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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13화 (113/224)

00113 설원이 아니에요. =========================

하긴, 평범한 직원이 이랬으면 당장 모가지였을거다. 프리랜서인 데다가 예쁘고 귀여워서 봐주는거다. 나는 내 외모 덕분에 상당히 많은 어드밴티지를 얻고 있다. 편집장과 내 언쟁이 길어지자 여진언니가 상황을 중재했다. 편집장은 그냥 나를 놀려먹는 게 좋은거다.

“연작가는 다 좋은데, 화낼 때가 제일 귀여워.”

“성희롱이죠? 고소할거에요.”

“아, 아니! 예쁘다고 한 건데 왜 성희롱인가!”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바라본 직장생활 내 성희롱의 종류에 대해서 토론해보고 싶으신거죠?”

“내가 잘못했네…….”

내가 노려보자 편집장은 결국 사과한다. 나도 심각해지는 건 싫다. 염병할, 나도 이 정도는 이제 충분히 참고 넘어갈 수 있다. 여자로 직장생활 한다는 건 이런 성희롱적 발언을 무시하고 넘어가는 게 익숙해진다는 걸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이렇게 따지지도 못할거다. 내가 상당히 나은 근무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

회의 분위기는 여진 언니가 리드한다. 여진 언니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카리스마가 있다. 시사부 기자라는 직책이지만 기획부장이나 편집장도 여진언니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꼰대식 짓궃음이 문제다.

편집장도 내가 실수하고 잘 못 한 것들에 대해서 심하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여러모로 여진언니와는 다른 의미로 고마운 사람인 건 맞다.

물론 회식 할 때마다 오라고 불러댄다. 내가 거절 할 때마다 진짜로 서운해해서 문제다. 회식을 내가 왜 가? 미쳤어? 종무식이랑 시무식은 예의상 가긴 했지만 뜬금없이 벌어지는 회식이나 월말회식은 절대로 안 간다. 뭐 더럽게 노는 사람들은 아닌 걸로 알지만, 그야 술 먹으면 안 내도 되는 용기 내는 사람들 보고 싶지 않다.

나도 미친년이 아닌지라 평상시에는 예의바르고 친절하게 잘 한다. 다가오려고 할 때만 칼같이 거절하는거다.

기획회의는 곧 끝났다. 편집장이 장난으로 얘기하긴 했지만 내 사진 하나 컬러로 들어간 것 때문에 엽서나 메일이 왔다. 사람들이 다들 고무되어 있는 게 느껴질 정도다. 거의 타성처럼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독자 피드백을 받는 게 반가울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고 원하는 것 같아서 나도 잠깐 흔들렸지만 역시나 하기 싫다. 남들의 성취감을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럴 거면 진작에 모델 했지 내가 왜 머리아프게 이걸 하고 있겠어?

오늘은 다행히 달라붙는 놈들이 없다. 내 이번 취재 장소는 보성이다. 녹차의 고장에 가서 차도 좀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다. 커피만 자주 마시니까 입맛도 좀 버리는 것 같아서, 녹차도 한 번 제대로 마셔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차맛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거지? 갑자기 그걸 생각해보니 머리가 아파진다. 나 아무래도 실수 한 것 같은데. 다른 데로 하는 게 나으려나. 하고 싶은 것보다 기사 걱정부터 하는 걸 보면 나도 직업정신이 좀 생긴건가 싶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른다. 과자를 왕창 산다. 봉지과자가 아니라 비스킷류, 초콜릿류다. 나는 카트에 골라 담고 카드를 긁는다. 이거 가격 만만치 않네. 그래도 이 정도 출혈이야 감수할 수 있다. 내가 뭐 다른 취미생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옷 사는 거 빼고는 돈 거의 안 쓴다.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연다. 무턱대고 삿더니 엄청 무겁다. 나는 준비해 놓은 종이박스에 과자들을 차곡차곡 담는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군생활 힘들텐데 이런 거 한 번 받아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거다.

나는 책상에 앉는다. 책상에 앉을 때마다 액자가 눈에 밟힌다. 내가 올려놓은 거니까 어쩔 수 없지만. 볼 때마다 좀 찌릿찌릿하다. 내가 한 선택이 정말 옳은 거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항상 그렇게 생각하며 나 자신을 위로한다. 이선준의 얼굴을 볼 때마다 괴롭지만 나는 액자를 엎어놓지 않는다. 그나마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사진을 찍거나 이러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사진 하나 정도는 있을법한데도 없다.

나는 예전에 사놓은 편지지를 꺼낸다. 한정운한테 편지를 쓸 생각이다.

[정말정말 사랑하는 내 동생! 누나는 네 걱정 때문에 밤에 한숨도 못잔단다.]

으엑, 내가 쓰면서도 좀 그렇네. 하지만 하기로 한 이상 멈출 수 없다. 한정운과는 내 이름에 대한 것들도 다 입을 맞춰놨다. 친누난데 설씨면 이상하잖아.

나는 글씨 잘 쓴다. 그런데 남자 때 쓰던 버릇 때문에 글자 자체가 상당히 뭐랄까, 거칠다고 해야하나 딱딱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있다. 그래서 일부러 좀 귀엽게 글자를 동글동글 말아버린다. 여러 방식으로 글자를 쓸 수 있다는건 꽤 괜찮은 능력이다.

어, 그런데 이러다가 한정운이 누나하고 금단의 관계로 오해받으면 어쩌지? 누가 편지를 훔쳐 읽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이거 재미있겠는데?

근친상간맨으로 오해받는 한정운이라, 그거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다. 나는 편지를 다 쓴다. 별로 할 얘기도 없어서 막막했는데, 의외로 펜을 잡으니 술술 넘어간다. 나는 편지에 물방울을 몇 개 떨어뜨린다. 이러면 편지지가 마르면서 운다. 그러면 쓰면서 눈물이라도 흘린 것처럼 된다.

내가 생각해낸 거지만 좀 사악하군. 그래도 편지 써주는 게 어디야?

소포를 부치고, 발송자는 가짜 이름을 적어서 했다. 애초에 가짜 이름으로 사는 주제에 또 가짜 이름을 쓰다니 나도 웃기는 사람이다. 소설 보낼 때에도 왔는데, 요즘 들어 우체국 들를 일이 갑자기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우체국에 별로 볼 일이 없을거다. 손편지 써서 보낼 일도 없는 세상이다. 이렇게 군대 가 있는 사람한테 보내는 게 세상에 남은 손편지의 대부분이 아닐까 싶다.

차에 탔는데 전화가 온다. 박철원 기자다. 무슨 일이래?

“네 박기자님.”

[아, 연작가님. 이번 취재 갔다 오셨어요?]

“아뇨, 아직요.”

나랑 별로 엮일 일 없는 사람이다. 결혼도 한데다가 나한테 집적거리거나 이런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세요?”

[저, 제가 부탁을 드릴 일이 좀 있어서요.]

“아, 네 들어보고 결정할게요.”

좀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대부분의 경우 상냥하게 대해준다. 들이대지만 않으면 된다. 업무협조야 뭐 잘 없는 일이지만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준다. 기사 검토라던지 하는 일들도 가끔 공유한다.

[제가 이번에 인터뷰 일정을 잡아놨는데, 그 날 지방 출장을 가야 해서요.]

“아, 네.”

[이게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기가 좀 애매해서…. 날짜를 옮기기도 힘들 것 같고 그러네요.]

“인터뷰를 제가 대신 하면 되는 건가요?”

인터뷰라, 귀찮긴 하지만 못 할 것도 없다. 나도 인터뷰는 몇 번 해봤다.

[아, 네. 서필훈 작가라고 아세요?]

“아뇨, 처음 들어봐요.”

[질문 목록이나 내용은 제가 메일로 송부드릴 테니까 그 대로만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귀찮은 일은 없을 겁니다. 아, 정말 고맙습니다. 이거 진짜 곤란했는데….]

“아, 네. 뭐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거죠. 나중에 저도 한 번 도와주시면 돼요.”

[인터뷰 날짜랑 장소, 질문 목록 메일 송부드릴 테니 확인해 보세요.]

“네, 네.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는다. 나는 애초에 다른 사람들 일에 별 관심이 없어서 기획회의 때도 내 할 말만 하고 딴전 피운다. 인터뷰라면 그냥 질문하고, 녹취하고 그 내용만 정리하면 되는거다. 대담 수준도 아니고 인터뷰니까 귀찮을 것도 없을거다.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문학 관련 기자가 출장 갈 일이 뭐가 있지?

집에 와서 메일을 확인한다. 서필훈 작가의 약력과 출판목록이 나열되어 있다. 읽어본 책 하나도 없네. 나는 애초에 장르문학 쪽은 관심 없었으니까 당연한거다. 최근에 상을 하나 받은 모양이다. 데뷔한지도 엄청 오래됐다. 나이는 마흔하나다. 계간지로 등단한 다음 장르문학 쪽으로 활동한 모양이다. 쳇, 재능충이라 이거지.

그러고 보니 책 안 읽은지 엄청 오래됐다. 뭐 질문 내용 녹음이나 하면 되니까 큰 상관은 없을거다.

언론에 노출되는 걸 좀 싫어하는 사람인데 우연찮게 인터뷰가 성사되었으니 꼭 잘 마무리해달라는 말이 있었다. 내가 정리할 필요도 없고, 녹음 파일을 보내면 알아서 할 모양이다. 간단하네. 나는 질문목록을 대충 훑은 뒤 프린트했다.

인터뷰 날짜는 내일이다. 강남역 근처에 있는 브런치카페에서 만나기로 되어있다. 흐음, 작가 인터뷰는 처음이라 좀 묘한데. 내가 지금까지 인터뷰한 건 관광안내소 소장이나 식당 할머니 아줌마 이런 사람들이다.

음, 잘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 작가 책을 좀 읽고 가는 게 좋겠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별 수 없다. 땜빵하는 거니까 박기자도 이 정도는 감수해야 될거다.

다행히 브런치 카페는 전용 주차장이 있어서 차를 세우는 게 크게 무리가 없었다. 인터뷰 시간은 삼십분 정도 남아있다. 기자가 먼저 가서 대기하고 있는 게 예의다. 카페에 들어가서 예약해 놓은 테이블에 가서 앉는다. 녹음기를 비롯한 질문지를 꺼낸다. 음, 옷차림 이 정도면 괜찮겠지?

회색 정장 자림이다. 스타킹은 안 신었고 검은색 힐을 신었다. 무난한 오피스룩이다. 정장은 싫어하지만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는 입어주는 게 예의겠지.

브런치 카페에는 사람이 꽤 있지만 북적거리지는 않는다. 각자 저 할 일을 하면서 식사를 하거나, 얘기를 하는 등 가지각색이다. 솔직히 나는 서양식 브런치 별로 안 좋아하는데. 뭐 이것도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

박기자한테 카톡이 온다.

[인터뷰 현장 도착하셨나요?] – 박철원 기자

[네.]

[아, 그렇군요. 곧 도착하실 거에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리고 그게…. 좀, 죄송합니다.] – 박철원 기자

[뭐가요?]

[그게 좀, 작가님이 꼭 연작가님이랑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아마 저번호 보고 나서 연작가님한테 관심이 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 작가님이 한 번도 인터뷰 하거나 얼굴 같은 게 안 알려져서, 이 작가 인터뷰하면 이번 호 진짜 이슈 될거에요.] – 박철원 기자

무슨 소리야? 갑자기 이상한 소리지? 저번 호에 내 얼굴 실린 거 보고 개인적으로 접근했다고? 이 인간 마흔하나면서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어쩔건데? 이 작가 완전 미친놈 아냐?

그리고 박기자 이 새끼도 날 팔아먹다니, 너무하는 거 아냐? 곧 카페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아무래도 저 사람인 것 같은데, 나는 어쩐지 익숙한 인상이라서 엉거주춤하게 일어선다. 마흔 한 살이 저런다고? 거짓말이다.

그 남자가 천천히, 하지만 나를 똑바로 쳐다본 채 걸어온다.

심장이 갑자기 터질 것처럼 뛴다. 뭐야, 이거. 이거 뭐야? 무슨 상황인거야?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인터뷰어가 남자 분이라고 들었는데. 바뀌었나 보네요.”

[그리고 좀 이상하긴 한데, 자기를 서필원 작가라고 거짓말을 좀 해달라 하더라고요. 인터뷰 요청도 제가 한 게 아니라 회사로 먼저 연락이 왔구요.]

그 남자는 내 앞으로 다가오며 선글라스를 벗어 와이셔츠 주머니에 걸친다. 나는 얼어서 아무 말도 못 한다. 그 남자는 나를 보며 악수를 청한다. 나는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한 자세로 그 남자를 쳐다본다.

“박헌영입니다.”

“어, 어, 어, 어떻게…. 어떻게?”

박헌영이 내 눈앞에 있다. 조금 스타일이 바뀌고, 몸이 좀 좋아진 것 같지만 박헌영이 확실하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거지? 박헌영은 내가 손을 잡을 생각이 없자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찾기 힘들었다. 설원.”

박헌영이 어떤 승리감에 취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나는 가방을 들고 자리를 뜬다. 뭔가에 당했다. 음모 같은 것에 휘말려 버렸다.

============================ 작품 후기 ============================

히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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