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1 설원이 아니에요. =========================
“아 진짜 싫다구요.”
[아 연작가님 우리 좀 한 번만 살려줘요.]
“제가 작가지 모델이에요? 싫은 건 싫은거에요.”
[이번 분기 안에 구독자 수 5%이상 안 오르면 예산 삭감한대요.]
“아니, 그러면 모델 부르면 되잖아요. 게다가 이게 무슨 패션잡지도 아닌데 왜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사람을 실어요?”
텍스트 위주로 된 흑백잡지 주제에 무슨 맥심 표지 같은 걸 하려고 하나? 게다가 표지가 자극적이면 구독률이 오를 거라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구시대적이다.
[아 정말, 이러면 계약 전면 재검토합니다? 편집장님도 승인하셨어요.]
“해봐요. 국세청에 찔러서 너죽고 나죽자로 갈거니까.”
찔리는 데가 많은 회사다. 정부기관은 각자 연계가 잘 안 된다. 이건 문체부 쪽 자금을 받을거다. 물론 국세청에 찌른다고 해서 회사가 무너지지는 않을거다. 그냥 나 건드리면 너네 귀찮을거다! 이 정도 협박이다.
[아, 정말 연작가님!]
“애도 아니고 왜 떼를 써요? 씨알도 안 먹힐 거 알잖아요? 저는 제 얼굴 팔리는거 싫어요. 그럴거면 제가 애초에 인터넷 방송이나 했지 이걸 왜 해요?”
억대연봉 받는 BJ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거다. 그냥 게임만 해도 될 것 같은데. 귀찮게 연예인 하느니 그게 낫겠다. 그리고 애초에 내 얼굴을 표지 모델로 왜 쓰고 싶다는거야? 날 뭘로 소개하려고?
이거 진짜 완전 가라 회사라서 미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게 가장 큰 문제다. 떼를 쓰면 될 거라고 생각하다니, 진짜 돌았다.
“아, 해결법 알겠어요.”
[네? 네? 뭐에요?]
“5퍼센트면 몇 명이에요?”
[음…. 한 1000명 정도일걸요.]
애초에 정부에서 발행하는 어용잡지를 누가 정기구독 한다는거야? 그냥 기차역 같은 공공기관에나 꽂혀있는 잡지잖아 이거. 애초에 정기 판매부수가 이만부라는 거에서 이거 좀 미쳤는데 싶다. 내가 알기로 잡지류 정기 구독자 수가 그리 많지 않을건데? 내 생각에는 정부기관 같은 데에 강매를 하는 것 같다. 군부대에도 들어가는 거로 알고 있는데.
“직원 분들끼리 나눠서 구독 신청하세요. 그리고 구독료 입금되면 횡령해서 되돌려 받으세요. 그럼 되잖아요? 뭐 세금만 빠지겠네. 그것도 부족분 횡령해요.”
[이미 구독하고 있는데요….]
“추가 구독하면 되잖아요.”
물론 내가 하지만 개소리다.
“아 몰라! 나한테 왜 그걸 물어봐요? 김과장님은 주택사업 하는데 노가다 십장한테 분양전략 상담할거에요?”
[에……. 그건 아니죠.]
“저는 십장이고, 김과장님은 현장소장인데, 왜 저한테 떼를 써요? 저랑 얘기하는 게 좋아요? 저 성격 더러운 거 아시잖아요.”
[그, 그래도 그게 매력인….]
“이런 썅, 야! 너 이거 다 구라지!”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냐! 이거 진짜 이상해. 이런 날림 회사에 그딴 지시가 내려올리가 없잖아! 똑바로 말해!”
[그, 그, 죄송해요!]
“너 다음 달 기획회의 와라 꼭! 전기통구이로 만들어 버릴거야!”
나는 소리를 확 지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또라이 같은 자식이, 예전부터 집적거리는 거 계속 밀었는데 진짜 질리지도 않고 이런다.
물론, 모델 요청은 전부터 받았던 거니까 상사가 시켰을거다. 그런데 항상 전화 할 일이 있든 없든 계속 전화를 해대니 진짜 경찰에 신고라도 해버릴까 싶다. 이런 씨, 왜 지들 욕망을 왜 잡지 컨셉을 바꿔가면서까지 하려고 그러는거야?
뭐, 진짜로 몇 번 지져주면 안 그럴 수도 있을거다. 흠, 진짜로 해버릴까?
안돼, 직장 잃으면 나 갈 데 없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나가리 되면 인생 조지는거 순식간이다. 진짜로 이 참에 비제이의 길로 들어서 볼까? 한 탕 크게 땡기고 튀는거야.
안돼, 분명히 사이버 세계에 본래 인격을 두고 있는 박헌영이 볼거다. 잠수 탄 친구가 갑자기 인터넷 방송 비제이가 되어서 나타난다면 경악하는 걸 넘어 비명이라도 지를거다.
나는 하던 일을 계속한다. 기사를 쓰고 있었다.
고성에서 돌아온지도 며칠이 더 지났다.
[……양양 해수욕장도 추천할만한 곳이다. 이 길은 꼭 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려보길 권한다. 혹은 차에서 내려 해안도로변을 여유롭게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괜찮다. 아직 햇살이 그리 따갑지 않은 지금이 산책과 드라이브하기 제일 좋을 때다. 언덕을 내려오며 백사장에 파도가 부서지는 광경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시원한 풍광만으로도 당신은 세 시간, 네 시간을 달려 이곳에 올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으아, 피곤해.”
사진들을 정리해서 쓸만한 걸 편집한다. 일요일 내내 관광지를 전부 돌아다니며 사진 찍고 그림 될만한 걸 찾아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돌아오고 집 청소를 하고, 밀린 설거지도 하고 하루 쉰 뒤 본격적으로 기사 작성에 들어갔다. 이선준과 잠깐 산 거지만 그 뒤로 청소를 열심히 하는 습관이 생겼다. 집이 깨끗해서 나쁠 건 없다.
놀러 다니면서 돈 버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든 일이 되면 힘들다. 나름대로 이것도 돈 버는 일이니까 허투루 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돈 받는 것만큼의 책임감이 있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일이 좀 급하기도 하다.
잡지사 사람들은 남들보다 빠르게 산다. 주간지면 일 주일 빠르게 살고, 월간지면 한 달 빠르게 산다. 이건 월간지다. 그러니까 5월인 지금 나는 유월에 갈만한 곳을 추천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한참을 더 끙끙대다가 결국 기사를 완성한다. 특집기사는 이번에 내가 할 일이 아니다. 특집까지 내가 해야 했으면 진짜 진이 다 빠졌을거다. 먼저 써야 할 기사들은 이미 완성해 놨으니, 월 중순인데 이번 달에 할 일은 다 끝난 셈이다.
나는 사진을 대충 추려서 압축한 뒤 메일을 보낸다. 기사 컨셉에 맞는 사진을 내가 몇 개 추려 보내면 그 쪽에서 알아서 쓸만한 사진을 사용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번 달 치 일은 끝난거다. 뭐, 계속 수정 사항이 오고, 요구 사항에 따라 퇴고 및 수정을 좀 하면 된다. 제일 싫은 일이지만 필요하면 회의도 좀 한다.
먹는 게 대세인 시대인지라 내가 쓰는 기사는 총 네 개다. 관광지 소개를 먼저 하고, 그곳의 맛집이나 로컬푸드에 대해 소개하는 것을 비율을 맞춘다. 대체적으로 관광지 소개 둘, 음식 소개 둘이다. 덕분에 전국의 먹을 곳들은 온통 돌아다니고 있다.
맛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개하려니 할 때마다 고역이다.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검색하고 관련자료도 엄청 찾아봐야 한다. 그리고 나 많이 먹지도 못한다고. 처음에 잘 모를 때에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있다. 처음 하는 일이니까 공부도 많이 해야 했다.
[연작가 뭐해요?]-최여진언니
카톡이 왔다. 음, 나는 바로 답장을 한다.
[기사 방금 다 썻어요. ㅠㅠ]
[수고했어요. 나 지금 근천데, 밥이나 먹을래요?]
[저야 좋죠. 어디세요?]
[태문역쪽에 브런치 카페 하나 있거든요? 거기로 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금방 갈게요.]
나답지 않게 바로 승낙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갑자기 낯선 일을 하게 되면서 여러모로 도움을 준 사람이 있다. 그게 같은 잡지사 소속의 최여진 기자다. 나이는 서른다섯, 실제나이로 치면 나보다 훨씬 많다. 나한테는 국정원 아저씨만큼이나 고마운 사람이다. 나는 적당히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집을 나선다.
브런치 카페에 도착하자 익숙한 차가 세워져 있다. 같이 차 타고 사진을 어떻게 찍는지, 어떤 식으로 기사를 써야 하는지 여진 언니한테 다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하고 같은 프리랜서는 아니고 회사 소속이지만, 나를 차별이나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서 좋았다. 지금 나는 문화/여행 파트를 맡은 기자고, 내 전에는 여진언니가 그 쪽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일을 내가 하고, 언니는 시사 쪽 일을 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후로 생긴 몇 없는 인간관계 중 하나다. 게다가 만난지 오래 됐는데도 여전히 내게 존댓말을 한다는 지점이 약간 서운하면서도 좋다. 다른 사람을 존중해준다는 느낌이 든다.
“안녕하세요.”
“오, 연작가, 오랜만이에요.”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벼운 투피스 차림의 여성이 나를 보며 인사한다. 우아하고 고상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친절하고 상냥하다. 항상 머리를 묶고 있고, 시원한 목선이 강조되어 있다. 결혼은 아직 안 했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상냥하고 착하지만 할 말은 잘 하고 산다.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항상 당당한 태도가 인상적이다.
나도 나이 먹으면 이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는 의자에 앉으며 울상을 짓는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아니야, 방금 왔어요.”
언니가 있으면 이런 기분일까 싶다. 우리는 각자 메뉴를 선택하고 주문했다. 브런치 카페는 조금 비싸긴 한데, 깔끔하고 정갈한 분위기 때문에 좋다. 지금 시각은 브런치 먹기 딱 좋은 오전 11시다. 그녀가 나를 보며 말한다.
“눈이 퀭하네, 잠 못 잤나봐요. 이거 내가 괜히 불렀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로.”
“앉은 자리에서 딱 해버리려는 거 좋긴 한데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어젯밤부터 기사를 팍 해버리느라 잠도 안 자고 붙들고 있었다. 조금 힘들긴 한데, 익숙해져서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다.
옛날 생각이 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회에 내던져져서 막무가내로 일 떠맡고 전전긍긍하던 내게 먼저 연락해준 게 여진언니다. 자기 일도 하면서 내 일도 도와주느라 일을 두 배로 하면서도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통찰력 비슷한 게 있었는지, 내가 툭 건드리면 무너질 것처럼 불안해 보였단다. 정기 회의 때마다 내가 자꾸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그래서 혼자 쩔쩔 매고 있는 날 도와줬다. 정말 좋은 사람이다. 뭐 본인 말로는 인수인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고 했는데, 어쨌든 그랬다고 해서 도움을 받은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주문한 메뉴가 나온다. 나는 설탕을 입혀 구운 토스트와 스크램블 에그, 언니 쪽은 수제 햄버거를 능숙하게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다.
“이번 5월호 기사 좋던데? 연작가는 볼 때마다 감수성이 참 풍부한 것 같아요.”
나는 이 묘하게 반말인 듯 존댓말인 말투를 좋아한다. 친밀한 듯 존중해주는 태도다. 롤모델까진 아니더라도 이런 사람이 되고싶다. 하지만 못 되겠지. 나도 잘 알고 있다고.
“헤……. 뭐 언니가 지금까지 도와주서셔 그런거에요.”
“내가 뭘 했다고? 다 재능이 있어서 그런거에요.”
우리는 밥을 먹으며 이야기한다. 마음이 좀 편해진다. 시사 쪽은 항상 민감한 부분이 많아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텐데, 엄살 한 번 부리는 걸 본 적이 없다. 나는 좀 의도적으로 언니의 기사를 안 본다. 말했듯 우파적 시선에서 만들어지는 잡지다. 나도 결국 체제에 편승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마음의 문제는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다. 괜히 그걸 봐서 내 이중잣대를 직시하고 싶지 않다.
일을 어느 정도 배운 지금이야 나랑은 만날 일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가끔씩 만난다. 술을 마시는 건 아니고 저녁이나 점심을 함께 먹는 정도다.
우리는 일 얘기, 취미생활 얘기를 적당히 나눈다. 브런치를 다 먹고 나서 커피도 한 잔 마시다가 헤어진다. 나는 언니가 차 타고 가는 걸 먼저 보고 나도 차에 탄다. 좋은 사람이다.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거다.
하지만 어쩐지 공허하다. 서로 주변만 핥다가 끝나버리는 대화의 무의미함을 느낀다. 언니 잘못은 당연히 아니다. 그냥 내가 원하는 게 조금 이상한 것일 뿐이다.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 사실을 느낄 때면 좋은 사람을 만나 얘길 하면서도 결국 공허함밖에 남지 않는다. 소설을 다시 쓰려고 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얘기하는 순간부터 일에 대해서 소홀해질거라고 생각하게 될 게 뻔하다.
여긴 학교가 아니다. 내가 뭘 한다고 해서 응원해주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일적 관계에 있는 사람을 만나서 직무 이외에 다른 걸 하려고 한다는 걸 말하는 건 ‘저 딴짓 열심히 해보려구요.’ 라고 말하는 것밖에 안 된다.
물론 안다. 언니가 그렇게 생각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쪽에서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책잡힐 수 있는 말을 일부러 하고 싶지 않다.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라는 건 그런거다. 진짜로 속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사회에 나오기 전 친구들이 사람에게 중요한거다. 세상 모든 회사원들이, 직장인들이 그럴거다.
다들 외롭고 고독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거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일 뿐이다.
============================ 작품 후기 ============================
enders// 어케 찾아낸건지 진짜 신기하네.... 감사와 감탄의 의미로 한 편 더 올림.
내가 연재하고 있는 글 제목은 '나를 위해 살겠다'임
설원 스타일을 기대하고 본다면 분명히 실망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