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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설원입니다-109화 (109/224)

00109 설원이 아니에요. =========================

초행이라 힘들 줄 알았는데, 네비게이션 찍고 가니까 그리 힘든 길이 아니다. 온 김에 사진도 좀 찍어두려고 장비도 챙겼다. 운전이야 뭐 평범하게 한다. 교통법규 잘 지키면서 하면 되는거다.

여자 운전자라고 시비도 몇 번 걸린 적 있다. 창문을 두드리는 놈들에게는 전기죽창을 한 번 보여주면 도망가기 바쁘다. 담도 없는 새끼들이 왜 까부는지, 볼 때마다 한심하다.

솔직히 내가 운전을 못 하는 게 아니다. 운전 더럽게 하는 놈들이 꼭 남들한테 시비를 건다.

결국 나는 면회를 가기로 결정했다. 결국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에 져버렸다. 군대에 있는 놈 부탁 정도는 들어줘야 한다. 불쌍해서 도저히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아, 너무 멀잖아 이거.”

서울에서 고속도로 타고 쭉 오는데 고성에 도착하는 것까지만 해도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여기서 한정운이 있는 부대까지 또 시간이 엄청 걸릴 게 뻔하다. 다행히 GOP나 GP같은 곳은 아니다.

아직 시간은 오전이다. 면회 온다고 하면 기상 시간 전에 눈 떠지는 게 군인이다. 엄청 기다릴 걸 생각해서 새벽같이 일어나 출발했다. 목 뻐근하고 아린다.

배배 꼬인 국도 달리니까 짜증까지 솟구친다.

생각해보니 그랬지, 전역하면서 강원도 쪽으로는 오줌도 안 싸겠다고.

실제로 강원도 갈 일이 어디있어? 전역한 이후에 강원도 오는 건 처음이다. 딱히 기피했던 건 아니지만 사진 찍는 것도 전부 전라, 경상, 충청 쪽으로 갔지 강원도는 처음이다.

음, 정말 산이 많다. 군부대 지역은, 특히 육군은 거의 다 산속에 있다. 강원도면 말 다한거다. 날씨도 좀 더워서 에어컨을 튼다.

“흐음. 그래도 좋네.”

차를 달리는 건 꽤 기분좋은 일이다. 일단 운전할 때에는 잡생각이 별로 없어진다. 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사라진다. 자꾸 고민하면서 상황을 안 좋게 이해하려고 드는 습관이다. 운전을 하면 그런 생각은 잘 안 든다. 너무 오래 하면 그거대로 피곤해서 짜증나지만.

-탁!

“으으아아아아아아!”

차 문을 닫고 나오며 기지개를 켠다. 시간은 열 시. 생각보다 그리 외진 곳에 있지는 않다. 전방부대에 예산이 많이 들어갔다고 하더니, 부대 시설도 꽤 괜찮아 보인다. 으 태양광. 피부에 안 좋은 직사광선이 얼굴에 쏟아진다. 강원도는 태양부터가 다르다. 선크림 바르길 잘했다.

나는 재색 민소매 원피스에 흰색 롱카디건, 크림색 웨지힐을 신고 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좀 신경써서 입었다. 화장도 좀 했다. 간단한 색조화장 정도지만 이 만큼만 해도 충분하다.

물론 운전할 때에는 운전용 슬리퍼가 따로 있다.

이제 여성복 아무렇지도 않게 입는다. 그나마 내 인생의 낙이 마음에 드는 옷 사서 입어보고 거울 앞에 서는거다.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거울 보면 기분이 좋다. 물론 그걸 보여줄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해봐도 역시 잘 어울린다고 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건 좀 슬프다.

뭐, 옷장도 넉넉하겠다. 돈도 좀 벌겠다. 명품은 아니더라도 예쁜 옷을 입는 건 좋다. 라인 좋겠다. 피부도 희고 잡티 하나 없겠다. 솔직히 축복받은 몸이다.

내 몸 중에서 다리가 제일 마음에 든다. 희고 매끄러운 다리는 스타킹을 안 신어도 균일한 빛깔을 띠고 있다. 이런 다리 갖고 있는 사람,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무엇보다 이기적인 건 나는 따로 관리를 안 받는데도 이 모양이라는거지.

예전처럼 청바지에 후드티만 입으면서 내 매력적인 모습을 일부러 감추려고 하지는 않는다. 괜찮아, 나에게는 영원한 친구, 피카츄가 항상 함께하니까. 불의의 습격에는 백만볼트가 최고다.

나는 주차장을 나와 위병소로 향한다. 오, 여기 정문 크다. 꾀죄죄한 독립중대 이런 게 아니라 다행이네, 좁은 곳에서 군생활 하면 마음까지 좁아지고 답답해지는 법이다.

입구에서 근무 중인 병사들이 내게 시선을 빼앗긴다. 뭐, 굳이 내가 엄청 예쁘지 않아도 쳐다봤을거다. 나는 위병소의 문을 두드려 담당자를 부른다. 작은 창문 너머에서 척 봐도 당황한 위병사관이 나온다.

“면회십니까?”

“네, XX대대 X중대 X소대 한정운 일병이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위병사관이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나는 위병소에서 조금 떨어져 선다.

“곧 나온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 네.”

“면회실에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아, 저야 좋죠.”

나는 위병사관의 안내를 받아 면회실로 갔다. 뭐야 여기, 부대는 큼지막하면서 면회실은 왜 이래?

“마실 거 필요하십니까?”

“아뇨,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내 친절한 거절에 위병사관은 바보처럼 웃으며 돌아간다. 흐음, 마지막 예비군 훈련 이후로 군대랑은 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오니까 어쩐지 웃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부대 쪽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어, 어…….”

한정운이다. 머리가 짧아졌고, 얼굴이 좀 탔다. 한정운은 내 달라진 모습을 보고는 저도 놀랐는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걸어가 한정운을 와락 끌어안았다. 한정운에게 닿는 건 처음이다. 이 자식 몸 단단하네.

“어이구 내새끼, 잘 지냈어?”

“엇…….”

활짝 웃으며 말하자 한정운의 표정이 볼만하다. 옆에는 견장을 찬 병사가 함께 있었다. 한정운의 계급은 이등병이다. 부대 온지 얼마 안 됐으니 분대장이 인솔해서 데려온 모양이다.

“아, 안녕하세요.”

“아, 네. 아, 안녕하십니까.”

분대장은 조금 당황했는지 얼어서 대답한다. 하긴, 네 군생활은 자시고 살면서 이런 예쁜 여자 본 적이나 있겠냐. 나는 웃으며 말한다.

“얘 좀 잘 부탁해요. 애가 무뚝뚝해도 착한 애거든요.”

“아, 네. 하, 한정운 이병은 잘 하고 있습니다.”

“여기 면회 외출 이런 거 없어요?”

“아, 저희 부대는 영내 면회만 허용됩니다.”

분대장은 긴장한 탓인지 나에게 군대식으로 말한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분대장은 이제 인솔 끝났으니 가도 되는데 멍하니 날 쳐다보고만 있다.

“면회공간은 이게 다에요? 뭐 다른 데 없나? 식당이나 뭐….”

“아, 회관 있습니다.”

분대장을 따라 영외로 나가자 면회자용 식당 같은 건물이 있었다. 식당에 도착해서 또 멍청해져 있는 분대장을 보며 나는 슬슬 스트레스가 올라온다. 왜 자꾸 밍기적대? 빨리 좀 꺼지지.

“면회 몇 시까지에요?”

“십칠시 까지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가보세요.”

“아, 네……. 야, 올 때 위병소에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분대장이 가고, 한정운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귀신이라도 봤냐? 표정이 썩는다 너?”

“아, 네……. 많이 바뀌셨네요.”

한정운이 이렇게 당황하다니, 그렇게나 놀랄 일인가? 이렇게 멍청해져 있으니 나는 짓궃어진다.

“설마 섰냐?”

“예, 예전보다 상태가 더 안좋으시네요.”

“여고생처럼 생겼어도 마음만큼은 불꽃아재라구. 나는 지금 완전체야.”

“자랑입니까?”

자식, 이등병 아니랄까봐 다나까 쓰는 거 봐. 나는 얼이 빠져 있는 한정운을 보며 말한다. 솔직히 피곤해서 좀 쉬고 싶다.

“응, 그러는 너는 군인이 다 되셨습니까? 됐고, 밥이나 먹자. 나 아침 안 먹고 와서 배고파.”

식당에는 면회 중인 다른 가족들이 이미 얘기 중이었다. 젊은 여자도 있고, 가족들도 있다. 나는 들고 있던 걸 번쩍 들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내가 한 거지만 꽤 대단한 소리가 난다. 한정운은 그걸 보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 자식, 오랜만에 보니까 사람이 좀 달라졌네.

“이게 뭐에요?”

“답정너냐? 도시락이잖아.”

“설마 싼거에요?”

“그럼 사왔겠냐?”

나는 도시락통을 분리해 늘어놓았다. 제육볶음, 돈까스, 김밥, 새우튀김 등 있을만한 건 다 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해 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텐션이 좀 올랐다. 평소에 해먹고 싶었는데 귀찮아서 못 했던 것들을 어제 하루동안 계속 만들었다. 혼자 산지 오래라 요리는 이제 잘 한다. 예전에는 꽤 하던 정도였다면 이제는 순수하게 잘한다. 나는 한정운을 보며 웃는다.

“다 먹기 전까지 복귀 안 시킨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네요. 펌이랑 염색도 하셨고.”

한정운과 나는 자리에 앉는다. 머리도 짧고, 얼떨떨한 표정이 영락없는 이등병이다. 학교 다닐 때엔느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어 보였던 녀석이다. 군대 가니까 역시 군인이 됐다. 얼빠진 이등병, 그게 한정운의 모습이다.

나는 웨이브펌을 했다. 검은색이었던 머리는 연갈색으로 염색도 했다. 긴 생머리도 좋지만 이것저것 해 보고 싶었다. 펌이든 염색이든 진짜 무지막지하게 비싸더라. 웨이브 때문에 원래 풍성한 머리칼에 볼륨감이 생겼다. 이건 이거대로 예쁘다. 예전에 딱히 표독스러운 인상이었던 건 아니지만 무표정하게 있으면 차분한 머리칼 때문에 좀 차가워 보이는 면도 없잖게 있었다. 내 인상은 전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따뜻해 보인다. 상냥하고 착해 보이는 느낌이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 보인다는 장점도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성격은 아니지만.

너무 어려보이면 그거 나름대로 좋을 게 없다. 물론 관리하기는 좀 짜증난다.

“너 이제 군생활 조진 거 알지?”

“네? 뭐가요?”

“너한테 나같이 예쁜 여자친구 있다는 거 알려졌으니까. 너 군생활 존나 꼬였어 이제.”

그제야 한정운은 아차하는 표정이 된다. 그런 생각도 없이 날 불렀단 말이야? 이 자식 군생활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은데?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인데, 한정운의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다. 먹으면서도 입으로 넣는지 코로 넣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야, 누나라고 하면 되잖아 등신아. 뭘 그렇게 걱정해?”

“아, 아…….”

그래서 만났을 때 일부러 내 새끼니 뭐니 그런 소릴 했던건데. 나는 한정운이 먹는 걸 보며 나도 몇 개 집어먹는다. 조금 식기는 했지만 맛있다. 아, 설거지 안 하고 나온 걸 생각하니 끔찍하다. 기름에 접시에 도마에 진짜 집에 가기 싫어질 정도다.

그래도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좋다.

“오랜만이네.”

“아, 그러네요….”

“많이 힘들었지?”

“아, 뭐…. 상당히요. 몸보다 정신적으로요.”

애초에 운동을 계속 했으니 몸이 힘들 건 없었을거다. 다만 군대식 사고와 군대식 생활방식, 군대식 가치관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거다. 한정운은 가끔씩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기계인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논리적인 녀석이니까 더욱 그렇다.

“전우조로 다니면 자살을 예방할 수 있다는 논리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오래 걸렸어요.”

“이해하려고 하지 마, 음, 여긴 이런 병신 같은 규칙이 있군. 이러고 말면 돼.”

“그걸 제가 지켜야 한다는 게 크나큰 문제죠.”

한정운은 잘 먹는다. 이게 엄마의 기분인가? 자식이 밥을 먹는 걸 보면 내가 절로 배가 불러진다는 그 기분 말이다.

“그러게 내가 가지 말랬잖아. 왜 사서 고생을 해?”

“후, 일단 왔으니까 어쩔 수 없죠. 누나는요, 잘 지내셨어요?”

“이제 선배라고 안 하네?”

“선배가 아니잖아요.”

음, 어쩐지 좋은 울림이다. 누나라니. 가슴이 막 콩닥콩닥 뛰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설훈에게도 누나라는 말 들을 수 있지만 안 본 지 일 년이 넘었다. 나는 괜히 어색하게 웃는다.

“뭐, 일 같지 않은 일 하면서 지내. 집도 있고, 차도 있어.”

“스물다섯 주제에 대단하신데요.”

그래봐야 집은 내 거 아니고, 차도 80퍼센트 정도는 회사거다. 할부금 엄청 남았다고! 나는 내 새로운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한다.

“나 사회 나이 스물아홉이거든?”

“국정원의 정보장악력은 항상 이상한 데에 쓰이는 것 같은데요. 국가에 대한 불신이 점점 커지는데.”

“뭐 어때, 나만 잘 살면 되는거지. 나는 국가기관의 신봉자야 이제. 군대 빼고.”

한정운은 내 말에 피식 웃는다.

“이선준 선배가 들으면 좋아하겠….”

“그 이름 꺼내지 말지?”

나는 그 말에 인상을 팍 쓴다. 반쯤은 아나키스트인 이선준이 지금 나를 보면 경악하긴 할거다. 뭐, 예전과 같은 가치관을 지닌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서. 나는 한숨을 푹 쉬며 한정운을 째려본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막 쿡쿡 찔리는 기분이거든?”

“질투 날 정도로 좋아하시네요. 아직도 그래요?”

“집착했던거지 좋아했던 건 아냐.”

“술 먹고 운전 했는데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말, 들어봤죠?”

“응, 나 아직도 아이러니가 내 삶의 신조야. 좋아했다고 인정하면 기분 더 엿 같으니까 부정하는 거거든? 그만 물어봐주지 않겠니?”

내가 비아냥거리며 말하자 한정운은 웃는다.

============================ 작품 후기 ============================

연재 재개는 아니고, 그냥 비축분 하나 올려봄 ㅎㅎ

레오네 봤는데 재미있더라 소름돋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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