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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0화 (10/224)

00010 시궁창이라도 나만은 내 삶을 사랑해줘야지 =========================

“이제 그만 먹어.”

“아직 괜찮은데….”

“나도 좀 취한 것 같으니까, 라면 먹으면서 얘기나 하자.”

“어? 아 그럼 뭐….”

묘한 부분에서 설원은 자존심을 세울 때가 있었다. 술 같은 것에서 특히 그랬다. 설원은 취했으면서도 라면은 제대로 끓였다. 선준은 조마조마하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둘은 라면을 먹었다. 더 먹여봐야 좋을 것도 없었고, 선준은 무엇보다 별로 술을 많이 마시고 싶지 않았다.

“너 어떻게 할거냐?”

선준은 지나가듯 물어봤다. 결국 그도 설원을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껏 남자로 살다가 갑자기 여자가 된다니, 무슨 기분일이 선준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설원은 멍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어떻게 알아.”

“네 일인데 그럼 누가….”

“내 일이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야 돼?”

설원은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준은 해줄 말이 없었다. 조언을 해주고 싶어도 경험이 없고 지식이 없는 일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었다. 그냥 듣고, 함께 이야기해볼 뿐이었다.

“몰라, 나는 자살하기 싫어, 강간당하는 것도 싫고….”

설원은 TS발병자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이 곧 자신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떨었다. 물론 중고등학교가 아니라 사회나 마찬가지인 대학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설원이 느끼는 불안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발병 사실을 밝히면 불행해진다. 거의 기정사실에 가까웠다. 김연주 같은 사람들도 매 순간 상처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버릴거냐?”

선준이 물었다. 보호 프로그램을 선택하면 설원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터였다. 나라에서 지원도 해준다. 여러모로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남자인 채 그냥 살았어도 백수의 탈을 쓴 작가 지망생이나 하거나, 성격상 제대로 된 직장도 못 가지고 사십대에 음독자살이나 할 것 같은 인생이었다.

발병자 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집도 준다. 신분도 새로 준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다.

누굴 불러다 앉혀놔도 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가는걸 선택할 것이다. 의식주 전반에 대한 지원, 취업지원, 지속적인 케어 시스템까지 있었다.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놈들 누구야. 이렇게 좋은 나란데….’

설원은 약간 술이 깨는 것 같았다.

“나 인생 쓰레기처럼 살았어 그렇지?”

“누가 그래?”

“내가, 내가 그렇게 생각해.”

설원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학점은 개판이고, 소설 쓴다고 부모님 걱정하는거 다 뿌리치고 무작정 달려들었는데,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허세만 잔뜩 들어서 지금은 후배들한테도 소설 못 쓴다고 욕이나 먹고. 사학년씩이나 된 주제에 수업시간에 기분나쁘다고 도망치기나 하고,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는 한 번도 한 적 없고, 당장 먹고살라고 하면 아무것도 못 하는 병신 쓰레기인데다가 난데없이 여자나 되고 자빠졌고, 진짜 쓰레기다. 내 인생…. 아냐, 발병이든 뭐든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혹시 알아? 이게 나한테 기회일지? 기회일수도 있는거잖아. 전혀 다른 곳에서 응? 새 이름으로 돈 많은 남자 만나서 팔자 고치면…. 그런 거 존나게 싫지만 그렇게 되면 나도 사람답게 살 수 있겠지? 응?”

설원이 헛소리를 해도 이선준은 묵묵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시궁창인 인생은 아니었다. 단지 설원은 지금까지 인생을 바쳐 해왔던 것이 모두 무의미해져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불평할수도 없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꿈이 소설가였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소설을 쓰지는 않았다. 노력했지만 그것은 최대한의 노력이 아니었다.

매달렸지만 절박하지 않았다. 꿈꿨지만 간절하지 않았다. 누구나 그렇듯, 꿈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설원은 붉어진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적당히 노력한 게 그렇게 죄야? 매일 술 먹고 다닌 게 그렇게 죄야? 잔뜩 기합만 들어가서 멋있는 척 좀 하려고 했던 게 죄야?”

“죄겠냐?”

“응, 죄 아니야. 그래. 죄는 아니야. 그래도 긍정적이지는 않잖아. 내 미래, 내 장래, 내 문학, 다 불투명해.”

“그 얘기를 왜 하는데? 지금 얘기하는건 발병자 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갈지 말지에 대해서 아니냐?”

이선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설원의 이야기는 지금 논점을 벗어나 있었다.

“들어봐…. 들어보라구….”

설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었다. 사내자식이 운다고 소리쳤을 이선준이었지만, 지금 모습은 한없이 가녀리고 나약해 보였다. 이런 모습이라서 어쩌면 설원의 약한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쓰레기같아도, 아무리 미래가 불투명하고 희박해도, 아무리 열심히 노력도 안 하고, 게으르고, 술 처먹고 담배 피우고, 부모님한테 손 벌리고 살아온 그런 파렴치하고 머저리 같은 인생이었지만….”

설원은 고개를 들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뚝,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설원은 절망적이라는 듯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래도 그게 나잖아. 그게 나잖아. 그래도 내 인생이잖아. 아무리 쓰레기같이 살았어도 말이야. 버리라고 하니까 슬프다? 진짜 서럽고 슬퍼. 이까짓 인생 누구한테 주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버릴 수 있다고 매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까 못 하겠어.”

설원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선준은 설원의 이야기가 논점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설원은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무도 내 인생에 대해서 칭찬하지 않아도, 나만큼은 내 거지같고 병신 같은 내 인생 사랑해줘도 되잖아. 아껴줘도 되잖아. 소중하다고 생각해도 되잖아. 버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인생인데, 버리기 싫어. 흑역사가 손가락으로 못 셀 만큼 많아도, 내 소설 좋다고 하는 사람 세상에 아무도 없어도 좋아. 그래도 이십사년 살면서 쌓아온 게 있는데, 쉽게 버릴 수 있을리가 없잖아.”

그 모습은 마치 다가올 미래가 두려운 어린 양 같은 모습이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그 모습을 보며 이선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에도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바이러스 발작을 일으킨 뒤로 설원은 더욱 불안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선준은 그 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원은 지금 결심한 것이었다.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뭔가를 선택했다. 그것은 어떠한 과정이었다.

이선준은 문득 그 유명한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과 너무나도 흡사했지만, 너무나도 달랐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설원은 TS바이러스 발작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몸은 다시 태어났지만 정신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알은 지금껏 유지해왔던 삶이었다. 남성성, 관계, 기반이 그대로 남아있는 공간이었다.

설원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헤세의 말대로라면 설원은 자신이 있는 세계를 파괴하고, 다른 세계로 날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곳은 아브락사스의 품은 아닐 것이다.

설원은 숨을 고르는 듯 함숨을 푹 쉬며 눈가를 슥슥 닦았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자위가 보였지만, 그래도 귀엽고 예쁜 모습이었다.

“안 할래. 나는 나로 살고 싶어.”

그 말을 마치고 설원은 웃었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그것을 깨야만 새는 다른 세계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설원은 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좁고, 편협하며, 나약한 세계였지만 설원은 그것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자신만큼은 그걸 사랑해야 한다고.

이선준의 입장에서 그것은 파괴되어야만 하는 세계였다. 버리고 다른 세계로 날아가야만 설원은 행복의 편린을 잡을 수 있었다.

설원은 알 바깥이 아니라 알 자체를 선택했다. 바깥이 세계인 것처럼, 버려져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알 또한 세계였다.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알 또한 작지만 하나의 세계로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알을 깨기를 거부한 새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부화하지 않는 알은 언젠가 안에서부터 썩어버린다. 이선준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혀 무의미한 비유였지만 이선준은 불안감을 느꼈다.

“여자든, 남자든 나는 나야.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거야. 내가 살아왔던 흔적, 버리기 싫다는 얘기야. 나 소설 진짜 못 쓴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을 하며 설원은 다시 웃었다. 정말 매력적인 미소였다. 설원은 자신이 그렇게 웃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소설 쓰지 않는 나는 전혀 상상이 안 되니까.”

“그래, 너답다.”

이선준은 피식 웃으며 치워놨던 술잔을 다시 가져와 한 잔 마셨다.

“나답다는 말, 지금 들으니까 기분 이상한데.”

“왜?”

“아니, 좋다는 뜻이야. 나도 한 잔 줘, 술 좀 깬 거 같은데.”

둘은 술을 조금 더 마셨다. 몇 잔 마시자마자 설원은 헤롱거리더니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선준은 그 모습을 보며 술상을 치웠다. 이선준은 눕자마자 잠들어버린 설원의 얼굴을 쳐다봤다.

답지않게 작고 귀여운 여자를 좋아하는 그에게 그야말로 취향저격이라고 할 수 있는 외모였다.

‘얘는 설원이다….’

이선준은 그렇게 수없이 외워대며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도저히 잠이 올 기분이 아니었다. TS바이러스는 본인에게도 민폐였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꽤 민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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