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0 설원이 아니에요. =========================
“상당히 솔직해지셨네요.”
“특히 비난이나 거절할 때 이백퍼센트 정도 더 솔직해지지.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
나는 핸드백에서 피카츄를 꺼낸다. 노랗고 귀여운 피카츄의 귀에 뭔가 솟아나 있다. 버튼을 누르면 파지직 하면서 대상을 장시간 스턴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괴물이다.
“호신술 그딴 거 필요없어. 이거 한 방이면 삼도천에 발목까지 담근다니까? 이거 그리고 밀수품이라 진짜로 백만볼트야. 살래야 살 수도 없는 커스텀 튜닝모델이지. 지금은 테이저건을 사볼까도 고려중이지. 판매루트를 찾는 게 좀 어려워.”
“……여러모로 성장하셨네요. 취미도 상당히 매니악하시고…. 사용할 배짱은 있으세요?”
“음, 배짱은 모르겠는데, 일단 엇 하는 순간 나가떨어져서 좀 재미없더라.”
옷 위에 갈겨도 효과를 볼 수 있는 초고성능 스턴건이다. 상대가 방호복 같은 걸 입지 않은 이상 파지직! 하는 순간 뻗는다. 내 말에 한정운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나를 걱정하는 표정이다. 테이저건 진짜 사고싶다. 음, 그런데 테이저건 사고로 사람도 많이 죽는다고 하던데. 그건 역시 좀 그런가?
“그걸 사용해야만 하는 상황을 겪는단 말이네요.”
“응, 뭐 괜찮아. 지금은 오히려 그런 놈들 나오면 어, 실험체다 하면서 지져버리는데 뭐.”
음, 허세가 좀 섞였긴 하지만 예전만큼 무섭지는 않다. 뭐 그렇다고 해서 수십 수백명을 만나고 그런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또라이들이 있다. 내가 어쩐지 그런 놈들을 자주 만날 뿐이다.
한정운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한다. 좀 민감한 얘기를 할 때에는 목소리를 좀 죽인다. 나도 내가 어떻게 사는지, 뭘 하고 사는지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래도 확실한 정보를 말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내가 어디에 사는지, 무슨 잡지사에서 일하는지. 이런 것들은 피해간다.
하지만 역시나 그런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이야기를 하니까 좋다. 그냥 좋은 수준이 아니라 행복하다. 나는 지금껏 대화에 목말라 있었다. 한정운은 이제 배가 좀 부른지 여유롭게 먹는다.
“요리 잘 하시네요. 잘 먹었습니다.”
“흐응, 너 군대에 있다니까 불쌍해서. 뭐 사먹이는 것도 좀 싫어서 해봤어.”
“모성애에요?”
“그렇게 봐도 좋고, 뭐. 오랜만에 만나는 것에 대한 선물이라고 봐도 좋고.”
무엇보다 한정운은 나를 직접적으로 설득했다. 죽으려고 하는 걸 말린 게 한정운이다.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살아서 더 행복하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단지 한정운이 내게 끼친 영향을 인정하는거다. 그냥 그런거다.
“소설은 좀 쓰세요?”
한정운의 물음에 나는 말문이 막힌다.
소설을 안 쓴지 꽤 오래 되었다. 무슨 말이든 나오는 순간 내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같고, 무슨 말을 해도 기만 같았고, 어떻게 써도 자기변호처럼 보였다.
그것을 내 스스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안의 모순을 인정한 다음부터 나는 내 자신이 역겹고 싫었다. 내 안에서 생성되는 모든 문장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기사를 쓰는 건 그냥 내가 느낀 객관과 감정을 말하는 거니까 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소설을 쓴다는 자의식을 가지는 순간부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소설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외면해왔다.
내 표정을 본 한정운은 뭔가 느낀 듯 말한다.
“괜찮아요. 쓰고 싶지 않으면 안 써도 돼요. 그래야만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니까.”
“쓰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 해. 그런데 노트북 앞에 앉는 순간부터 아무 생각이 안 나. 뭘 써도 가짜처럼 느껴져.”
“가짜면 어때요?”
“나는 내 소설에 진정성을 담보하고 싶어.”
“지금 누나가 모든 문장을 가짜라고 느끼면, 그 가짜가 누나의 진정성인 거에요. 진정성이랑 진실성은 전혀 다른 말이잖아요.”
어쩐지 위로받는 기분인데, 나 얘 위로하고 보듬어주러 온 거 아니었나?
이런 대화를 원했던 기분이다. 속으로 앓기만 하고 아무 것도 뱉어낼 수 없었던 지난 시간들 동안 나는 혼자서 괴로워했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나에게 말해준다. 그것에 동의할 수 있든 없든 그 대화는 소중하다.
“뭐, 됐어. 언젠가 다시 쓰게 될 날이 오겠지.”
“흠, 일단 할 거면 통합신인상에 투고나 한 번 해봐요. 얼마 안 남았던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말이 깊게 들어와 박힌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다.
“통합신인상?”
“작년에 연기됐던 거 있잖아요. 첫 시작인 만큼 이번 년도 등단자는 주목 엄청 받을걸요. 최종심까지만 가도 좋을텐데요.”
“아……. 그게 있었구나.”
나는 홀린 듯 중얼거린다. 작년 예비군 훈련 때, 이선준과 약속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소설을 안 쓴다. 소설을 보지도 않는다. 아예 그쪽에 관심을 끈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한정운이 한 말이 낯설게 느껴진다.
이선준과 같이 투고하기로 했다. 혹시 누군가 등단한다면, 등단한 사람이 떨어진 사람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던 게 기억난다.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처럼 한 말이었다. 마지막에 싸웠던 것만 계속 기억하고 있어서 그 약속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새로운 이름을 얻은 다음에는, 당장 사는 게 바빠서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뭐, 안 된다고 해서 큰일 날 것도 없는데 한 번 해봐요.”
이선준은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하고 있을거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선준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집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고, 어딘가에 취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선준은 투고를 할거다. 딱히 약속이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이선준은 거기에 투고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걸까. 내가 등단한다면, 이선준이 등단한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도 되는걸까? 그 때의 약속을 들먹이면서 다시 만나는 걸 정당화해도 되는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나 이선준이 등단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둘 다 떨어진다면 우리는 서로 투고했다는 사실도 모를거다. 우리 둘 중 한명이 당선될 확률은 지극히 낮다. 이런 걸 확률로 얘기하는 것도 웃기지만.
“뭐, 해 볼 만한 것 같네.”
나는 피식 웃으며 한정운을 본다.
“고마워.”
나는 한정운에게 감사를 표한다. 위로해줘서 고맙다는 뜻도 있다. 하지만 이선준과의 약속을 떠올리게 해줘서 고맙다는 뜻도 있다.
아주 낮은 확률이다. 이건 능동적으로 만나겠다고 하는 게 아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다. 어쩌면 하는 마음이다. 그 좁디좁은 틈을 뚫을 수 있다면,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른다. 나는 모르는 누군가가, 내 운명이 이선준을 다시 만나도 된다고 허락하는 걸지도 모른다.
한정운을 위해서 나는 면회시간이 끝날 때까지 같이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대화에 목말라있던 건 한정운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진심으로 즐겁다고 생각했다.
“나 갈게.”
면회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나는 위병소 앞에서 한정운을 배웅한다. 한정운이 나를 보며 인사한다. 나는 한정운의 귀에 대고 말한다.
“누나라고 해야 너 군생활 안 꼬인다.”
“아, 알았어요.”
“편지 가끔 보낼게.”
“고마워요.”
한정운은 울지는 않지만 상당히 감동한 것 같다. 휴가 나와서 만나는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찾아오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한정운이 들어가고 나서도 나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나는 아직도 과거에 묶여있다. 벗어나서 다른 곳에 갔어도 여전하다. 내가 원하는 사람들은 전부 그곳에 두고 온 기분이다.
어쩐지 씁슬해지는 것 같지만, 그래도 홀가분하다.
그리고 새로 해야 할 게 생겼다. 소설이라, 다시 쓸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충분히 해볼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당장 집으로 가지는 않는다. 나는 고성의 남쪽, 속초 쪽으로 내려가 호텔을 하나 잡는다. 나는 과감하게 토요일 숙박비를 카드로 긁어버린다. 영수증을 챙겨 지갑에 챙겨놓는다.
나는 프리랜서라서 법인카드 못 받는다. 그래서 업무 관련 비용들은 영수증 하나하나 다 붙여서 월 단위로 청구해야 된다. 고성에 내가 흔쾌히 오기로 결정한 것도 이런저런 사회적 비용 절감을 고려한 선택이다.
이번 기사는 속초와 그 인근을 주제로 작성할 생각이다. 숙박비, 유류비, 식대 전부 청구할거다. 이건 내가 나쁜 게 아니라 당연한거다. 나는 업무차 속초에 온거고, 오늘의 면회는 업무 상 남는 시간을 내서 간거다. 이렇게 진행비 청구를 안 한다면 나는 우리나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숙소 잡느라 월급 반토막 날거다.
나는 더 이상 대학생이 아니라 사회인이다. 싸게 먹히는 방법이 있으면 써야 한다. 나는 호텔 방으로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운전을 오래 했더니 피곤하다. 오늘은 좀 쉬고 일은 내일 해야겠다.
소설을 다시 쓸 수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해 볼 생각이다. 나도 일 년 새 내 글이, 내 생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하다.
============================ 작품 후기 ============================
ㅎㅎ....
나는 세태와 야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젠더사회 폭력성을 부르짖던 나는 결국 마초이즘과 남성우월주의에 편승한 갑질물을 문피아에 연재하고 있다.
그리고.... 연재 2주만에 선작 9천을 넘기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씨발.... 나는 더러운 놈이야 인간관이고 문학관이고 개나주라고해 히히히히히
내게 돌을 던져라 다 피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