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4 설원이 아니에요. =========================
“어디 가? 비즈니스 해야지.”
“놔, 놔 이거…. 이거 뭐야. 너 뭐야? 이, 이게 대체….”
“뭐긴 뭐야, 낚인거지. 앉아. 너네 회사는 빵꾸 내도 봐주나보다?”
어째서 인터뷰 대상이 박헌영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인터뷰 펑크 내면 책임은 내가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될거다. 아무리 내가 프리랜서고 낙하산이라 해도 이런 문제를 곱게 넘어가지는 않을거다. 내가 여기서 도망가버리면 박헌영은 다음 인터뷰 요청을 분명히 거절할 거다.
말했듯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있는 때는 지났다. 나는 박헌영을 노려보며 자리에 앉는다. 박헌영은 나를 보며 빙긋 웃는다.
“많이 예뻐졌네.”
“……어떻게. 어떻게 한거야?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내가 생각해도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만나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바란 건 아니었다.
“나 밥 안 먹었어. 뭐라도 좀 시키고 하자.”
나는 박헌영의 태연한 태도를 보며 질려버릴 것 같다. 내가 달라진 것처럼 박헌영도 뭔가 달라졌다. 나는 커피를, 박헌영은 식사를 시킨다.
“그냥 인터뷰 잡고, 너가 하는 거 아니면 인터뷰 안 하겠다고 했지. 구라도 좀 쳐달라고 했고.”
서필원이랑 박헌영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박헌영은 박기자를 구워삶아서 나를 거짓말로 낚아보라고 한거다. 나는 박헌영을 쳐다보며 말한다.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은 건 전혀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찾은거야?”
“디씨하다가.”
“뭐?”
이게 무슨 개소리지? 디씨라는 거 그 디시인사이드 말하는 거 맞지? 갤러리로 유명한 그거. 박헌영은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어느 날처럼 글 쓰고 판갤하던 박헌영이 누가 싼 똥글을 봤다. 군인인 갤러 하나가 잡지에서 엄청 예쁜 일반인 찾았다고 자랑한 것이 문제였다. 일반인 덕질로 유명한 다른 놈이 ‘그게 얘 맞냐?’하면서 내 얼굴을 캡처한 사진을 올렸다. 그리고 그게 개념글에 갔다. 그리고 박헌영은 그걸 본거다. 박헌영은 그게 무슨 잡지냐고 물었고, 박헌영은 그걸 추적해 회사에 연락한거다.
말도 안 된다 정말, 혹시 박헌영이나 이선준이 날 찾아내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무슨 흥신소나 그런 걸 생각했다. 디씨질하다가 날 찾아낼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역시 그 사진이 문제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지도 않는다. 나는 피식 웃는다.
“어이없어.”
“나만했겠냐? 증발한 친구가 이상한 어용잡지사에 들어가서 기사 쓰고 있는데?”
“진짜, 진짜 어이없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한다. 커피와 식사가 나오고 박헌영은 점잖게 포크와 나이프를 놀린다. 박헌영은 묵묵히 먹다가 나를 쳐다본다. 질책하는 것 같은 눈빛이다.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할 말?”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할 말이라, 해야 될 말이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나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할 말은 하나밖에 없다. 나는 박헌영에게 고개를 숙인다. 떨지 않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는 박헌영에게 폭력적으로 대했고, 상처를 줬다. 죽어버리려고 그랬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건 온전히 나쁜 행동으로만 남아있다. 계속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나면 제일 먼저 사과를 해야 한다고 여겨왔다.
“앞으로 열 번 정도 더 사과해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은데.”
박헌영이 나이프를 놀리며 중얼거린다. 나는 박헌영에게 다시 고개를 숙인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당연한거다.
“미안….”
“아니, 지금 말고. 다음에 만났을 때 해.”
박헌영은 내 말을 중간에 잘라버린 뒤 말한다.
“너 또 도망갈 거잖아.”
“…….”
박헌영은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고 있다.
“도망가지 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다시 만나고, 다시 관계를 만들어도 되는건가? 하지만 결국에 또 상처로 끝날 그 관계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건가?
“또 상처주지 마라.”
“나중에 더 크게 상처받을거야.”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다. 나는 다시 겁에 질려있다. 박헌영은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그건 내 문제야. 너한테 걱정해달라고 한 적 없어.”
그 말을 듣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래, 그런거다. 남의 상처까지 걱정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 그런 걸 신경쓰며 살기에 나는 이미 충분히 많은 잘못을 저질러버렸다. 박헌영이 내 앞에 자신의 핸드폰을 밀어놓는다.
“전화번호 내놔.”
“헌팅 치고 고압적인데….”
“빨랑.”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전화번호를 입력한 뒤 박헌영에게 건넨다. 전화 걸고, 내가 확인까지 한 다음에야 박헌영은 핸드폰을 집어넣는다.
“이제 일하자.”
“일? 아….”
잠깐 잊고 있었다. 인터뷰 하러 왔던 거구나. 새삼스럽다. 박헌영이 이런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프로라고 생각하고 보니까 남다르다. 이 자식 이렇게 보니까….
꽤 멋있다. 운동도 좀 하는지 예전처럼 어깨가 살짝 굽어있던 것도 쭉 펴져 있다.
“명상을 하는 거에요. 음, 뭐랄까…. 제가 원하는 장면. 이를테면 그거 있죠. 가출소녀 마왕되다 2권 중반부에 나오는 꾸욱꾸욱 하는거요. 아 그거 사람들이 명장면이었다는 리플 많이 달렸는데…. 제가 평소에 명상을 하면서 그런 장면을 떠올립니다. 저의 판타지가 독자들의 판타지에 닿아 있으면, 그게 바로 좋은 장면인거겠죠.”
취소, 여전히 미친 변태새끼다. 아니 대체 무슨 장면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꾸욱꾸욱? 그게 대체 뭐야? 물어보고 싶다. 물어보고 싶다. 대체 그게 뭐냐고.
그런데 묻고 싶지 않아…. 도망쳐 버릴 것 같아. 애초에 무슨 제목이 그 따위야? 가출소녀가 마왕이 된다고? 제목만 봐도 보기 싫어진다.
박헌영과의 인터뷰는 내가 조금 참기만 하면 된다. 순조롭다. 질문지 작성한 대로 질문하고 녹음하면 된다. 녹취만 하면 된다. 녹취록 파일 박기자한테 전송하면 내 할 일은 끝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녹음을 마친다. 굳이 아는 사이라는 거 들켜봐야 좋을 거 없어서 인터뷰를 존댓말로 진행했다. 박헌영은 나를 보며 말한다.
“나 인터뷰 처음인 건 아냐?”
“그래?”
“그래, 너는 이 위대한 대작가 박헌영의 첫 인터뷰를 따낸 경이적인 존재라고.”
“네 문학은 그 초등생 강간소설에서 삼심 센티미터 정도만 움직인 것 같은데….“
“세상은 그런 걸 원하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그래, 이 정도면 문학관으로 인정해주자. 나는 한숨을 푹 쉰다.
“그으래…. 대단하십니다.”
일 년 넘게 떨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어제 만난 것처럼 이야기한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막상 만나니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앙금이라던가, 어색함 같은 건 없다.
“여자로 살기로 한거야?”
“글쎄, 애초에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건가?”
여자라는 것의 속성이란 무엇이고, 남자라는 것의 속성이란 뭘까? 남자답게 산다는 건, 여자답게 산다는 건 뭘까? 나는 이제 단언할 수 있다. 그런 건 세상에 없다. 남성적 행동과 여성적 행동이라는 건 그저 생리적인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따질거면, 나는 변하는 그 순간부터 여자로 살았다. 앉아서 소변을 보고, 브래지어를 차고 다녔다. 여자답게 산다는 건 딱 그 정도일 뿐이다.
“확실한 건, 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예뻐서 나쁠 거 없으니까.”
“아주 확고한데, 너 좀 어른같다.”
“내가 눈치만 보고 사는 어린애였다는 건 인정해. 그리고 이제는 그딴 게 전혀 중요한게 아니라는걸 깨달았으니까.”
나는 펌을 하고, 염색을 하고, 치마를 입고 다녀도 된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거다.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를 욕하는 숱한 대중들에게 외칠거다. 부럽냐? 갖고 싶냐?
안타깝게도, 나는 그 부러움에도, 그 소유욕에 보답해줄 수 없다. 저들이 못 생긴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내가 그들의 소유가 되지 않는 건 내 의지다. 그러니까 눈치를 볼 필요 같은 건 없다. 박헌영은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일 년 만에 사람이 바뀌었으니까, 그럴 법도 하다.
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입술을 살짝 깨문다. 아니다. 안 된다. 나는 자꾸만 피어오르는 의문들을 안으로 밀어넣는다.
“뭐? 말해.”
박헌영이 뭘 고민하냐는 듯 묻는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묻지 못한다. 물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예전부터 그래왔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에, 오히려 말한 것과 다름없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박헌영은 내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잠시 침묵한다.
“나도 몰라.”
박헌영은 뭘 모르는 건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른다는 말 하나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아버리게 된다.
“아…. 그래. 그, 그렇구나.”
나도 모르게 말끝을 더듬는다. 박헌영은 묘하게 가시돋힌 어투로 말한다.
“너 아직도 짜증나네.”
“미안해….”
사과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린다. 박헌영과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끝난 모양이다.
이선준과 박헌영은 절교해버린 모양이다.
나는 이선준의 근황에 대해 묻고 싶었다. 나는 침묵으로 이선준에 대해 질문했고, 박헌영은 흘리듯 대답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박헌영과 이선준은 서로 연락하며 사는 사이가 아니다.
아마도, 그 날 이후부터일거다. 이제 조금 옅어진 줄 알았던 죄책감과 부채감이 기어올라온다. 오직 나 하나 때문에, 내 모순과 아집 때문에 우리 셋은 찢어져 버렸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버려서, 모든 게 부서져 버릴 때까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은 탓이다.
“아, 앗….”
나는 갑자기 터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다. 박헌영이 당황한다.
“야, 너….”
“아, 아…. 미안. 미안…. 잠깐만. 잠깐만….”
나는 눈을 가린 채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칸막이를 열고 들어간 채 휴지를 잔뜩 풀어 눈에 가져다 댄다.
“으윽…. 윽…. 흐윽….”
억눌린 오열을 천천히 뱉어낸다. 나는 여전히 생각이 많다. 이따금 옛날 생각을 하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진다. 숨죽여서 우는 건 이제 능숙하다. 이따금 나를 휘어잡는 우울과 죄책감 때문에, 나는 이따금 울음을 터뜨렸다. 차 안에서, 회의를 하다가. 기사를 쓰다가. TV를 보다가도 문득 그랬다.
죽어버렸어야 하는데. 죽어버려야만 했는데.
울음의 순간마다 그런 말들이 내게 다가온다. 나는 필사적으로 슬픔을 토해내듯 운다. 나는 얼핏 멀쩡해 보인다. 하지만 속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아무렇게나 토해내던 슬픔과 분노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 때문에 망가진 게 하나 더 있었다. 감당할 수 없다. 감당하기 힘들다. 이미 나는 나를 너무나 미워하고 싫어하고 증오하고 있다. 나를 환멸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버렸다.
혹시나 했던 일이 역시나가 되는 순간이다.
“으으…. 윽….”
나는 울음을 천천히, 마치 끊어서 뱉듯 울어낸다. 혼자서 우는 건 익숙하다. 토하듯 울어내는 건 이제 적응했다. 하지만 도저히
슬픔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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