다. 박헌영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한다.
“예전에는 앙칼지고 도도했다면….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웃으면서 뽀뽀해줄 것 같은 느낌이야.”
“너 안에서 뭔가 표현을 엄청 순화한 것 같은 짧은 텀을 방금 느꼈거든?”
“너 여전히 날카로운데? 츤데레 공주님에서 쿨녀 여왕님이 되었다고 해야하나. 말하는 대로 다 해줄 것 같아.”
이 자식이 뭐라는거야?
“음탕하지 않거든?”
“음탕하다고 안 했거든?”
“맞잖아 이 자식아. 완전 오해하는 모양인데, 수녀도 나처럼 살진 않을거거든?”
말 그대로, 금욕적인 나날이었다. 우리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고 보니까 진짜로 자고 갈 모양이네, 차 가져온 주제에 술도 먹었으니까. 일 년 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다.
아직 우리의 나이는 그리 많지 않은데, 박헌영이나 나나 사회에 내던져져서 강제로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나저나 할만하냐?”
“너무 할만해서 심심할 정도지.”
어느 새 와인 한 병을 다 비웠다. 오랜만에 많이 마셔서 그런지 약간 들뜨는 기분이다. 박헌영과 나는 자리를 옮겨 거실 소파에 앉는다. 다 마신 와인은 놔두고 맥주에 저번에 사온 프레첼이 안주다.
멍하니 TV를 보면서 우리는 웃거나 실없는 이야기들을 한다. 박헌영은 거실을 비롯한 주변을 슥 둘러보며 말한다.
“허전하네.”
“필요한 것만 있으니까.”
“언제든 자살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집 같은데.”
어쩐지 가슴을 푹 찌르고 들어오는 그 말에 나는 박헌영을 쳐다본다.
“무슨…. 소리야 그게?”
“너 이 공간에 애정이 전혀 없는 게 다 느껴져.”
인테리어라고는 기존에 있던 것밖에 없다. 내가 무슨 장식물을 사오거나 가구를 산 적도 없다. 그냥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즉흥적으로 샀을 뿐이다. 나도 모르던 내 어떤 지점이다.
그런가, 나는 그런 생각이었던 건가?
언제든 떠나버려도 될 정도로, 나는 이 공간에 애정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집 안의 풍경은 황량할 정도다. 박헌영은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여전하네 너. 인테리어좀 하고 살아. 사는 곳에 정을 붙여야 기운도 나는거야 임마.”
“생각해보지 뭐.”
박헌영은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내 작업공간을 보면서 말한다. 책상 하나, 거기에 노트북이 올려져 있다. 박헌영은 그러다가 갑자기 홀린 듯 내 작업실 쪽으로 걸어간다.
“야, 너 그래도 뭐 하나 있긴 있다야.”
“응? 뭐가….”
박헌영이 작업실로 걸어간다. 어쩐지 나는, 불현듯 아주 안 좋은 예감이 든다.
이 집에는 인테리어용 소품이라거나 장식물 같은 건 하나도 없다. 하지만, 딱 하나 있다. 내가 내 의지로 가져다 놓았고, 생활 이외의 목적을 가진 물건이…. 딱 하나 있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박헌영에게 뛰어간다.
“야, 야! 잠깐….”
하지만 박헌영은 그 새 책상 위에 올려놓은 물건을 집어들고 본다. 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장식용 물건,
액자. 이선준과 찍은 사진.
박헌영은 어둑한 방안에서, 거실에서 들어오는 불빛에 의지해 그 사진을 보고 있다. 나는 문틀을 잡고 얼어붙은 채 그런 박헌영의 모습을 본다. 나와 이선준이 입맞춤하고 있는 사진,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찍은 사진이다.
변명할 것도 없다.
미안할 것도 없다.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없다.
내가 잘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엄청나게 큰 잘못을 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다. 전혀 상상도 못 하고 있었어. 나는 왜, 항상 이런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만 하는거지?
“언제…. 찍은거야?”
“아…. 일 년 전에.”
최근에 찍은 건 아니다. 그런 오해를 살 수는 없다. 박헌영을 속이고 이선준과 몰래 만나왔던 것 같은, 그런 오해를 받는 건 정말 싫다.
“그래?”
박헌영은 왜 이런 사진을 찍은건지. 왜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액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나를 지나쳐 거실로 가서 앉을 뿐이다. 박헌영이 화낼 이유가 없다. 나도 알고 녀석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의 어떤 지점을 들켜버린 것 같은 수치심과, 동시에 죄책감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저기….”
“술 더 먹자.”
박헌영은 맥주가 아니라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온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소주를 따라서, 박헌영이 마시고 나도 마신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저 술만 마신다.
박헌영은 그렇게 술을 잘 마시는 타입이 아니다. 나도 속이 뜨거워진다. 너무 오랜만에 마신 탓이다. 나는 박헌영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창밖만 바라본다.
“너…. 그렇게 좋아하냐…. 아직도?”
박헌영이 약간 풀린 목소리로 말한다.
“모르겠어.”
그 말밖에 할 수 없다.
“나보다…. 더 보고싶었냐?”
박헌영의 그 말에 나는 결국 박헌영을 쳐다본다. 붉게 충혈된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말해야만 할까.
그래, 기만의 시간은 지났다. 나는 박헌영보다 이선준에게 먼저 전화했다. 이선준의 전화번호가 달라진 것을 알고 절망했다.
박헌영에게는 전화하지 않았다.
“응.”
그 말을 한 채, 나는 고개를 숙인다. 차라리 때려줘. 나를 미친년이라고 욕하면서 때려줘. 얼마든지 맞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나는 아직 그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이건 그 일의 연장선이다.
“너보다…. 이선준이 더 보고 싶었어.”
나는 항상 씨발년이었으니까. 나를 학대하고, 모욕해도 좋아. 그렇게 해서 네가 편해질 수는 없겠지만, 마음의 어떤 부분은 풀어낼 수 있겠지. 박헌영은 웃는다.
“괜찮아. 그래도 돼. 나쁜 일은 아니잖아.”
박헌영은 그렇게 말한 뒤 내 옆으로 조금 더 다가온다.
“그래도, 널 먼저 만난 건 나잖아.”
“!”
박헌영이 살짝 입술을 들이밀고, 내게 닿았다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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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께서 바라신 대로 후편
절단지옥에 떨어지고 싶다는 바람대로.... 드렸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