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설원입니다-105화 (105/224)

00105 1부 에필로그, 2부 프롤로그. =========================

1부 에필로그

발병자 보호 프로그램 - 23번째 상담

Date : 2016-05-06

본명 : 설원(25)

가명 : 설연(가명, 29)

담당의 : 유정희(43)

(전략)

“여전히 밤에 가끔 울어요. 심심하고 외로워서요. 솔직히 말하면 걔네들이 엄청 보고 싶어요. 예전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엄청 심각하지는 않아요. 그냥 걔네들이 보고 싶은 것보다도 그냥 혼자만 계속 있으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음, 친구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볼까요?”

“한 명은 저한테 고백했고, 한 명은 제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하길 요구했어요. 둘 다 저를 좋아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그 두 명이 전부 그냥 평범하게 친구로 남아있기를 원했어요. 그런데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좀 예쁘잖아요. 점점 저를 여자로 봤던 것 같아요.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되게…. 드문 경우잖아요. 정말 친한 친구가 이성이 되어버린다는거요. 저도 저랑 엄청 잘 맞는 친구가 있고, 그 사람이 이성이 되어버린다면 어떨지 가끔 생각해 봐요. 저도 그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과적으로, 저는 이선준이랑 싸웠어요. 제가 이선준이 못 견딜 상황들을 자꾸 요구하니까 폭발했어요. 저도 인정해요. 이선준이라는 그 친구한테 계속 의지하고, 기대고, 그러는 동시에 유혹하는 것 같은 행동도 몇 번 했어요. 저는 일부러 유혹하면서, 이선준이 안 넘어오는 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제가 그런 행동을 하고, 이선준이 욕을 하거나 하면, 저는 내심 안심했어요. 아, 이 사람은 진짜로 나를 나로만 생각하는구나, 이성으로 보지 않는구나. 그렇게 더 믿어도 된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가 엄청 나빠요. 저도 알아요.

저는 이선준한테 집착했어요. 아직 제가 사랑했던 건지, 좋아했던 건지는 확신이 안 서요. 하지만 이선준이 없으면 저는 죽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계속 붙잡고, 심하게는 유혹이라도 해서 옆에 붙잡아두고 싶었어요.

사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이선준이 저를 좋아해도 상관없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아, 저에 대해서 말할 때 ‘것 같아요’라는 말 쓰지 않기로 했죠? 이선준이 저를 좋아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은 원칙주의자고, 자기가 정한 건 철저하게 잘 지키는 사람이었거든요. 날 좋아해도 티 내지 않고, 저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않을 거라는 거라고 여겼어요. 제 폭력이었죠.

처음에 제가 원한 건, 저를 좋아하지 말고 그저 친구로 대해주라는 거였어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어느 순간부터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바라는 건 바뀌었어요. 좋아하든 말든 상관 없으니까, 티 내지 말고 옆에만 있어줘. 이거였어요. 제가 모두를 기만한 거에요.”

“그 이선준이라는 친구와 싸운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봐도 괜찮을까요?”

“네, 이선준하고 저랑 싸운 건 아주 간단한 거였어요. 싸웠던 계기보다 그 동안 쌓여있던 게 폭발한 거였죠. 저는 계속 모순된 행동을 하면서 이선준이 저를 차라리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못 떠날 거잖아요. 그런데 저를 위해서 다른 여자랑 연애를 하려고 했어요. 저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연애를 하면 시간도 없고, 저를 만날 시간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제 자기기만인 것 같아요. 저는 그냥 이선준이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게 싫었어요. 이선준을 어디도 못 가도록 하고 싶었어요. 제 옆에만 있어주길 원했어요.

그래서 이선준은 저의 모순을 지적했고, 저는 그때 제 그런 지점을 전부 인정해야 했어요. 그리고 이런 관계가 결국 이선준에게 상처만 준다는 걸 알았어요.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저는 제가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연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어요. 더 큰 상처를 주고받을 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친구로 남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고, 연인이 되기에는 결과가 너무 뻔했어요. 그래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선준에게 엄청 큰 상처를 주고 죽어버리려고 했어요. 저를 증오하도록요. 그러면 제가 죽어도 저를 그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선준을 자극했어요. 저와 하고 싶다고 말한 건 이선준이지만, 그 대답을 유도한 건 저에요. 우리는 서로를 잘 알았어요. 화가 난 사람 뺨을 때리면 주먹이 날아오는 법이잖아요? 이선준을 도발해서 결국 하고 싶다는 대답을 이끌어내고, 그 날 섹스를 했어요. 그리고 도망쳤어요.”

“박헌영이라는 친구는요?”

“박헌영은 제가 변한 뒤 처음부터 계속 저를 성적으로 대상화했어요. 처음에는 엄청 불쾌하고 싫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그냥 받아들이게 됐어요. 농담 정도로 치부하게 된거죠. 제가 초경을 했을 때 박헌영과 같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박헌영 여자친구한테 들켰어요. 박헌영은 저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여자친구를 누나라고 속였어요. 박헌영은 친누나는 커녕 사촌누나도 없어요.

그 다음부터 박헌영은 저에게 좀 대놓고 집적거렸어요. 고백도 받았고요. 당연히 거절했어요.

그런데 저는 박헌영이랑 계속 친구로 남고 싶었어요. 그래서 꺼리지도 않고 계속 만났어요. 생각해 보면 제가 이선준하고 같이 살기로 했을 때 많이 상처받았을 거에요. 박헌영하고는 고백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대하고 행동했어요. 그러다가 점점 이게 잘못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완전히 거절해 버리려고 진지하게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얘가 생각하는 게 내가 그냥 여자가 되어서 좋다는 게 아니었더라구요. 저를 엄청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는 제가 마음이 병든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녀석이 제 내면에 사랑받을 만한 지점이 있다고 말했어요. 그 때 솔직히 감동했어요. 그래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는데, 그것도 기만이었죠. 저는 박헌영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어요.

저는 내심 박헌영이랑은 연애 하고 헤어져도 아직 이선준이 있으니까 괜찮아.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마음 속에서 두 번째로 소중하기 때문에 연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에요. 그 고백을 듣고 조금 있다가 이선준이랑 싸웠고, 섹스했어요.

이선준과 섹스를 한 다음에 박헌영에게 찾아갔어요. 이선준에게도 상처를 줬고, 박헌영에게도 상처를 주려고 했어요. 이선준이랑 똑같이 저를 미워하게 만들고, 제가 없어져 버리면 될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그냥 죽어버리면 박헌영은 분명히 이선준을 증오하거나, 화를 낼 게 분명하니까요. 박헌영이 미쳐서 이선준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청 나쁜 짓인 걸 알면서도 박헌영을 찾아간 거에요. 공평하게 상처를 주면 이선준과 박헌영이 서로 증오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구요.

박헌영한테는 이선준이 좋아서 너랑은 연애 못 한다는 식으로 말해버렸어요. 그게 마지막이에요.”

“음, 많이 좋아졌네요.”

“뭐가요?”

“조금 두서가 없는 것도 같지만, 이제 침착하게 잘 설명할 수 있잖아요?”

“그런가요? 하긴, 예전에는 막 소리 지르고 울고 그랬구나.”

“침착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건 곧 제대로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일 거에요. 친구들을 다시 만날 생각은 없나요?”

“글쎄요. 다시 만나고는 싶지만, 그러면 또 다른 상처를 주게 될까봐 겁나요. 그냥 이대로 만족해요. 가끔 보고 싶은 것만 참으면 되잖아요.”

“설연씨는 갑자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은 없나요?”

“음, 밤에 텔레비전 보고 있으면 가끔 자살충동 같은 게 느껴지긴 해요. 너무 심심해서요. 그런데 집에는 뭐 약 같은 것도 없어요. 투신자살 밖에 없는데 저는 별로 박살이 나고 싶지는 않아요. 누구나 자살 생각은 하지 않아요?”

“설연씨의 극단성은 조금 위험한 면이 있어요.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요. 저는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것도 고려해 볼만한 일인 것 같아요.”

“아뇨,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버렸는데 제가 멋대로 돌아가는 건 두 배로 나쁜 짓이에요.”

“네 맞아요. 하지만 설연씨는 자기기만과 죄책감으로 비롯한 문제들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죄책감을 부과하고 있네요.”

“음, 아……. 그런가요.”

“너무 괴로워하지 않도록 해요.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 나쁜 일은 아니죠. 하지만 너무 과하면 몸을 상할 수도 있어요. 설연씨는 생각이 아주 깊고 섬세해요. 저는 그게 아주 좋은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하하, 별로 믿지는 않지만 기분은 좋네요.”

“자, 오늘 상담은 이 정도로 하도록 할까요? 언제든 전화 하세요. 다음 상담은…. 2주 뒤 금요일로 할까요?”

“네, 좋아요. 수고하셨어요.”

“네, 설연씨도 수고하셨어요. 옷 잘 어울리네요.”

“고마워요. 선생님도 가운 잘 어울려요.”

종합소견 : 가장 심각했던 대인기피와 피해망상은 상당히 나아짐. 하지만 피해망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상담자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함. 여전히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기만 해도 상대방이 자신에게 성욕을 느낀다고 생각하고 있음. 하지만 피해망상 자체에 대해서는 타인을 무시하는 것으로 극복함. 대인기피는 여전히 있으나 심각한 수준은 아닌 편.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함.

우울증 증세가 나아지지 않음. 가벼운 충동장애의 조짐이 있음. 여전히 작은 사건들에 의미부여를 강하게 함. 무기력감을 이유로 항우울제 처방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음.

직무 만족도는 높은 편, 하지만 미팅 및 업무 관련 관계자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함.

과거 친구들에 대해 강하게 집착하고 있으나, 죄책감 및 자책 때문에 만나려고 하지 않음.

특이사항 - 전체적으로 양호하나 우울증으로 인한 극단적 행동이 우려됨. 격주로 지속 상담 예정.

============================ 작품 후기 ============================

1부를 요약하는 동시에 2부를 시작하기 전 설원의 상황을 정리하는 에필로그다.

2부는 조금 쓰여진 부분이 있지만 일단은 좀 쉬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2~3개월 정도 쉰 뒤에 돌아올 거니까 기다릴 사람은 기다려도 됨. 따로 설원을 팔아먹을 방법도 궁리해보고 있지만 잘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고.

기본적으로 2부는 1부에 비해 짧은 이야기가 될거다. 핵심적인 이야기만 끊어서 할 예정이거든. 아직 2부 내용 전체를 구상해놓은 건 아니지만 하나만 말해줌. 나는 다른 주요 등장인물을 만들 생각은 없다.

설원을 극한까지 굴려댄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휴머니스트다. 2부 첫 편을 올릴까 어떨까 생각하는데.... 완결성 있게 마무리한 다음에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괜히 2부 맛보기로 간지럽혀봐야 화만 나니까.

그럼 나중에 봅시다.

0