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8 설원이 아니에요. =========================
진짜 미친놈인 것 같다. 한정운은 내게 해외 영주권자라서 군대에 안 간다고 했지만 사실 거짓말이었다. TS바이러스 발병자라서 특이 케이스로 면제가 된 것이었다. 안 가도 되는 주제에 한국 남자들을 지배하는 거지 같은 군대감성을 알기 위해서는 들어가보는 수밖에 없다며 자원입대를 감행했다.
나는 당연히 미친 짓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뭐 대작가가 되기 위해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느니 뭐니 하는데 내가 말릴 재간이야 없었다. 의지도 이 정도면 대단하다.
[저는 지금 산 좋고 물 맑고 사람 더러운 고성입니다.]
메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저는 살면서 후회할 행동은 별로 안 했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이건…. 후회가 좀 되네요. 솔직히 좆같아요. 반성도 좀 했어요. 제가 그 동안 무시하고, 솔직히 멍청이 취급했던 선배들도 다 이런 걸 겪었다고 생각하니 존경스러워요.]
한정운이 욕까지 하다니, 진짜 드문 일이다. 열받긴 열받는 모양이다. 하긴, 이성과 논리의 세계에서 전체주의 집단으로 편입되었으니 적응 안 되는 건 당연할거다.
[아직은 소위 ‘짬’이 안 돼서, 시간도 별로 없지만, 틈 날 때마다 떠오르는 것들을 쓰고.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보고 있어요. 세상에 있는 모든 부조리는 여기서 극대화되는 것 같아요.]
그러게 금수저 물고 태어났으면 제 물에서 놀 것이지 왜 사서 고생이니 이녀석아. 메일의 상당부분이 군대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적혀 있다. 그런데 짬도 안 되는 놈이 이거 싸지방에서 쓰다가 선임한테 걸리면 어떡하려고 이런대? 메일의 결론은 이렇다.
[면회 와주세요.]
그리고 주소가 적혀있다. 흐음, 이 자식 이거. 강철같던 놈이 군대 가니까 멘탈이 흔들리는 모양이다. 항상 나한테는 부탁이나 그런 식으로만 말하더니, 이렇게 강하게 희망을 표현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나는 노트북을 닫고 거실 소파에 앉는다. 완연한 밤이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말했듯 한정운만 만나는 건 내게 더 큰 죄책감과 자괴감을 준다. 이건 공정하지 못하다. 모두 버리기로 했으니까 한정운도 만나면 안 된다. 나는 나 스스로 그런 원칙을 정했다.
하지만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군대에서 고생하고 있을 걸 생각하니 왈칵 걱정이 된다. 녀석은 여자에서 남자가 된 TS바이러스 발병자다. 못 볼 꼴도 많이 보고 있을 걸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하다. 한정운에게는 어떤 동병상련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 나도 메일로 이런저런 부분에 대해서 상담 같은 걸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누군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상대가 없다. 무슨 생각을 하건 속에서 끓다가 식어버린다. 업무상 관계자들은 애초에 사적으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그들이 단순히 나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만나는 사람이 누구던 간에 일단 허물 수 없는 어떤 벽이 있다. 어떤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회피해버린다. 머리아픈 대화를 모두 싫어한다.
과거에는 누구든, 친하지 않은 사람도 전부 의견이 갈리는 주제에 대해서 깊게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거대한 구조 안에 속해있다. 예전에는 변두리에 서서 가운데를 비난해왔다면, 지금은 그 가운데의 언저리에 서있다.
월급 받고, 생활을 스스로 이어나가는 사람들 안에 있다. 애초에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에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어렵다.
이따금 고독하고, 이따금 외롭다. 술로 밤을 보내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생각이 든다. 이선준이나 박헌영을 다시 만나고 싶다. 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나는 좀 나아졌으니까 만나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건 이기적인 생각이다. 멋대로 떠나놓고 멋대로 다시 만나려 하는건 잘못이다. 나는 공정하지 못했다. 나만의 판단으로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걸 내 멋대로 또 뒤집으며 다시 만나러 갈 수는 없는거다.
가끔씩, 너무 외로워서 뭔가 사무치는 밤이 있다.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침대에서 뒹굴며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짓을 내가 진짜로 할리가 없잖아.
자위를 몇 번 해보기도 했다. 젤 같은 걸 사서 막…. 해봤는데.
뭐랄까, 아주 중요한 게 빠진 헛헛한 느낌이 든다.
외로워서 미칠 것 같은 밤에 가끔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고 그걸 멍하니 쳐다본다. 박헌영의 번호, 이선준의 번호 다 알고 있다. 번호가 바뀌어 있지 않았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음, 선생님은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다. 나의 자기기만이 내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정정한다. 외로워서 미칠 것 같은 밤이 아니다.
그리워서 미칠 것 같다.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라, 나를 아는 사람과, 나와 친한 사람과 그냥 앉아서 뻥튀기를 먹어도 되니까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고독하다. 나는 누구와도 새로운 깊은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고, 만들지 않았다. 관계는 상처로 남으니까.
그래서 외롭다.
“하아…….”
창밖에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다. 이따금 사무친다. 비명을 지르고,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싶은 밤이 있다. 그런 날에 나는 전화번호를 눌러놓고 하염없이 쳐다본다. 나는 지금도 어두운 방 안에 쪼그려 앉아서 그러고 있다.
터치 한 번이면 다시 연결할 수 있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일 년 동안, 나는 이따금 이랬다.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되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잊지는 못했다. 그리움을 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누르지 못한 채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운다.
나는 아직 병들어 있다. 어떤 지점은 더욱 병들어 버렸다.
“흑…. 으흑….. 심심해…….”
나는 여전히 솔직하지 못해서, 심심해서 운다고 나 자신을 기만한다.
문득 생각한다.
목소리만이라도 좋으니까, 듣고싶다. ‘여보세요’라는 아주 짧은 말만 들어도 되니까 전화를 걸고 싶다. 공중전화로 전화해서 잠깐 목소리만 듣고 끊어버리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면 이선준도 그냥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밤만 되면 그런 생각을 수십번도 더 한다. 하지만 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창밖을 본다. 먼 오피스텔 아래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공중전화다. 잠깐만이다. 정말 잠깐이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받을거다. 우리는 만나는 게 아니니까, 재회하는 게 아니라 잠깐 목소리를 듣는 거니까.
스쳐지나가듯 목소리만 듣는 정도는 괜찮을거다. 나는 수십 수백번의 고민 끝에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려고 한다. 나는 옷을 입고, 동전과 스턴건을 챙긴다. 나는 다시 나를 기만한다.
목소리만 듣는 거니까 괜찮을거야.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에 탄다. 눈가를 훔치고 괜히 목소리를 내본다.
“아, 아, 아아….”
전화하고 목소리만 듣고 끊을 거면서,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무의미한 행동이다. 일층에 도착하고, 나는 건물 밖으로 나온다. 가로등 불빛 아래 공중전화 부스는 처연하다. 이제 아무도 찾지 않은 공중전화는 항상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그 자리에 있다.
공중전화를 찾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일 거다. 그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려 찾는 것일 터다.
나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서도 한참을 망설인다.
이래도 되는걸까. 나는 또 하나의 나쁜 행동을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내게 너무 큰 수화기를 든다.
[주화, 또는 카드를 넣어주세요.]
나는 백원으로, 그리움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아주 잠깐 마약에 취한 것처럼, 잠깐 술을 마셔서 고통을 잊는 것처럼 그리움을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술에 취한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다시 그걸 찾을거다. 마음을 마취시키기 위해서 계속 잘못된 행동을 할거다. 이게 시작일 뿐이다. 나는 이따금 사무치는 밤에 계속해서 전화를 걸지도 모른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
나는 결국 백 원짜리 동전을 넣는다.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릴 정도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다.
[뚜…….]
나는 전화번호를 누른다. 전화번호는 내 머리에 인이 박힌 것처럼 남아있다. 몇 번이고 눌러본 전화번호다. 그 이후, 수백번을 눌렀으면서 한 번도 걸지 않았던 전화번호다. 전화번호를 누를 때마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뛴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전화번호를 전부 누른 후 잠시동안의 정적을 견디기 힘들다. 신호음이 울리면, 나는 나도 모르게 전화를 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나는 연결음 대신 그런 알림음을 듣는다. 나는 수화기를 쥔 채 입술을 깨문다. 전화를 지금껏 걸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였다.
“아, 아…. 윽….”
나는 숨죽인 채 터져나오는 울음소리를 참는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무슨 이유에서건, 전화번호는 바뀔 수 있다. 다시 전화를 거는 게 나쁜 짓이라서 전화를 걸지 않은 것도 있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이거였다. 내가 제일 두려워 한 건 이거였다.
전화번호를 눌러놓고 지켜보는 순간만큼은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먼 곳에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비슷한 것이 있었다. 하지만 전화번호가 바뀐 순간부터, 나는 그 뒷모습을 잃어버린다.
완벽한 단절이다. 내가 닿지 않는 곳, 내가 볼 수 없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만날 수 없다는걸 확인하게 된다.
다시 만나려고 한 게 아니다. 다시 보고 싶다고 한 게 아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절망한다. 가능성의 소실은 내게 큰 절망이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고민할 수 없다. 전화를 걸까 말까를 고민하며 자괴감을 느낄 수 없다. 알고 있다. 전화번호를 보고 괴로워하면서도,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외로워 하면서도
그 시간만큼은 그나마 행복했다.
“흐흑…. 흐…. 으으으….”
나는 억눌린 울음을 흘린다. 언제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서도 행복했다.
하지만 알아버린 이상 전화번호를 누른 채 가만히 쳐다보는 바보짓은 이제 못 한다. 나는 그런 멍청한 짓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사실이 슬퍼서 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는 수화기를 들고 바보처럼 운다.
나는 꽤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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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기 끝 그럼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