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107화 (107/224)

00107 설원이 아니에요. =========================

“밥 한 번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잖아요. 맨날 뭐가 그렇게 바쁘세요?”

“안 바빠요.”

내 말에 상대의 얼굴이 약간 화색이 돈다.

“아, 이 앞에 분위기 좋은 데 있는데….”

“아뇨, 아뇨 뭔가 착각하시는게 있는데, 바빠서 밥을 안 먹는게 아니라. 같이 밥 먹기 싫다구요. 좀 비켜주실래요?”

“아, 아…. 네….”

나는 그 사람을 피해 엘리베이터에 탄다. 이래서 미팅 같은 건 오기 싫다. 그냥 원고만 주면 되는건데 올 때마다 이런 인간들이 있다. 지긋지긋하다. 오히려 회사 쪽에서 일부러 미팅을 잡는 것 같은 생각도 좀 든다. 매번 회의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기획 회의 같은 걸 왜 나랑 하는데?

“거 봐 임마, 안 된다고 했잖아. 연작가님 이제 근 일 년 됐는데 사적으로 밥은커녕 커피 마셔본 사람도 없다니까?”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에 탄 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얇은 쥐색 블레이저 자켓에 상아빛 블라우스, 동색 치마를 입고 있다. 쳇, 너무 꾸미고 왔나. 아닌데, 그냥 평범하게 온건데. 뭐든 잘 어울리는 걸 어쩌라는거야? 누더기라도 입고 와야 안 껄떡대나?

눈 먼 돈 받아먹는 거만 아니었으면 당장 때려쳤을거다.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뺀다. 15년식 소울이다. 할부가 아직 30개월 남았다. 그러고 보니 할부금 때문에라도 때려칠 수가 없다. 젠장할, 신분증 변동은 됐는데 면허 변동이 안 돼서 면허를 새로 따는 데 걸린 시간을 생각해보면 국정원 아저씨도 일 잘 하는 건 아니다. ……그보단 내가 그동안 부탁한 게 미안해서 면허 발급 해달라고 안 한 거였지만.

하긴, 나 따위 문장력으로 글 써서 밥 먹고 산다는 게 용하지. 심지어 대학교 중퇴 학력으로 말이야. 나는 시동을 걸고 목에 건 출입증을 벗어던진다. ‘설연’ 내 가짜 이름이다. 성씨야 그대로 가지고 있는 편이 좋아서 이름만 바꿨다. 솔직히 원이나 연이나 그게 그거다.

애초에 날 알아볼 사람은 이름 때문에 알아보는건 아니니까.

나는 이제 설원이 아니다.

차 타고 서울 오기 정말 싫다. 그런데 지하철은 더 싫다. 울며 겨자먹기로 차 타고 오는거다.

내 집은 태원과 서울의 경계지점에 있다. 집세 공짜, 관리비 공짜. 애초에 출장 공무원들의 임시 숙소나 관사로 쓰이는 오피스텔이다. 무상불하 이런 건 아니고, 그냥 장기임대 같은 거라서 내가 돈 받고 팔거나 할 수는 없다.

-삑

차를 세워놓고 나온다. 오피스텔의 지하 주차장은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음산하다. 나는 주머니 속의 스턴 건을 일부러 꺼내 쥔다. 나의 친구 피카츄, 아주 좋은 물건이다. 완전체급 흉기다. 버튼을 누르면 생각보다 엄청 큰 소리가 난다. 어지간한 놈들은 그냥 스파크 소리만 들려줘도 기겁하고 도망간다.

실제로 몇 번 사용해본 이후로 집에 라이츄 모양으로 하나 더 사놨다. 효과 진짜 죽여준다. 이 사회에 딱히 힘이란 건 필요없다. 이거 하나면 누가 와도 한방이다. 현실 속의 죽창이지.

“아, 피곤해…….”

집에 들어와서 옷을 벗어놓고 대충 샤워를 한다. 거실로 나오며 맥주를 한 캔 마신다. 뭘 받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더 좋은 집을 받아서 만족스럽다.

해가 있을 때 사무실에서 나온 것 같은데, 바깥은 어느 새 밤이다.

1년 지났다.

꽤 괜찮게 살고 있다.

잡지사에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상당히 우파적 시선에서 만들어지는 그런 잡지들 있잖아. 세상은 아름다워,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이런 식으로 지껄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잡지다.

물론 나는 정치관련 글 같은 건 안 쓴다. 나는 그냥 사진 하나 찍고, 음, 풍경이 참 아름답구나. 하는 식으로 대충 지껄인다. 그러면 그게 몇 번의 퇴고를 거쳐 실린다. 그게 내 일의 알파면서 동시에 오메가다. 솔직히 이거 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 아냐? 그래놓고 돈도 꽤 받는다.

게다가 나는 프리랜서 자격이기에 그 회사에 소속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낙하산이라서 짤리지도 않는다. 미친 철밥통이다. 공무원은 아닌데 이상하게 공무원 같은 상태다. 말하자면 나는 정부 자금을 받아 운영하는 잡지사와 프리랜서 계약을 맺었고, 거기서 돈을 받는다. 그러니까 나는 회사 직원은 아니니까 그 쪽 상사들 명령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요구하는 대로 해 줘야 하는 건 맞는데, 자율성을 보장받는다는 뜻이다. 나는 내 일 하고, 원고 보내면 된다.

자금 융통 같은 건 모르지만 보면 이 잡지사 자체가 정부의 돈세탁에 관여하고 있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이 잡지사는 정부기관이 아니다. 회사 자체는 사기업이고, 정부랑 계약 맺고 잡지를 위탁생산하고 있다. 흔한 말로 외주 준다고 하잖아? 그거다.

잡지사 직원들도 공무원들이 아니다. 모든 신입 직원들은 전부 내부 추천으로만 뽑는다. 결국 이건 정부 옆구리에 빨대 꽂아놓고 돈이 질질 새게 만드는 페이퍼 컴퍼니 같은거다. 잡지를 만드는 건 특이사항 정도로 치부하면 된다.

이건 다 추측이지만, 대충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정권 바뀌면 이 회사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1번 찍어야 한다. 쳇, 사람은 역시 간사해. 하지만 정치라는 건 원래 내 처지에 입각해서 지지하는거잖아? 계속 비리를 저질러줘!

가끔 빨판상어가 된 기분이 든다.

이만한 직장은 어딜 가도 없겠지.

철마다 여행지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고, 감성 좀 팔고, 돈 받고, 완벽해. 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분야에는 꽤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소설가는 못 되었지만, 작가는 됐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찍어놓은 사진들을 정리한다. 취미도 없었던 사진이 이제 꽤 늘었다. 물론 DSLR이나 렌즈는 회사에서 장비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가져왔다. 장비 담당자 좀 구워삶아서 파손처리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새 제품 도착한 다음에 헌 거랑 바꿔치기, 그래서 새 DSLR은 내 꺼. 원래 세상이 이래. 군대에서도 핸드드릴 같은 거 결손처리 한 다음에 간부들이 삥땅치잖아?

세상은 생각보다 구멍이 많다. 그리고 나는 엄청은 아니지만 꽤 비열하게 잘 산다.

무엇보다 사람이랑 부대낄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다행이다. 내가 회사 직원들이 껄떡댈 때마다 꺼지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도 내가 그들과 안 엮여도 별 상관 없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동안 많이 바뀌었다.

싫은 소리도 예전보다 부드럽지만 더 명확하게 할 줄 알게 됐다. 귀찮게 집적거리는 놈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스턴건을 보여준다. 실제로 사람을 지져버리기도 한다.

나는 꽤 섬뜩하고, 꽤 냉혹하고, 꽤 철저한 사람이 됐다.

가짜 나이 스물아홉, 실제 나이 스물다섯. 그게 나다.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한다.

[집애좀와라보고십어] – 엄마(핸드폰 문자)

[정기상담 이외에도 언제든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 유정희선생님(카카오톡)

가족들과는 인연을 끊지 않았다. 내 행적에 대해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다음이었다. 실제로 이선준과 박헌영이 차례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다행히 엄마가 혼신의 연기를 펼쳐서 내가 완벽하게 잠수탄 걸로 했다.

설훈은 군대에 있다.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휴가를 나와도 일 핑계로 가지 않았다. 솔직히 이제는 그냥 좀 짜증만 날 뿐이다. 하지만 별로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안 만난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이후 상담을 주기적으로 받고 있다. 내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 똑바로 마주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좋아지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내 마음에 대해서 토로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누군가를 만나야만 내 변화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예전만큼 심하게 자괴감이나 자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지는 않는다.

박헌영과 이선준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둘 다 졸업도 했을 테니까.

노트북 앞에 앉아서 메일을 확인한다. 사회생활 하니까 의외로 메일 써야 할 일이 많더라. 처음 알았어. 이메일이라는 건 사라져가는 구시대 문화 같은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말야. 업무용 메일을 몇 개 확인한다. 노트북을 올려놓은 책상 옆에는 작은 액자가 세워져 있다.

그 액자 맞다. 이선준과 내가 찍은 사진이다. 입맞춤 하는 액자 하나만 가져왔다. 이선준의 집에서 나올 때, 가져올까 말까 고민했는데 결국 가져왔다.

한정운에게 메일이 와 있다. 한정운과는 가끔 메일을 주고받는다.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나는 계속 거절했다.

완전히 버리기로 했으니까. 한정운이랑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그냥 가끔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 정도가 좋다. 음, 자기기만은 그만 하기로 했는데. 그래, 솔직히 말해야겠다.

전부 버리고 떠나자고 한 주제에, 한정운만큼은 만난다면 이선준과 박헌영에게 더 미안해진다. 그래서 메일 교환 정도로 타협한거다.

[살려줘요.]

제목이 이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장문의 메일이다. 아무도 믿지 못하겠지만, 한정운은 지금 군대에 있다.

============================ 작품 후기 ============================

완결 내버리고 튀는것보단 헛된 꿈이라도 꾸게 해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해서 2부 맛보기로 좀만 올리기로 했음. 연재 휴식은 다음 편까지 올린 다음에 할게. 2부의 설원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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